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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Another World

쩍, 쩌억, 쩍…. 귓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눈을 감는다. 그 정체모를 소리는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오고 있었다.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 여전히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눈을 감아봤자 오히려 더 선명한 형체를 띄고 고막을 건드려올 뿐이었다. 그는 느리게 손을 들어 제 얼굴에 손바닥을 얹는다. 움푹 패여 핼쑥해진 볼을 몇 번 문지른 그는 다시 바닥으로 손을 내린다. 아,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축축한 것이 바닥에 고여 있었는지 섬뜩한 감각이 그의 몸을 파고든다. 그는 바닥에서 손을 떼어낸다. 쩍, 쩌억, 쩍….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던 소리가 이번에는 손바닥에서 튀어나온다. 바닥과 떨어지며 흉측한 마찰음을..

hq/글 2014.08.11

[쿠로카게] 한여름 밤의 꿈

“카게야마!” 낯선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카게야마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제 3 체육관의 문틈 사이로 빼쭉 솟은 검은 인영이 카게야마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제법 환해진 얼굴로 그 인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빛이 체육관의 입구를 비춰 그제야 검은 인영의 제대로 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카게야마는 그 실루엣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제멋대로 솟은 머리에 충분히 장신인 카게야마보다도 훨씬 큰 키. 카게야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네코마 고등학교 배구부 주장, 쿠로오 테츠로였다. “어디 체육관인지도 말 안 하고 그냥 체육관이라고만 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싱글싱글 ..

hq/글 2014.08.09

[오이카게츠키]

트위터 백업 카게야마는 내게 딱 그런 존재였다. 나 갖기는 싫지만 남 주기는 더 싫은. 그런 내 의견을 들은 카게야마의 애인, 이름은 까먹었지만, 아무튼 안경잡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래서요? 얼음이 다 녹아버린 주스를 빨대로 휘저은 안경잡이가 내게 반문했다. 말했잖아, 남 주기는 더 싫다고. 계속해서 애먼 빨대를 괴롭히던 안경잡이의 손이 멈췄다. 우습네요. 한 박자 말을 멈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 미련인가요? 그의 말에 나는 손등에 턱을 괴고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럼 그냥 순순히 인정하세요. 인상을 찌푸린 그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뭘? 내 대답에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노려보았다는 쪽이 맞겠지만. 당신, 카게야마 좋아하고 있..

hq/글 2014.08.07

[오이카게스가] Scent

홀로 남아 부실을 정리하던 카게야마는 바닥에 떨어진 주인 모를 티셔츠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 티셔츠는 주인을 찾아주기도 힘들 만큼 아무런 특색이 없는 티셔츠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한 장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민무늬의 흰 티셔츠. 티셔츠를 주운 카게야마가 끙, 하는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허리를 펴고서 살짝 구겨진 티셔츠를 들어 탈탈 털어보았다. 흰 티셔츠는 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약간의 구김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번듯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오늘 실수로 흘리고 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카게야마는 혹시나 누군가 제 것이라는 표시라도 해뒀을까 싶어 티셔츠를 얼굴 가까이 하고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았다. 티셔츠에는 아무런 표식도 남겨져있지 않았지만, 그 대신 카게야마는 기묘한 기시감을..

hq/글 2014.08.02

[쿠로카게] 따뜻한 향기

“분명 여기다 놨는데…” 콧등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기 직전인 안경을 간신히 추켜올려가면서 카게야마는 정신없이 책꽂이의 책들을 뒤집어엎었다. 마감기한이 코앞에 닥친 기획안에 들어갈 아이디어를 잔뜩 메모해두었던 수첩이 사라진 탓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카게야마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이젠 수첩이 있을 리가 없을 옷장의 문까지 열어가며 그야말로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버리긴 아깝지만 잘 입지 않는 옷들을 모아두어 열일이 거의 없는 옷상자까지 열었을 때 카게야마는 수첩을 찾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동작을 멈췄다. “…….” 카게야마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빛이 바랜 붉은색 져지였다. 카게야마보다 한 치수 큰 사이즈의 져지. 분명 카게야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져지의 주인을 알고 ..

hq/글 2014.07.21

[오이카게] 토비오네 캡틴

“원장님 저 왔어요―” 알록달록한 어린이집의 문을 연 오이카와가 신발을 벗으며 큰 소리로 말하자 신발장 옆 구석 벽에서 동그랗고 검은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신발장 안에 넣은 오이카와가 걸어가 그 튀어나온 작은 머리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홱하고 돌아 아이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아이는 조그맣게 딸꾹질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작은 어깨가 눈에 보일정도로 움찔하더니 곧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에 띠게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 알았어요?” “거기 숨어도 다 보인다니까, 토비오? 형아 마중 나왔어요?” “응, 캡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 가득히 지어보였던 실망한 표정은 어디가고 금세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려는 아이의 작은 이마에 오이카와가 잽싸게 아..

hq/글 2014.07.19

[츠키카게] 의문점

처음엔 그냥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츠키시마의 눈동자가 힐끗 카게야마를 향했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잘난 줄 아는 독단적인 코트위의 왕. 그런 주제에 배구 시합에서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 열을 내는 꼴까지 더더욱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그 독재자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고 그저 제 방식이 틀렸다는 걸 알고, 그래서 시합에 패배하고, 그 때문에 코트에 무너져 충격 받은 얼굴을 하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처럼. 하지만 보란 듯이 카게야마는 저를 이겨 보였다. 그것도 놀라운 방식으로. 그 카게야마가 다른 이에게 맞춰준다? 중학교 3학년, 카게야마의 마지막 경기를 봤던 츠키시마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hq/글 2014.07.18

[오이카게]

사각사각. 그것은 벌레가 종이를 갉아먹는 소리도, 풀잎을 갉아먹는 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 네가 나를 갉아먹는 소리.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작은 네가 내 발밑에서 천천히, 천천히 나를 갉아먹으며 올라오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해본다. 너는 나를 갉아먹고 자랄 것이다. 네가 자라면 자랄수록 나를 갉아먹는 그 속도는 무서운 기세로 빨라질 것이고, 끝내 나를 통째로 삼켜낼 것이다. 나는,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네게 먹히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각사각. 열심히 나를 갉아대던 네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뿌리를 뽑아버리면 된다. 저것이 자라 나를 삼켜낼 것이라면, 자라기 전에 내 손으로 해치우면 되는..

hq/글 2014.07.17

[오이카게]

20140627 7권 네타 주의 나는 녀석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오로지 단 하나 만을 품고 있는 눈동자, 끈질기게 나를 쫓는 시선, 쉬지 않고 공을 만지는 손길. 그 모든 것이 싫었다. 처음 입부한 녀석을 본 날 나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저건 천재구나. 공을 다루는 손길조차가 달랐다. 내가 몇 년에 걸쳐 익혀온 그 손짓과 느낌을 저 녀석은 날 때부터 지니고 태어난 것이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짜증나는 일인가. 짜증이 났다. 일부러 평소보다 더 세게 서브를 내리꽂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볍게 서브로 점수를 따내고 우연히 마주친 녀석의 눈은 이미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서브 가르쳐주세요, 오이카와 선배. 그로부터 내가 지겹도록 들은 말이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천재라는 것들은 남의 기술 따위..

hq/글 2014.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