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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신지]

“잠, 깐만, 에미야……!” 허겁지겁 신지의 궁도복을 벗겨내던 시로는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행동을 뚝 멈췄다. 왜 그러냐는 듯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빤히 저를 쳐다보는 행동에 신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 말까?” 그 말에 신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시로의 멱살을 잡았다. 뭐야, 왜 그래?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말투에 신지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붙잡은 멱살을 얼굴 쪽으로 확 끌어왔다. 갑작스레 신지의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시로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연신 끔뻑였다. “계속 해, 에미야.” 고개를 들어 시로의 귓가에 속삭인 신지가 자연스레 목에 팔을 두르며 입을 맞춰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시로도 금세 신지의 행동에 따라 혀를 섞으며 가슴팍을 더듬었다. 서툴고..

etc/글 2017.12.16

[00Q/공큐] Brave New World

00Q 크리스마스 합작 부문으로 제출한 글입니다.http://rocn12.wix.com/00q-christmas “무슨 짐을 그렇게 들고 가?” 제 몸보다 더 큰 상자 하나에, 그 위로도 겹겹이 상자를 쌓아 올려 앞이 보이긴 하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짐들을 들고 가는 Q의 팔을 본드가 붙잡으며 물었다. 역시나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던 건지, Q는 본드가 팔을 붙잡자 크게 놀라며 몸을 휘청거렸다. 덕분에 앞으로 쏟아지는 작은 상자들을 본드가 급하게 팔을 벌려 받아내려고 했지만 세 개의 상자를 모두 받아내기는 현직 더블 오 요원의 반사신경으로도 무리였다. 두 개의 상자는 아슬아슬하게 본드의 품으로, 나머지 하나의 상자는 윤기가 흐르는 본드의 구두 위로 안착했지만 결국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

etc/글 2015.12.24

[00Q/공큐] 구원

본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처 매뉴얼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아마 이건 얼마 되지 않은 본드의 더블 오 요원 인생 중 최악의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해봐도 단연 일 순위일지도 몰랐다. 본드는 제 체구보다 조금 큰 파자마를 입고서, 삐뚤어진 안경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어린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전히 이건 제 실수였다. 처음에는 먼저 아이가 있는 지에 대한 여부를 알려주지 않은 백업 팀에게 화가 났지만, 어찌됐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처리하기 전에 다른 목격자가 될 만한 인물은 없는지 살피지 않은 제 실수였다. 아차.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가는 순간 본드는 급하게 남자의 시신을 겨누고 있던 총을 아래로 내렸다. 아이는 소리를 지르지..

etc/글 2015.12.06

[본드+프레디] Stuck In The Middle

“둘 다 가족이었습니까?” 나란히 선 두 개의 묘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던 프레디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란히 세운 무덤이란 게 다 그렇죠.” 프레디는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한참동안 말없이 비석을 바라보았다. “이름 때문에 그래요?” 다시 말을 이은 건 프레디였다. 남자는 어쩌면 그가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릴 상대를, 그래도 괜찮을 상대를 기다려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형은 작곡가라 사용하던 예명으로 묻었고, 동생은 SIS 사람들이 본명으로 못 묻게 했어요. 그게 나를 위한 거라나 뭐라나.” 프레디는 입술로 담배를 물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한 대 줘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웃기는 집안이죠.” 담배를 물고 말한 탓에 짓눌린 발음의 단어들이 새어나왔다..

etc/글 2015.12.03

[00Q/공큐] 이유

제임스 본드는 천천히 거실을 둘러보았다. 최근에 이사했어요? 머니페니가 그렇게 물었던 것이 떠올라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렇게 물어볼 만도 한 모양새였다. 가구라고는 최소한의 살림살이가 전부인 데다가 박스에 담긴 짐들은 거실에 너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지저분한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지저분하기만 했다면 최근에 이사했느냐는 느낌을 주진 못했을 것이다. 흔히 사람 사는 집이라면 필수로 느껴질 법한 주인의 체취나 흔적 같은 게 본드의 플랫에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신다 벗어 놓은 양말이나 아무렇게나 걸어 놓은 겉옷조차 없다는 말이었다. 본드는 단 한 번도 이곳을 집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본드가 집이라 불렀던 공간은 스카이폴, 그곳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전전했던 곳들은 모두 괜찮은 곳들이었지만 ..

etc/글 2015.11.30

[00Q/공큐] 관계의 도약

‘반지라도 맞출까?’ Q는 언젠가 자신에게 물어왔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저는 그 물음에 뭐라고 대답했던가. 자신의 대답을 떠올리는 일은 본드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무슨 반지예요, 어린 애들처럼.’ 아마 저런 식으로 대답했던 것도 같았다. 다소 쌀쌀맞은 제 대답에 본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딱히 Q를 조르지도 않았고, 투덜대지도 않았다. 그래서 Q는 그 사실을 쉽게 지워버렸다. 그가 반지를 맞추고 싶은 마음에 자신에게 물은 게 아니라, 어린 자신을 위해 그가 눈높이를 낮추어 생각해낸 질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기 전까진 누구보다도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는 사람이었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그의 손가락에 반지 비슷한 것이 끼워져 있던 걸..

etc/글 2015.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