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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겨울, 다시, 겨울

팥_ 2015. 10. 18. 23:53



  





* 오이카게 교류회에 가져갔던 원고입니다.

* BGM 有

  

 


  


  4년 전 겨울도 이렇게 추웠던가. 카게야마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그저 이 길을 걸을 때 쥐었던 오이카와의 손뿐이었다. 4년이나 지났음에도 비교적 생생한 감촉이었다. 날씨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오이카와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한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도 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했던 데이트였다. 주변 상황 같은 게 떠오를 리가 없었다. 작은 숨소리에도 긴장해 손가락을 옴찔거리고, 혹여 제가 실수라도 했을까 싶어 연신 제 옆의 사람을 올려다보기 바빴던 날이었다. 그러니 그날의 기억이 온통 오이카와뿐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날씨 따위가 머릿속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살짝 움츠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외면적인 상황은 그 날과 같은 것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론 크게 달랐다. 우선 손이 비어있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쉴 새 없이 서로를 흘낏거렸던 그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그 누구도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았다. 카게야마의 시선은 땅을, 오이카와의 시선은 얼어붙은 호수를 향하고 있었다. 같은 곳을 향해 걷고 있었지만 모든 게 달랐다. 같은 건 서로가 향하는 방향뿐이었다. 사실 이런 건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도 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호숫가를 걷는 사람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저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 사람들과 오이카와가 다를 게 뭘까. 조금 가까이서 걷고 있는 것밖에 더 될까? 카게야마는 주머니 안의 손을 꼼지락거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련 갖지 말자.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다. 카게야마는 또 한 번 되뇌고 되뇌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것도 끝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 향하는 길의 끝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끝에 보이는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호수 앞에 덩그러니 놓인 초라하고 볼품없는 벤치. 아마도 우리의 목적지는 그곳이겠지.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자신이 없었다. 하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연애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니 처음이 아닌 게 더 이상했다. 

  “토비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재빨리 오이카와를 따라잡았다. 꽤 멀게 보이던 모퉁이가 벌써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네?”

  카게야마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우리가 보냈던 장소들.”

  “…….”

  “다 알고 있었어?”

  카게야마는 천천히 머릿속에 오늘을 떠올렸다. 영화관에서 요즘 예매율 1위라는 영화를 보고, 점심으로는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 전문점에 가서 오이카와는 가라아게를 올린 치킨카레를, 카게야마는 늘 먹던 대로 반숙 계란을 올린 포크카레를 먹었다. 그리고는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카페에 들러 오이카와는 바닐라 라떼를, 카게야마는 밀크티를 시켜 카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소파에 앉았다. 오이카와는 연신 커피를 홀짝였지만 카게야마는 한두 번 입에 가져다댈 뿐 그 후로는 손으로 머그컵을 쥐고 있기만 했다. 카페에 세 시간 가량을 앉아 있었지만 나눈 대화는 사소한 말들이 전부였다. 여긴 오랜만에 와도 언제나 똑같네요. 그러게, 참 똑같네. 이런 대화들이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대화는 대부분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졌고, 끊어진 후에는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대화의 시작을 이끄는 건 대부분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머리를 굴려 최대한 길게 대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입에서 나오는 건 허탈한 단답들 뿐이었다. 오이카와와 알고 지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십 년짼데 그러려니 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다른 때였다면, 정확히는 예전이었다면 이미 익숙한 대화의 패턴일 테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은 최대한 많은 대답을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이어서 더더욱 힘들었다. 카게야마는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카페를 나서자고 먼저 제안한 것 역시 오이카와였다. 

  아무도 다음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둘은 자연스럽게 스티커 사진 가게로 향했다. 카게야마는 제 발로 들어서면서도 어이가 없어 살짝 실소를 터뜨렸다. 오이카와 역시 그런 카게야마를 본 건지 덩달아 작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십대 중반의 남자 둘이 올만한 곳은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태연하게 기계를 고르고 있었지만 카게야마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기 바빴다. 기계를 고른 오이카와가 빨리 들어오라며 카게야마를 불렀고, 카게야마는 빨리 숨고 싶은 마음에 얼른 오이카와가 들어간 기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오이카와는 딱딱하게 굳어 렌즈를 쳐다보는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손을 둘렀다. 화면에 비친 오이카와의 얼굴은 어색함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지갑 구석에 들어있을 오래된 스티커 사진을 떠올렸다. 그것도 정리해야겠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리해야할 물건이 많았다. 4년의 시간이었다. 4년의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토비오쨩 뭐해? 웃어야지.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속의 제 얼굴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이 사진은 오이카와 선배에게 전부 주자고. 제가 가지고 있어 봤자 정리해야할 물건만 또 늘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카게야마가 채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카게야마의 주머니 속에 사진을 밀어 넣었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오이카와의 옆에 누가 봐도 어색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있는 자신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손엔 사진이 들려있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다시 사진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사진을 돌려주기 위해 오이카와에게 말을 걸 자신이 없었다.

  스티커 사진 가게에서 나와선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아직 위장 속에 음식을 더 밀어 넣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래야만 했다. 영화를 보고, 카레를 먹고, 카페를 가고,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갔던 것처럼 정해진 수순이었다.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시켰다. 오이카와는 ‘하나 더 시켜야하지 않아?’ 하고 물었지만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에 오이카와는 딱히 되묻지 않고 그대로 종업원을 불렀다. 스테이크는 그럭저럭 괜찮았고 파스타 역시 무난한 맛이었지만 역시 도저히 입에 넣고 싶지가 않았다. 카게야마는 평소처럼 보이기 위해 작은 크기로 고기를 썰어 입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파스타 역시 한두 가닥 정도를 말아 밀어 넣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카게야마를 힐끗 쳐다보고는 포크로 큼지막하게 파스타를 둘둘 말아 입 안에 집어넣었다. 맛있네.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져있었다. 그 때는 분명 호숫가에서 노을을 봤었는데. 카게야마가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옆에서 ‘일몰을 못 봐서 아쉽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아마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풍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와서 속이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느리고 깊은 호흡을 시도했다. 일몰.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해는 매일 진다. 하지만 오늘의 일몰은 특별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눈을 내리감았다. 

  “오이카와 선배.”

  “……응.”

  “행복했어요.”

  카게야마는 일순간 달라진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공기의 흐름이 멎었다. 카게야마는 애써 오이카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의 공기를 받아내면서도 시선 한 번 주지 않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오이카와는 알아들었을 테였다. 그랬기에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 거겠지. 카게야마는 주먹을 꾹 쥐었다.

  “처음으로 오이카와 선배랑 이곳에 왔던 그 날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오늘도,”

  첫 데이트를 보냈던 우리의 공간들. 오늘은 다시 한 번 그곳들을 모두 어루만졌다. 따뜻함과 설렘이 가득했던 그 때와는 달랐다. 우리의 손길에는 축축한 습기와 냉기, 그리고 혼돈과 불안만이 가득했다. 마지막 데이트는 다 이런 식일까?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모든 게 오이카와와 함께 한 처음이었다.

  “다 행복했어요.”

  침묵은 말이 없지만 동요할 줄은 알았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 줄 알았던 오이카와의 눈이 뚜렷하게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웃고 있었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건 환한 슬픔이었다.

  “다행이네.”

  오이카와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랬는데.”

  뒤에 덧붙인 문장은 분명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카게야마가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이제 후들거리기 시작한 발에 힘을 주고 버텨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처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뭘 해도 변하지 않는 상황은 카게야마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침묵이 바짝바짝 타올라 대지를 집어삼켰다. 메말라갔다. 차가운 모래 바람이 볼을 후벼 파고 있었다. 침묵은 끊어질 줄을 몰랐다. 언제나 정적을 깨부수는 건 오이카와였다. 하지만 오이카와 역시 가만히 카게야마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잘 지내.”

  “잘 지내요.”

  참다못한 카게야마가 겨우 작별인사와 비슷한 것을 내뱉음과 동시에 오이카와 역시 그러한 말을 뱉어냈다. 오이카와는 머쓱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역시 그랬다. 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먼저 돌아선 건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드러나는 그의 등을 지켜보다가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느리게 발을 내딛었다. 고꾸라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어 나갔다. 데이트를 마친 연인이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광경을 연출하기 위해 애를 쓰며 걸어 나갔다. 평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 편이 덜 질척거렸다. 카게야마는 하염없이 발을 옮겼다. 이대로 도쿄로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헬스장에 가야지. 어차피 잠은 못 잘 테니까. 우습도록 평범한 생각들을 하며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이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깐의 헤어짐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오늘은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진 것뿐이라고, 다시 돌아가서 라인을 하고 전화를 하며 다음 데이트 일정을 잡는 것뿐이라고.

  자, 그래서. 어디부터 정리하면 좋을까. 카게야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맨 손이 몰고 온 차가운 공기 덕분에 주머니 역시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손끝에 잡히는 두꺼운 종이의 모서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

  

  

  ……카게야마, 그거 아냐?

  뭘.

  오이카와 선배,

  그 사람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왜 그렇게 갑자기 결혼한 건지 알아?

  ……이제 와서 알 필요 없잖아. 어차피 벌써 5년이나 지난 이야기고.

  커밍아웃 했었대.

  …….

  남자 좋아한다고.

  …….

  그래서 부모님이 그렇게 보내버린 거라더라. 

  ……나한테 그걸 말해주는 의도가 뭐야?

  ……너도 알 건 알아야지.

  어차피 바뀌는 건 없어. 너도 알잖아. 헤어진지도 5년이나 지났고, 오이카와 선배는 이미 결혼해서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다 지나간 일 다시 꺼내봤자 기분만 이상해져. 이 얘기는 그만 하자.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

  ……내가 뭘.

  오이카와 선배,

  …….

  이혼했어.

  …….

  이유는 몰라. 몇 달 전에 이혼했다는 것만 알아. 근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킨다이치.

  ……어?

  말했지. 어차피 바뀌는 건 없어. 나는 벌써 스물아홉이고, 그 사람은 서른하나지. 우리가 언제 연애했는지 알아? 내가 스무 살 때야.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안 했을 때 연애했어. 언제 헤어졌는지 알아? 내가 스물네 살 때야. 그리고 지금은 스물아홉이지. 연애했던 기간보다 헤어진 후의 기간이 더 오래됐다는 거야. 그런데 뭐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

  ……야.

  이제는 상관없는 사람이야.

  …….

  다른 얘기나 하자. 그런데 쿠니미는……



  ◈

  

  

  갑작스레 찾아온 부상으로 인해 재활 겸 심신의 안정을 위해 내려온 고향이었다. 마침 시즌이 끝난 참이라 코치진 역시 순순히 카게야마의 결정을 따라 주었다. 오랜만에 밟는 고국이었다. 여름휴가 때는 아예 일본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일 년 만인 듯했다. 고향에 오는 건 더욱 오랜만이었고, 고향 친구를 만난 건 더더욱 오랜만이었다. 카게야마는 해외의 프로팀으로 이적한 후 의도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관계가 좁은 카게야마의 지인은 대부분 곧 오이카와의 지인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그게 두려웠다. 고향에 찾아오기까지도 몇 번이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오이카와는 도쿄에서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간신히 내린 결정이었다. 카게야마가 고향에 온다는 소식은 그의 고향 친구들을 꽤 들뜨게 했다. 최대한 조용히 온다고 온 건데도 어떻게 다 새어나간 듯했다. 그러나 다들 도쿄에서 생활하는 건지 정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중학교 동창인 킨다이치뿐이었다. 킨다이치는 대학을 졸업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며 부모님의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오이카와와도 자신과도 밀접한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킨다이치의 연락에 밤낮으로 고민했다. 킨다이치는 자신과 오이카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를 만난다면 무조건 오이카와의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몇 번 둘러 킨다이치와의 만남을 거절했으나 킨다이치는 제법 끈질기게 카게야마를 물고 늘어졌다. 결국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이 킨다이치를 만났고, 킨다이치는 마치 이걸 위해 그토록 만남을 고사했다는 듯이 오이카와의 이혼 소식을 알려주었다. 역시 만나서는 안됐는데. 카게야마는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역시 만나서는 안됐는데.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후회어린 말들을 목구멍 안으로 씹어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킨다이치의 말이 도화선이 된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필이면 이 날에, 하필이면 그곳으로 이렇게 걸어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조적인 의문이 끊이질 않았다. 분명 이런 목적으로 집을 나선 건 아니었다. 어깨에 멘 운동복이 담긴 가방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시내에 위치한 재활 센터에 가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왜.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킨다이치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커밍아웃 했었대. 그가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커밍아웃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기분으로, 무슨 이유 때문에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할 용기가 생겼을까, 당신은. 단 한 번도 카게야마의 앞에선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헤어지는 그 날까지도 그랬다. 오이카와는 언제나 보통을 유지했다. 보통처럼 웃고 보통처럼 말하고 보통처럼 카게야마를 대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홀로 겪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게 분했다. 왜 그랬어요? 따져 묻고 싶었다. 왜 혼자서, 왜, 나한테 말도 없이. 분이 끓어올랐다. 그게 카게야마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가봤자 오이카와는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그곳을 훑고 싶었다.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를 했던 곳. 오늘로 딱 5년 전이었다.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카게야마의 걸음은 느려져만 갔다. 저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벤치. 카게야마는 머릿속에 광경을 그려보았다. 한 때는 그곳에서 서로의 어깨를 나누었지만 한 때는 그곳에서 조금은 길었던 첫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길을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 여전히 이곳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얼어붙은 호수 바로 앞에 위치한 벤치는 여전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벤치엔 어떤 남자가 앉아있었다. 보이는 건 뒷모습, 정확히는 어깨 조금과 머리뿐이었지만 카게야마를 동요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남자의 머리색은 아주 익숙한 색이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색과 그 아래로 떨어지는 베이지 색의 코트 깃. 모든 게 다 익숙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벤치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벤치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장은 더욱 빠르게 요동쳤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왜?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향해 자꾸만 걸음을 옮기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대로 지나칠 거야. 애초에 여길 오려고 했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지나칠 거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주먹을 꾹 쥐고 천천히 걸어갔다. 거리는 점점 좁혀져갔다. 

  카게야마는 더 이상 발을 내딛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 그 자리에 우뚝 선 카게야마의 어깨에서 스르르 가방이 떨어져 크게 땅을 울렸다. 아주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땅을 딛고 서있는 생물들에게 위화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물론 이어폰을 끼고 벤치에 앉아 다리를 꼬고 까딱거리고 있던 남자에게도 충분했다. 남자는 천천히 진동이 울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남자는 느리게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카게야마는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어폰을 빼내는 손끝은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짝 떨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동요하고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을 감추고 싶어서인지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익숙한 머리모양, 익숙한 머리색, 그리고 익숙한 얼굴.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서늘하게 건조된 공기가 입안을 헤집어놓았다. 목이 말랐다.

  “……토비오?”

  “……오이카와 선배?”

  그리고 허공에서 부딪친 두 개의 목소리는 마치 5년 전처럼 동시에 울려 퍼졌다. 카게야마도, 오이카와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뚫어져라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나한테 말 안했어요? 도쿄에 있다더니 여긴 왜 왔어요? 왜 하필 오늘 여기에 왔어요? 왜 혼자 여기 앉아서, 왜, 왜? 마치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왜? 왜? 카게야마는 소용돌이처럼 머릿속을 뒤얽는 의문들을 침착하게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엉켜버린 의문들엔 더욱 더 끝없는 의문들만 추가될 뿐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주저앉아 통곡하고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카게야마는 이제 스물아홉이었지만 아직도 이 모든 것에 서툴렀다. 여전히 그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모든 게 오이카와와 함께 한 처음이었다.

  “토비오.”

  “…….”

  “나 이혼했어.”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화의 시작을 이끌어내는 건 역시나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는 한 점 변하지 않은 미소를 얼굴에 끌어올리며 주머니에 넣었던 왼손을 빼어 들었다. 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이었다. 카게야마는 9년 전에 이곳에서 쥐었던 그 손을 떠올렸다. 따뜻하고 단단하게 제 손을 잡아주었던 손을.

  더 이상 생각할 건 없었다. 애초에 카게야마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고 생각하여 결론을 내리는 행위에 약한 사람이었다. 열네 살 때건, 스무 살 때건, 스물네 살 때건 전부 그랬다.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카게야마는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실행했다.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러나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 카게야마는 그것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단숨에 땅을 박찼다.

  “…….”

  오이카와는 멍하니 제 품을 내려다보았다. 품 안으로 뛰어든 자신보다 조금 작은 남자에 의해 여미지 않은 코트자락이 뒤로 크게 펄럭였다. 동그랗고 검은 머리가 품 안에 있었다. 예전보다 더욱 단단해진 팔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코끝에 시린 향기가 스쳤다. 어깨에 작은 눈송이가 내려앉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대로 굳어있던 팔을 느리게 움직였다. 오이카와의 팔이 닿는 곳마다 카게야마의 옷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결정이 녹아내렸다. 

  오가는 말은 없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눈이 내려앉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걸로 충분했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다른 것들로 넘치도록 채워지는 것들이 있었다. 또 한 번 겨울이었다. 마지막 겨울이었다. 

  5년을 기다린 일몰이 일고 있었다. 







Let the rain fall, I don’t care.

I’m yours, and suddenly you’re mine.

Suddenly you’re mine.

And it’s brighter than suns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