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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시라] 기다림에 갇혀서

팥_ 2016. 2. 7. 17:13





  세미는 인상을 쓰고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하나가 연착된다는 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비행기는 하필이면 세미가 기다리는 비행기였다. 세미는 한숨을 쉬며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세미는 그다지 애연가도 아니었고, 고작해야 하루에 몇 개비 필까 말까한 수준으로 담배를 피웠지만 오늘따라 유독 담배가 그리웠다. 

  한파가 찾아온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별로 추위를 안 타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세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에 가스가 부족한지 불꽃이 자꾸만 바람에 꺼지려 드는 걸 간신히 붙들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쌉싸름한 연기가 입 안을 맴돌고 목구멍을 간질였다. 

  4년 만에 보는 건가. 세미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아무튼 얼토당토 없고 못된 자식이라니까. 세미는 한숨과 함께 흰 연기를 뿜어냈다. 


  시라부가 고백해온 건 4년 전이었다. 시라부의 졸업식이었다. 세미는 시라부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도쿄에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시라부에게는 마침 방학이라 본가에 내려온 김에 졸업식을 보러온 거라 둘러댈 생각이었다. 특별히 친밀한 사이도 아닌 후배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그 비싼 기차표 값을 들여가며 왜 여기까지 왔느냐 묻는다면, 세미는, 좋아하는 사람을 합당하게 보러 올 수 있는 방법으로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거라 대답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다. 일 년이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향으로 내려와 시라부를 보러 갈 수 있었겠지만, 그만한 이유가 없었다. 세미는 명분 없이 멋대로 행동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다.

  그러니 졸업식은 세미에게 있어 아주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 가는 건 아니었다. 그저 딱 하나, 시라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시라부는 세미의 얼굴을 보고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서도 마음 한 구석이 괜히 찜찜해져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세미는 시라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온갖 화려한 꽃다발 사이에서 유난히도 눈이 가던 백합다발이었다. 희고 커다란 꽃송이들로만 이루어져있는 꽃다발이 이상하게 시라부를 떠올리게 했다. 세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백합 꽃다발을 샀다. 시라부는 그걸 받아들면서 기어코 한 소리를 흘렸다. “졸업식 날 이런 꽃다발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까?” 세미는 부루퉁한 얼굴로 시라부에게서 꽃다발을 뺏으려들었지만 시라부는 재빠르게 등 뒤로 꽃다발을 숨겼다. “줬다 뺏으려고요?” 세미는 인상을 쓰고 시라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시라부는 대놓고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리고…… 


  세미는 손가락 가까이까지 타버린 담배를 비벼 꺼 쓰레기통에 버리곤 다시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할 거면서 여기까진 왜 왔어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세미는 그대로 사레가 들려 몇 번이고 기침을 하느라 붉어진 얼굴에, 눈에는 눈물까지 달고 겨우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시라부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세미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시치미를 떼면 될 텐데, 그것도 못했다. 고백할 용기는 없으면서도 제 마음을 부정할 용기도 없었다. 시라부는 세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쩔 줄 모르고 시라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세미와는 다르게 시라부의 시선은 곧게 세미를 향해 있었다.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라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담배가 빨리 타는 것 같지. 세미는 궁시렁대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이만 들어갈까 생각하다 조금 더 바람을 맞고 있기로 했다. 4년 만에 만나는 사람을 담배 냄새를 풍기며 맞고 싶지는 않았다. 시라부가 냄새가 밴다며 짜증 낼 것도 같았지만. 세미는 몸을 떨며 목도리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저 유학가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세미는 갈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굴려대던 눈동자를 그제야 시라부에게로 고정시켰다. “영국으로 갈 건데,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안 올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공부하기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시라부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세미는 주먹을 꾹 쥐었다. 한국도 중국도 아닌 영국. 멀어도 너무 멀었다. 세미는 시라부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제가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걸 이제야 말하는 것, 동시에 유학 사실까지 알리는 것. 어느 것도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세미는 주머니 안에 넣어 놓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꺼내 메신저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시라부와 주고받은 대화가 가득이었다. 대화들 간에 시간 차이는 제법 있었지만 그래도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쌀쌀맞은 대답도, 무뚝뚝한 대답도 많았지만 중요한 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4년 동안 한 번도 연락을 거른 적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시라부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시험 기간이라 바쁘네요. 선배도 시험 기간이죠? 그만 놀고 공부나 하세요. 이런 식의 메시지였지만 세미는 몇 번이고 그 말을 곱씹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는 지난밤에 도착한 것이었다. 간단명료했다. 출발공항, 그리고 도착공항과 도착시간이 적혀 있었다. 시라부는 정말로 한 번도 일본에 돌아오지 않았다. 한 번쯤은 가족들을 보러 올 법도 한데 그마저도 없었다. 세미는 고등학교 시절의 시라부를 기억해냈다. 밤낮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해 제 대신 레귤러 자리를 꿰찼던 녀석이었다. 노력과 독기에 있어선 저 녀석을 이길 사람이 없었지. 세미는 몇 번이고 시라부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다시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공항 안으로 발을 옮겼다.


  “4년 정도 기다릴 수 있어요?” 시라부는 그렇게 물었다. “4년 동안 계속 좋아해줄 수 있어요?” 세미는 그 물음에 입술을 꾹 깨물고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시라부는 여전히 세미를 향해 곧은 시선을 보냈다. 세미는 그 시선에서 다른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버틸 수 있어요. 시라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솔직하지 못한 자식.” 세미는 중얼거렸다. 네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먼저 용기를 내준 건 시라부라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그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냥 좋아한다고 하면 되잖냐.” 세미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간단한 걸 못 해서 세미 선배는 오늘까지도 말을 안 하려고 하셨군요.” 시라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있었다. 


  세미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비행기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세미는 입술을 꾹 깨물고 초조한 손길로 난간을 잡았다. 시라부에게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주면 안 되냐고 부탁도 해보았지만 시라부는 민망하다며 단칼에 거절하곤 했다. 그러니 당연히 화상통화도 없었다. 이렇게 얼굴을 보면 당장 돌아가고 싶어질 거라는 게 이유였다. 세미는 그 말에 한참동안 답장을 주지 못했다. 

  사실은 언제나 불안했었다. 먼저 좋아한 쪽이 더 많이 좋아한다는 말. 그 말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시라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늘 보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사는 세미와는 다르게 시라부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 말을 내뱉으면 더 보고 싶어질 걸 알기에 그러리라는 걸 알면서도,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시라부의 성격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4년은 생각 이상으로 긴 시간이었다. 아마 시라부가 계속해서 딱딱한 대답만 건넸더라면 4년을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라부는 무미건조해 보이는 대답들 속에 언제나 진심을 담아주었다. 세미는 그것들을 소중히 긁어모아 담았다. 


  “돌아오면 연애해요.” 그게 시라부의 마지막 말이었다. “제가 4년을 버티고 돌아오는 동안,” 시라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세미의 손끝을 가볍게 붙들었다. “선배가 4년을 기다리는 거예요.” 시라부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속삭였다. 그리고 손을 놓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걸 안다느니, 4년을 기다려달라느니, 그 후엔 연애하자느니 다 해놓고는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다. 더 분한 건 시라부의 말대로 꾹 참고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었다. 시라부는 자신을 훤히 꿰고 있었다. 제가 기다릴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 저런 도박을 제의한 것이다. 세미는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뜨렸다가, 급하게 다시 손질했다.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진짜…… 세미는 초조하게 난간을 두드리며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라부를 찾아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지. 세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간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한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하, 세미는 헛웃음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선글라스 낀 거 봐라, 아주 연예인 납셨네. 괜히 청승맞아질 것 같은 기분에 세미는 일부러 삐딱한 생각을 했다. 변한 건 없었다. 정강이까지 오는 진회색 롱코트에, 크림색 터틀넥, 짙게 선팅이 된 선글라스, 그리고 여전히 삐딱하게 잘린 앞머리. 세미는 한참동안 그를 쫓았다. 손을 들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제 다 끝났는데, 이제 와 고작 이런 일에 겁을 먹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세미는 울렁이는 눈동자로 시라부를 쫓았다. 4년을 버티고 돌아온 너에게 내가 만족스러운 연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이상한 고뇌가 머리를 맴돌았다. 세미는 난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시라부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시라부의 얼굴이 제 쪽을 향했다. 그리고 멈췄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라부는 우두커니 멈춰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미는 천천히 난간을 놓았다. 손을 들려고 했다. 그러나 시라부가 더 빨랐다.

  시라부는 그대로 짐을 놓아버렸다. 커다란 여행 가방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항을 울렸다.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라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라부는 오로지 세미를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미는 코를 훌쩍였다. 자꾸만 코끝이 저려왔다. 시라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나 싶더니 이내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세미는 당황할 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달려온 시라부가 제 품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옅은 빛을 띤 정수리가 제 가슴께에 있었다. 두 팔이 숨이 막힐 정도로 제 몸을 죄고 있었다. 하, 하하…… 세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둥근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담배 냄새.”

  “어…… 미안.”

  “이제 끊어요.”

  시라부는 중얼거리며 세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럴게. 세미는 중얼거리며 몇 번 더 시라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시라부의 허리에 천천히 팔을 둘렀다. 쓸데없는 고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비어버린 자리를 오랜 갈망이 가득 메워나가고 있었다. 

  세미는 여태껏 자신이 기다리는 쪽이라 생각했었다. 오늘에서야 그 생각의 오류를 깨달았다. 기다리는 쪽 같은 건 없었다. 시라부도, 자신도, 모두 기다림에 갇힌 사람들이었다. 

  시라부의 코트에서는 짙은 그리움의 냄새가 났다. 정말로 그리웠었다. 세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시라부의 머리카락 위로 제 입술을 앉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세미는 입을 여는 대신 몇 번이고 시라부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는 길을 택했다. 그게 자신을 전부 대신해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