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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도레온] 나는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해 (For. 퍄 님)

팥_ 2015. 11. 30. 04:14




  “이쪽인가 봐, 와카토시.”

  중학생 때부터 늘 바로 옆에서 봐온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라 크게 낯선 느낌은 없을 줄 알았건만 밖에서 보는 것과 안을 헤집고 다니는 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오오히라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뒤에서 우두커니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우시지마를 향해 손짓했다. 학교가 워낙 크고 넓은데다가 입학식이라 그런지 어딜 가도 사람이 넘쳐서 입학식이 열리는 대강당까지 가는 길을 찾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헤맨 오오히라와 우시지마는 간신히 대강당의 입구를 찾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오오히라도 우시지마도 초등학생 때부터 이른 시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연습을 하는 게 습관처럼 밴 터라 오늘도 역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일찍 일어났기에 다행히 식에는 늦지 않은 듯했다. 대강당 안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반이 적힌 피켓 앞에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있었다. 오오히라가 자신의 반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우시지마는 이미 발견한 건지 오오히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응?”

  “저쪽이다.”

  우시지마는 그렇게 말하며 강당의 구석을 손으로 가리켰고, 오오히라는 우시지마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역시 키가 크니까 잘 찾는구나?”

  오오히라는 웃으며 말하곤 우시지마가 가리킨 곳을 향해 발을 옮겼고 우시지마 역시 오오히라의 뒤를 따라갔다. 줄은 이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이 가득 늘어서있었다. 오오히라는 발뒤꿈치를 들어 앞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오오히라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제 바로 앞에 선 사람이 우시지마와 비슷할 정도로 큰 키였을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위로 한껏 세우고 있어 앞을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앞을 보는 걸 포기한 오오히라가 들고 있던 까치발을 내렸지만 살짝 균형을 잃으며 앞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놀란 오오히라가 급하게 앞사람을 향해 사과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앞사람이 먼저 뒤를 돌아본 탓에 오오히라는 그만 하려던 말을 잊고 말았다.

  “내가 꼴찌로 온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인상적인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아이의 얼굴은 뒷모습만큼이나 인상 깊었다. 큰 눈에 비해 눈동자는 작은 사백안에 삐죽 튀어나온 듯한 입술, 그리고 그 위로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머리카락까지. 오오히라는 다소 압도적인 생김새라고 생각했다. 

  “응, 학교가 복잡해서 조금 헤매는 바람에 늦었어.”

  언제 봤냐는 듯 태연하게 제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아이 덕에 오오히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잘은 몰라도 상당히 활달한 성격이겠거니 싶었다. 웬만한 아이들 모두가 경직되어있는 입학식 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라면 그럴 법도 했다.

  “맞아, 여기 학교 진짜 크더라? 체육계뿐만 아니라 공부 쪽으로도 유명한 명문고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나는 이 동네에는 처음 와본 거라 완전히 헤맸지 뭐야. 참! 나는 텐도 사토리야. 우리 같은 반인 거지? 편한 대로 불러!”

  텐도는 정신없이 오오히라를 향해 말을 내뱉었고 다소 느리고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오오히라는 그런 텐도의 말을 받아들이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다행히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나는 오오히라 레온이야. 보통 레온이라고 많이들 부르긴 하는데 역시 너 좋을 대로,”

  “레온 군은 어디 출신이야?”

  텐도는 순식간에 오오히라의 말을 끊음과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새로운 화제로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오오히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당황한 기색은 내비치지 않고서 텐도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시라토리자와 중학교에서 그대로 올라왔어.”

  “엑, 그런데 길을 헤맸어?”

  “보는 거랑 또 다르더라고……”

  오오히라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텐도는 어깨를 으쓱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오오히라와는 전혀 다른 웃음이었다. 웃을 때는 그다지 아까처럼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아니네. 오오히라는 변화무쌍한 텐도의 분위기를 신기하게 여기며 생각했다.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보는 사람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던 첫 느낌과 다르게 지금은 그저 활달한 소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나는 조금 먼 곳에서 와서 어쩌나 싶었는데 배구부는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필수라길래 냉큼,”

  “너 배구부야?”

  이번에는 조금 전까지의 대화와는 다르게 오오히라가 먼저 텐도의 말을 끊었다. 텐도의 말들 사이에 끼워져 나온 ‘배구부’라는 단어가 오오히라의 귓속에 크게 박혀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오히라는 놀란 얼굴로 텐도를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걸 알고 사과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텐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텐도는 놀랐다는 듯한 얼굴로 오오히라를 바라보며 제법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나는 내 블로킹이 좋고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들 나한테 실력이 아니라 운에 가까운 묘기라고 했거든. 그래서 이런 강호교에서 나를 불러줄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추천이 들어왔지 뭐야? 완전 럭키였지― 그런데 왜? 레온 군도 배구부에 관심 있어?”

  “오오히라는 우수한 선수다. 중학교 때는 나 다음으로 뛰어난 스파이커였던 데다가 팀내에서 리베로 다음으로 가장 완벽한 리시브를 구사하기도 했지.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오오히라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대답한 건 다름이 아니라 뒤에 서있던 우시지마였다. 갑자기 고개를 불쑥 내밀고 대답해온 우시지마 덕에 놀란 오오히라가 어깨를 흠칫거렸고, 놀란 건 비단 오오히라뿐이 아니었는지 텐도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나 너는 아는데. 와카토시 군이잖아? 뭐야, 그 유명한 와카토시 군이 우리 반이었어? 거기에 레온 군도 배구부? 역시 럭키네!”

  텐도는 활짝 웃으며 오오히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오오히라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칭찬 고마워, 와카토시.’ 하고 우시지마에게 대답한 후 텐도를 바라보았다. 

  “반에서 와카토시 말고 다른 배구부원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것도 너도 추천 입학인 거잖아? 그런데 블로킹은 왜? 뭔가 독특한 점이라도 있는 거야?”

  텐도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으나 우시지마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하마터면 그대로 허공으로 날려 보낼 뻔했던 질문을 오오히라는 간신히 물어볼 수 있었다. 오오히라 역시 누구보다 배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텐도가 꺼낸 이야기에 흥미가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상대를 읽고 뛰는 게 아니라 직감으로 뛰거든.”

  그리고 텐도가 들려준 대답은 제법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오오히라는 눈을 크게 뜨고 텐도를 바라보았다. 텐도는 어쩐지 뿌듯하면서도 다소 짓궂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상대가 뭔가 하기 전에 먼저 뛴다는 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종의?”

  “와…… 그거 뭔가 멋지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매번 막을 수 있는 게 가능한 거야?”

  오오히라는 순수한 궁금증에서 우러나온 질문을 던졌다. 텐도는 오오히라의 말에 잠시 말을 멈추고는 그냥 웃어 보이기만 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긴 하지만 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텐도의 분위기에 오오히라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행동을 되짚어야만 했다. 

  “보통은 불가능 하겠지.”

  텐도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오히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텐도의 얼굴엔 자신감이 잔뜩 어려있었다. 오오히라는 그런 느낌을 지닌 얼굴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옳으며 내가 강하고 내가 이길 거라 자부하는 얼굴. 코트 위에 선 우시지마에게서 느낄 수 있던 것들이었다.

  “난 할 수 있거든.”

  뒤이어진 말 역시도 그러한 종류의 기운을 가득 품은 말이었다. 멍하니 텐도를 바라보던 오오히라가 무어라 또 한 번 대화를 이으려던 찰나, 정장을 갖춰 입은 교사가 텐도와 오오히라 쪽으로 다가 왔다. 

  “이제 식이 시작될 테니 조용히 하는 편이 좋겠구나.”

  교사의 말에 오오히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고 텐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교사가 텐도와 오오히라의 곁을 떠나자마자 텐도는 기다렸다는 듯 오오히라의 쪽으로 몸을 가까이 하고 잔뜩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첫 부활동 시간에 보여줄게.”

  그것 역시 아주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추천을 받아 입학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여도 결국 이곳에선 일학년일 뿐인 아이가 고작 부활동 첫 날에 뭘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텐도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오오히라에게 말을 하고서 그대로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오오히라는 조금 얼이 빠진 얼굴로 그런 텐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텐도는 키득키득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단상 위에는 이제 교장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나이 지긋한 교사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텐도는 웬만하면 제 블로킹에 대해 ‘감’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상대가 그걸 알아챌만한 시기가 오지 않는 한은 그랬다. 하지만 어쩐지 이 아이에게라면 말해도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조금은 자만심이 물든 느낌이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오오히라와 우시지마는 같은 중학교를 다녔으니 꽤 친밀한 관계일 터고, 특히 우시지마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에이스를 거머쥐고 중학 배구를 흔들었던 선수이니만큼 오오히라의 자부심이 꽤 클 것이라 텐도는 생각했다. 그런 오오히라의 앞에서 우시지마의 스파이크를 막는다. 상대의 행동을 분석하고 철저하게 파악하여 막는 게 아니라 첫 날, 처음 만난 그 날에 오로지 감만으로 그 우시지마의 스파이크를 막는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텐도는 잘게 몸을 떨며 쿡쿡 웃었다. 오오히라라면 그런 자신을 멋지다고 생각해 줄 것 같았다. 좋은 블로커라고, 강한 블로커라고 생각해 줄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어떤 이유도 근거도 없는 막연한 확신이었다. 하지만 오오히라에게는 그런 확신을 주는 힘이 있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어서 빨리 오오히라의 앞에서 우시지마를 막고 싶다는 생각만이 텐도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래서 텐도는 블로커라는 포지션이 좋았다. 상대를 철저하게 막아내는 것, 그건 어쩌면 완벽한 스파이크보다도 더 상대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이었다. 텐도는 자신을 바라볼 오오히라의 얼굴을 상상했다. 아마도 조금 전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는 ‘멋진 블로킹’이라며 웃는 얼굴로 제게 엄지를 치켜 올려줄 것이다. 텐도는 고개를 숙이고 또 한 번 어깨를 떨며 웃었다. 이건, 확신이라기보다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