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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카게] 분홍색 기차

팥_ 2016. 1. 16. 22:17

  




  기차표를 끊었다. 계기는 간단했다. 집에서 함께 영화를 보던 중, 바닥에 앉아 내 다리에 기대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던 카게야마가 툭 던진 말 때문이었다. “기차 여행 가면 재밌나.” 나는 고개를 숙여 카게야마의 얼굴을 거꾸로 마주보고 숟가락을 뺏어들려 했다. 하지만 카게야마가 빨랐다. 카게야마는 용케도 숟가락을 뺏기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퍼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한 번도 안 가봤어?”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었는지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내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가봤어?” 카게야마는 그렇게 물으며 아이스크림이 묻은 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손목을 잡아 낚아챘다. “응.”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자연스레 내 입 안으로 가져갔다. 카게야마의 손은 따뜻했지만 아이스크림은 차가웠다. 얼굴이 붉어진 카게야마가 손가락을 빼내려 했으나 나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갈래?” 끈덕지게 손가락을 핥아낸 후에 물었다. 카게야마는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까.” 우리는 작은 노트북 화면 앞에서 머리를 맞대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고 마우스의 휠을 굴렸다. 이미 수백 번은 본 화면이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슬슬 비죽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카게야마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머리를 감싸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이마를 가볍게 부딪쳤다. “나는 못 고르겠어.” 결국 카게야마가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나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 튀어나온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아무데나 가자.”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속삭이자 간지러웠는지 카게야마가 몸을 잘게 떨었다. “너랑 있으면 어딜 가도 좋을 거야.” 살짝 코를 부비며 속삭이자 카게야마가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찮은 거지?” 카게야마가 물었다. “아아니.” 나는 살짝 말을 느리게 끌며 대답했다. “이렇게 가는 것도 좋잖아.” 아무 계획 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차의 덜컹거림 속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가끔은 창밖을 보며 풍경 구경도 하고, 도시락을 사먹고, 몰래 손을 맞잡고 키스를 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기차의 한 칸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생각보다도 기차 안엔 사람이 적었다. 휴가철도 아닌 평일이니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적었다. “창가에 앉을래?” 카게야마는 꼭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애초에 나는 창가 자리에 그다지 집착하는 편도 아니었고, 기차 여행을 처음 가보는 카게야마는 창문 밖을 내다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건넨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카게야마가 앉기를 기다린 후 그의 옆에 앉았다. “도시락은 언제 팔지?” 카게야마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아직 출발도 안 했어.” 까맣고 동그란 머리에 점퍼에서 삐져나온 듯한 깃털이 묻어 있어 떼어주며 대답했다. “사람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빼고 슬쩍 기차 칸을 둘러보며 말했다. “왜?” 나는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손가락을 욱여넣으며 물었다. “이런 거 마음껏 할 수 있잖아.” 카게야마는 깍지를 잡아 낀 우리의 손을 들어 올리고 웃었다. 카게야마의 손에서 반지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나는 그 반지 위로 살짝 입을 맞췄다. “나는 사람 없어서 아쉬운데.” 카게야마가 흠칫 손을 떨었다. “왜?” 나는 혀를 세워 반지 아래로 드러난 손가락의 얇은 살갗을 핥았다. “스릴이 없잖아.” 내 말에 카게야마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다른 손을 뻗어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오래된 열차는 제법 많이 덜컹거렸다. 나는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카게야마는 어느새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있었다. 나는 잠든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깨지 않았다. 아마 전날 밤 제법 잠을 설쳤을 것이다. 햇빛이 카게야마의 왼쪽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눈이 부실 법 한데도 카게야마는 깰 줄을 몰랐다. 나는 슬쩍 손을 뻗어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러자 카게야마가 몸을 꿈틀거렸다. “더 자도 괜찮아.” 나는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쿠니미……” 카게야마가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응, 나 여기 있어.” 마치 잠에서 깬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 같아 나는 큭큭대며 대답했다. 결국 카게야마는 두어 번 눈을 끔뻑거리다 느리게 내 어깨에서 머리를 일으켰다. “도시락 먹을까?” 내 물음에 카게야마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졸음이 가득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부산스럽게 흔들리는 듯했다.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포크 카레는 없었지만 야채 카레는 있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나는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없어 적당히 잘 나가는 메뉴로 골랐다. “맛있어?” 카게야마는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내가 해주는 것보다?”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휘휘 저었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쯤 내릴까.” 나는 젓가락으로 도시락을 깨작대며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을 던졌다. 그러자 카게야마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금 전 내가 친 블라인드의 사이를 벌려 밖을 내다보았다. “이번 역.” “이번 역?” 내 되물음에 카게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왜?” 카게야마는 숟가락을 든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카레가 묻어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카게야마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여기 눈이 쌓였어.” 카게야마는 다시 블라인드를 벌렸다. 나는 고개를 빼고 카게야마가 벌려준 블라인드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이 전부 하얬다. 눈밭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셨다. “눈 보고 싶었어?”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눈 오는 데로 가자고 하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카게야마와의 대화는 가끔 어린 아이와의 대화 같았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린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내가 그 보호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편이 좋았어.” 카게야마는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묘하게 단호한 대답과 시선에 나는 잠시 카게야마를 마주보았다. 짙푸른 눈동자 너머에 내가 있었다. “왜?” 나는 느리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목적지를 모르고 떠나는 여행이 꼭 우리 사이 같아서.”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보다 심오한 것이라 나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나는 자주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 카게야마의 시선이 내 눈에서, 내 손으로 떨어졌다. 나는 손을 등 뒤로 감추려했지만 카게야마가 더 빨랐다. 그는 양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내 손에 비해 카게야마의 손은 따뜻했다. “결혼도, 아이도 없이 앞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연애.” 카게야마는 느리게 내 손을 쓰다듬었다. “목적지도 정보도 없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행.”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게야마가 살짝 웃어보였다. “그런 무책임하고 위험한 여행을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멋진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카게야마의 손을 마주 붙들었다. 내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 누군가가 나여도 괜찮아?” 아마 내 눈동자는 볼품없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내 얼굴 앞으로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너여서 괜찮아.”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카레를 먹은 직후에 키스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어디서 내려도, 너랑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이 여행으로 더욱 확실히 그런 걸 느낄 수 있겠지. 그래서 이런 여행을 떠나고 싶었어. 어디서 내려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라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결국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얼굴을 떨어뜨렸다. “기왕이면 눈 쌓인 곳이면 더 좋고.” 카게야마가 짧게 덧붙였다. 나는 그의 목덜미 위로 가쁜 숨결을 내뱉었다. 불확실한 미래. 우리는 모두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우리는 행복했지만, 그건 현재였다. 카게야마는 이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목적지도 계획도 없는 여행이지만 함께하는 사람이 나라면 괜찮다고 했다. “눈사람 만들까?” 내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더 크게 만드나 내기하자.” 카게야마가 대답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방송이 들려왔다. 곧 열차가 멈춘다는 방송이었다. 카게야마가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며 내 머리를 밀어냈다. 카게야마가 내리고 싶어한 이번 역은 아이러니하게도 종착역이었다.







#카게른_전력_60분

주제 ; 기차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