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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시라] 틀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에 시라부는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 덮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책을 읽느라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던 시라부는 인상을 쓰고 문을 노려보았다. 이게 연락 하나 없이 이렇게 늦어? 당장 붙잡고 짜증을 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민되기도 했다. 술에 취했으니 높은 확률로 술주정을 부리며 자신을 괴롭힐 거고, 시라부는 그걸 오냐오냐 받아줄 자신이 없었다. 백 퍼센트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다. 시라부는 잠시 자는 척을 할지 고민했지만 눈을 감기도 전에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짜증나는 ―미워할 수 없어서 더더욱― 얼굴이 보여 시라부는 얼굴을 구겼다. “지금 몇 시야?” 카와니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몇 ..

hq/글 2016.02.10

[세미시라] 기다림에 갇혀서

세미는 인상을 쓰고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하나가 연착된다는 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비행기는 하필이면 세미가 기다리는 비행기였다. 세미는 한숨을 쉬며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세미는 그다지 애연가도 아니었고, 고작해야 하루에 몇 개비 필까 말까한 수준으로 담배를 피웠지만 오늘따라 유독 담배가 그리웠다. 한파가 찾아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별로 추위를 안 타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세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에 가스가 부족한지 불꽃이 자꾸만 바람에 꺼지려 드는 걸 간신히 붙들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쌉싸름한 연기가 입 안을 맴돌고 목구멍을 간질였다. 4년 만에 보는 건가. 세미는 손을 들..

hq/글 2016.02.07

[아카카게] 맹금류의 테이블 매너

15년 8월 22일 카게른 온리전에 나왔던 카게른 소설 앤솔 '그림자의 밤' 선입금 예특으로 작성했던 글입니다. 카게야마는 먹는 것을 좋아했다. 본인의 말로는 체력관리를 위해 든든하게 먹는 거라곤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음식을 보는 그의 눈은 언제나 빛나고 있었다. 특히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경우엔 더욱 그랬다. 카레라이스나 고기 종류가 눈앞에 있을 때면 카게야마의 뒤로 바쁘게 꼬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어린 아이가 따로 없었다. “카게야마.” 아카아시는 턱을 괴고서 물끄러미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입 안 가득 카레를 밀어 넣기에 정신이 없어 아카아시가 숟가락을 내려놓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아카아시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네?” 불룩한 볼이 움직이..

hq/글 2016.01.25

[쿠니카게] 분홍색 기차

기차표를 끊었다. 계기는 간단했다.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중, 바닥에 앉아 내 다리에 기대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던 카게야마가 툭 던진 말 때문이었다. “기차 여행 가면 재밌나.” 나는 고개를 숙여 카게야마의 얼굴을 거꾸로 마주보고 숟가락을 뺏어들려 했다. 하지만 카게야마가 빨랐다. 카게야마는 용케도 숟가락을 뺏기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퍼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한 번도 안 가봤어?”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었는지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내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가봤어?” 카게야마는 그렇게 물으며 아이스크림이 묻은 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손목을 잡아 낚아챘다. “응.”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자연스레 내 입 안으로 가져갔다. 카게야마의..

hq/글 2016.01.16

[세미우시시라] S와 S의 차이

0. 세미 에이타와 시라부 켄지로의 차이. 1. 세미 에이타는 적당히 우시지마를 타박할 줄 알았다. 우시지마가 사흘째 점심 메뉴로 하이라이스를 고르는 걸 보곤 그의 식권을 뺏어 자신의 것과 바꾸었다. “이거 사흘째 먹는 거지?” 우시지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는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바꾸어 웃으며 우시지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른 방면에서는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왜 하이라이스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쓸까, 우리 와카토시는.” 우시지마는 제 손에 들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미의 식권이었던 것을 바라보았다. A정식이었다. 세미는 이미 하이라이스를 받기 위해 우시지마의 곁을 떠나있었다. 2. 시라부 켄지로는 우시지마를 타박하는 법을 몰랐다. 고시키가 시라부에게 수학 숙제를..

hq/글 2016.01.11

[텐도레온] 나는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해 (For. 퍄 님)

“이쪽인가 봐, 와카토시.” 중학생 때부터 늘 바로 옆에서 봐온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라 크게 낯선 느낌은 없을 줄 알았건만 밖에서 보는 것과 안을 헤집고 다니는 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오오히라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뒤에서 우두커니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우시지마를 향해 손짓했다. 학교가 워낙 크고 넓은데다가 입학식이라 그런지 어딜 가도 사람이 넘쳐서 입학식이 열리는 대강당까지 가는 길을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헤맨 오오히라와 우시지마는 간신히 대강당의 입구를 찾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오오히라도 우시지마도 초등학생 때부터 이른 시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연습을 하는 게 습관처럼 밴 터라 오늘도 역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일찍 일어났기에 다행히 식에는 늦지 않은 듯했다. 대강당..

hq/글 2015.11.30

[오이카게] 겨울, 다시, 겨울

* 오이카게 교류회에 가져갔던 원고입니다.* BGM 有 4년 전 겨울도 이렇게 추웠던가. 카게야마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그저 이 길을 걸을 때 쥐었던 오이카와의 손뿐이었다. 4년이나 지났음에도 비교적 생생한 감촉이었다. 날씨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오이카와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한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했던 데이트였다. 주변 상황 같은 게 떠오를 리가 없었다. 작은 숨소리에도 긴장해 손가락을 옴찔거리고, 혹여 제가 실수라도 했을까 싶어 연신 제 옆의 사람을 올려다보기 바빴던 날이었다. 그러니 그날의 기억이 온통 오이카와뿐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날씨 따위가 머릿속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살짝 움츠리며 손을 주머..

hq/글 2015.10.18

[세미시라] Common Love

- 오늘 친구들이랑 약속 있댔지? “응? 아…… 응.” - 설마 총각파티 같은 거라도 해? “……내가 그런 걸 할 것 같냐.” 세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대꾸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말대로 주위에서 농담처럼 이제 곧 결혼인데 한 번 실컷 놀아야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종종 흘러들어왔지만 그런 저속한 문화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 왜, 어차피 좋아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넌 좀,” - 우리 둘만 있는데 뭐 어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는데 한 번쯤 그렇게 진탕 놀고 오는 것도 좋지 않아? 나 결혼하고 나서는 용서 안 해줄 거거든. “그러는 넌. 오늘 그렇게 놀고 오게?” 그녀는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었다. 헛..

hq/글 2015.10.13

[시라우시] 여름의 침묵

시라부는 우시지마와 함께 느리게 옮기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갑자기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선 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우시지마는 물끄러미 시라부와 여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고 시라부는 그런 우시지마의 시선에 당황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교복으로 보아 그녀는 3학년이었고, 당연히 우시지마 쪽에 볼 일이 있는 줄로만 알았더니 우시지마의 반응으로 보아 모르는 상대인 듯했다. 하지만 시라부 자신도 모르는 상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라부는 조심스레 우시지마를 바라보았지만 우시지마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똑바로 시라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나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가, 시라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여자를 마주보..

hq/글 2015.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