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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시라] 틀

팥_ 2016. 2. 10. 17:02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에 시라부는 읽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 덮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책을 읽느라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던 시라부는 인상을 쓰고 문을 노려보았다. 이게 연락 하나 없이 이렇게 늦어? 당장 붙잡고 짜증을 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민되기도 했다. 술에 취했으니 높은 확률로 술주정을 부리며 자신을 괴롭힐 거고, 시라부는 그걸 오냐오냐 받아줄 자신이 없었다. 백 퍼센트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다. 시라부는 잠시 자는 척을 할지 고민했지만 눈을 감기도 전에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짜증나는 ―미워할 수 없어서 더더욱― 얼굴이 보여 시라부는 얼굴을 구겼다.

  “지금 몇 시야?”

  카와니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푹 숙이고 몇 번 비틀거리다 침대 위로 엎어졌다. 시라부는 재빠르게 몸을 피하려했지만 이미 카와니시는 시라부의 몸 위로 제 몸을 늘어뜨린 뒤였다. 시라부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카와니시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카와니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술 처먹었으면 주정부리지 말고 빨리 씻고 잠이나 자.”

  시라부는 결국 카와니시에게 한 소리 하는 건 내일 아침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며 발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꿈틀대며 시라부의 위로 더욱 올라왔다. 야, 좀! 시라부는 소리를 질렀지만 카와니시는 손을 뻗어 시라부의 목을 끌어안고는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으, 읍! 짙게 풍겨오는 알코올 냄새에 시라부는 발버둥을 쳤지만 술에 취한 사람을 힘으로 이길 도리가 없었다. 카와니시는 손을 뻗어 시라부의 뒷머리를 붙잡고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시라부가 어떻게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순간을 틈타 카와니시의 혀가 입안으로 거칠게 들어왔다. 시라부는 다급히 발버둥을 쳤지만 카와니시는 온 몸으로 시라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숨, 막혀, 흐아, 죽는 줄, 으, 알았잖아!”

  입맞춤이라기엔 상당히 저돌적으로 혀를 섞던 카와니시가 점점 더 격해지는 시라부의 발버둥에 간신히 입술을 떼자마자 시라부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카와니시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가만히 시라부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시라부의 얼굴 위로 제 얼굴을 가까이했다. 시라부는 본능적으로 카와니시의 입술을 피했다. 그러자 카와니시는 자연스럽게 시라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살결을 빨아들였다. 당분간은 터틀넥만 입게 생겼네. 시라부는 속으로 생각하며 카와니시의 머리를 밀어냈다. 카와니시의 행동은 부드럽고 상냥한 애무와는 거리가 멀었다. 시라부는 제 목덜미에 피멍이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좀, 곱게, 자라고……!”

  그러나 이미 카와니시의 손은 시라부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손에 시라부가 꿈틀대며 손길을 피해봤지만 카와니시는 집요하게 시라부의 가슴을 더듬었다. 

  “아, 진짜, 타이치, 흣,”

  카와니시는 시라부가 다시 입을 열자 급하게 입을 맞췄다. 진하게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시라부는 냄새만으로 취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입 안을 구석구석을 헤집는 움직임에 마시지도 않은 술을 마신 듯했다. 카와니시는 한기 때문인지 그새 꼿꼿하게 솟은 시라부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꼬집듯이 문지르며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시라부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몸을 뒤틀었지만 어느새 티셔츠는 얼굴 바로 아래까지 말려 올라간 뒤였다. 

  가끔씩 이런 일이 있긴 했다. 술에 취해 들어와서 귀찮게 구는 일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대뜸 입을 맞추고 몸을 부벼오는 때가 있었다. 그럴 때의 카와니시를 힘으로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시라부는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가만히 받아주자니 그건 또 자존심이 상했다. 시라부는 허리를 들썩이며 카와니시의 손을 피하려고 애를 썼다. 이미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에는 익숙해졌다. 차디찬 카와니시의 손과는 다르게 혀는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시라부는 양손으로 카와니의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힘으로 못 이긴다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시라부는 화를 꾹꾹 억누르며 그대로 카와니시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야릇한 소리를 내며 카와니시의 혀를 빨아들였다. 순간 카와니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시라부는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카와니시의 몸 밑에 깔려있던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그의 허리에 둘렀다. 카와니시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시라부는 이 때다 싶어 잽싸게 카와니시의 얼굴을 밀어내었다.

  “이제 자자, 타이치, 응?”

  카와니시는 멍한 눈으로 시라부를 내려다보았다. 시라부는 머리카락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 카와니시의 얼굴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카와니시는 한참동안 시라부를 쳐다보았다. 시라부는 인내심을 가지고 우는 아이를 달래듯 계속해서 카와니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최대한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물론 아직도 화가 끓어올랐지만 시라부는 그건 내일 해결하기로 제 마음 속에서 타협을 봤다. 

  그러나 카와니시는 언제 행동을 멈췄냐는 듯 이번엔 시라부의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야, 야! 시라부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카와니시는 귀를 틀어막은 사람처럼 조금 전까지 손으로 잡아 문지르던 시라부의 유두를 제 입술로 덮었다. 으, 야아…… 시라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카와니시의 머리를 잡았다. 카와니시는 허겁지겁 시라부의 가슴을 축축해질 정도로 핥아대며 헐렁한 바지 안으로 손을 뻗었다. 시라부는 귀찮다고 손에 잡히는 대로 바지를 ―카와니시의 것이었다.― 주워 입은 오늘 아침의 자신을 원망하며 급하게 카와니시의 손목을 붙잡아봤지만 이미 바지는 속옷과 함께 발목에 걸쳐진 후였다. 갑자기 드러난 맨 살에 시라부는 살짝 몸을 떨었다. 카와니시는 계속해서 시라부의 가슴을 강하게 빨아들이며 손을 움직였다. 아, 아파, 좀, 시라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카와니시를 힘껏 밀어내다 들려온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에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 너, 잠깐만……!”

  시라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카와니시는 순식간에 제 바지지퍼를 내리고 시라부의 발목을 잡아 벌리고 있었다. 시라부는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지금껏 카와니시와 많은 시간을 보내왔지만 오늘처럼 강압적인 때는 처음이었다. 시라부는 카와니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발목을 잡은 카와니시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나 안 풀렸, 야, 그대로 하면 찢어져, 잠깐, 만, 풀고 하자, 어?”

  시라부는 당황한 목소리로 카와니시를 말리며 손을 뻗어 침대 옆에 위치한 서랍장을 열려 애를 썼다. 서랍 하나만 열면 젤을 꺼낼 수 있었다. 시라부는 적어도 피를 보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시라부의 필사적인 손짓이 카와니시에게는 닿지 않았는지 카와니시는 연신 옆을 더듬대는 시라부의 손목을 잡아 낚아챘다. 

  “타이치……”

  시라부는 제 엉덩이 사이에 닿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며 다리를 오므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카와니시의 눈에 제 눈을 맞추려들었다. 술기운이 넘실대는 카와니시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가 들어찼을 때, 카와니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라부는 제 손목을 쥔 카와니시의 손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은 아니었다. 카와니시는 제가 싫다는 짓은 안 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조금 귀찮게 굴지라도 이렇게 강압적으로 나온 적은 없었다. 시라부는 카와니시의 손에서 팔을 빼내었다. 카와니시의 입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살갗에 닿아왔다. 시라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다시 한 번 카와니시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카와니시는 눈을 감고 강아지마냥 시라부의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제 좀 진정이 됐나? 시라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카와니시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카와니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시라부의 위로 쓰러졌다.

  “왜 그래, 응?”

  시라부는 제 가슴 위로 엎어진 카와니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카와니시는 어리광을 피우듯 시라부의 맨 가슴 위에서 도리질을 쳤다. 가는 머리카락이 가슴을 간질이자 시라부가 몸을 움찔거렸다.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오늘 무슨 약속에 다녀온다고 했었는지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아마 고등학교 동창생 몇 명과 만난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 중엔 배구부였던 녀석도 있어 카와니시는 시라부에게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시라부는 단칼에 거절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 그것도 술자리는 더욱 질색이었다. 

  “……켄지로.”

  카와니시는 겨우 시라부의 이름을 불렀다. 

  “응, 타이치.”

  시라부는 카와니시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다가, 문득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행동을 잠시 멈추었다. 가슴께가 축축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시라부는 애써 태연한 척 다시 카와니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시지마 선배가 곧 결혼할 거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시라부는 모든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듯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저도 모르게 멈춰있었다. 

  “……원래 프로 선수들은 다들 일찍 하잖아.”

  시라부는 힘겹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우시지마에게는 진작부터 약혼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와 결혼까지 할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 날이 생각나서……”

  카와니시는 말끝을 흐렸다. 카와니시는 ‘그 날’이 무슨 날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우시지마가 약혼 발표를 하던 날일 것이다. 아직 카와니시와는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 때. 답지 않게 술을 진탕 마시고 주정을 부리던 시라부의 옆에 있어준 건 카와니시였다. 시라부는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 사이에서 아주 흐릿한 영상의 일부를 떠올렸다. 

  “너는 한 번도 그 사람한테 말한 적 없었잖아.”

  카와니시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시라부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시라부는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향한 곳은 카와니시의 머리가 아니라,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었다. 카와니시는 시라부의 손을 피하려했지만 시라부는 끈질기게 쫓아가 카와니시의 양 뺨을 쥐었다.

  “뭐를?”

  시라부는 카와니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질문을 했다. 카와니시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말하기 싫어.”

  카와니시는 다시 눈동자를 돌렸다. 시라부는 카와니시의 뺨을 쥐고 있던 손을 놓고 이번엔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직도 그 시절에 갇혀있는 거지, 타이치.”

  시라부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듯 중얼거렸다.

  “나는 멀쩡한데 왜 네가 그래.”

  이번에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 날 모든 걸 다 놓았고,”

  시라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옛 기억이 갑작스레 밀려들어왔다.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너한테 왔잖아.”

  카와니시의 몸이 품 안에서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몇 년이 지났다. 아직도 카와니시가 좁은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 있을 줄은 몰랐다. 카와니시는 언제나 능청스럽게 시라부를 대했고, 때로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그랬기에 더더욱 카와니시가 옛날 일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고백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시라부의 물음에 카와니시는 손을 뻗어 시라부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다. 그리고 카와니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괜찮아.”

  시라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켜 카와니시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카와니시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나도 너도 여기 있잖아.”

  시라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한 눈꺼풀 안쪽에 카와니시의 옅은 눈동자가 계속 아른거렸다. 곧장 자신의 세계에서 우시지마를 놓아주었던 시라부와는 다르게 카와니시는 몇 년간,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동안 힘겨운 감정들을 붙잡고 홀로 사투를 벌였을지도 몰랐다. 저만 정리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미처 카와니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감긴 시라부의 눈꺼풀 위에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시라부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옛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잔뜩 술에 취해 엉망이 된 기억 속에서 겨우 건져 올린 파편이었다. 테이블에 엎드려 입술을 깨물고 끅끅 눈물을 흘리던 자신의 머리 위로 카와니시의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내가 도와줄게. 딱 한 마디였다. 다른 말은 없었다. 커다란 손은 계속해서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술에 취하면 둘 다 바보가 됐다. 눈꺼풀 위에, 양쪽 볼에, 코끝에, 입술에, 계속해서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입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