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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완전한 이별

팥_ 2017. 12. 22. 23:30

카게야마 토비오 생일 기념 카게른 합작 '우리토비오'에 글 파트로 참여했습니다.

토비오 생일 축하해! 

http://deartobio.com/





  뚝. 이마에 닿는 차가운 물방울에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손을 뻗어 이마 앞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부탁받은 물건들을 사러 잠깐 숙소 근처로 나왔을 뿐인데 그새 비가 쏟아질 줄은 몰랐다. 하필이면 늘 내리는 안개비도 아닌 장대비였다. 더 이상 느긋하게 걸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카게야마는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메고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달린 탓에 제대로 앞을 보지 못했던 게 실수였다. 우산을 쓰고 걸어오던 상대와 정통으로 부딪쳐 카게야마는 잠시 비틀거리다 급하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 여기 영국이지. 본능적으로 모국어를 뱉고 나서야 뒤늦은 생각이 스쳤다. 늦게나마 영어로 된 문장을 꺼내려는 찰나,

  “…….”

  “…….”

  우산을 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남자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흔하디흔한 검은 우산을 들어 올리고서. 익숙한 벽돌색 눈동자에 카게야마는 그만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더 아득하기만 했다. 귀를 찢을 듯이 쏟아지는 빗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오이카와 씨.”

  카게야마는 곱씹던 이름을 간신히 입 밖으로 뱉어냈다. 계속해서 멍하니 카게야마를 바라만 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그제야 급하게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웠다. 빗소리가 줄어드는 대신 먹먹한 적막이 틈을 메웠다. 카게야마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완전한 이별


  이탈리아의 여름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태양이 전신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배구가 실내 스포츠라 정말 다행이라고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느끼게 하는 계절이었다. 그 날도 카게야마는 평소처럼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필이면 차에 가벼운 결함이 생겨 수리를 맡겨놓은 터라 집까지 가는 방법은 걸어가거나, 택시를 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택한 건 ‘걷기’였다. 운동도 하고 생활비도 아낄 겸 겸사겸사 좋네. 그렇게 생각했었다.

  구단에서부터 집까지는 걸어서 삼사십 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걷기 시작한 지 오 분,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걷기 시작한 지 십 분, 카게야마는 후회했다. 기껏 갈아입은 옷이 순식간에 땀으로 흠뻑 젖었다. 카게야마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운동도, 땀내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 정도의 뙤약볕에는 면역이 없었다. 햇볕이 닿는 피부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저, 혹시……”

  그 때였다. 들릴 리가 없는 모국어가 갑작스레 들려온 탓에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무리 휴가철이라지만 여긴 관광지도 아니라 외국인은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동양인은 더더 드물었으며, 그런데다가 같은 일본인이라니 없던 애국심도 절로 생겨날 지경이었다. 

  “일본인 맞으시죠?”

  “네, 맞는데요.”

  카게야마가 능숙하게 일본어로 대답하자 남자의 표정이 즉각적으로 환해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남자는 혼잣말을 하더니 웃으며 카게야마에게 제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목적지가 표시된 지도 어플이었다. 

  “제가 이탈리아는 처음인데 구글 지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까부터 지도도 저도 계속 헤매기만 해서…… 혹시 아시는 길이면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액정으로 손을 뻗어 목적지를 눌러보았다. 익숙한 주소였다.

  “옆집이네요.”

  “옆집이요?”

  “네. 제가 사는 집 옆집.”

  카게야마의 말에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로 쭈뼛거렸다. 그냥 보기에도 꽤 큰 키로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안긴 자세가 되고나니 생각 이상으로 남자의 체격은 단단했다. 배구선수인 자신만큼이나 좋은 몸이라면 운동선수거나 모델일 게 분명할 거라고 카게야마는 홀로 생각했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던 만큼 갑작스럽게 품에서 떨어졌다. 이렇게 더운 날씨인데도 남자에게선 땀 냄새는커녕 시원한 향수 향기만 났다. 바람에 흩어지는 향수 냄새를 맡으며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제 팔에 코를 가져다대고 킁킁거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지만 십 분 걷는 사이에 흠뻑 젖어 땀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물론 자신은 맡을 수 없었기에 금방 그만두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예요. 남자는 대뜸 자기소개를 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예요.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 역시 대강 제 이름을 말했다. 카게야마의 이름을 들은 오이카와는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겠죠, 국가대표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이래저래 귀찮아질 것 같아 카게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저를 모델이라고 소개했다. 그럴 것 같더라니. 카게야마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잖아요. 오이카와는 싱긋 웃으며 말을 늘어놓았다. 사정상 외곽에다 구한 집이긴 하지만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에 카게야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여기예요.”

  의식적으로 빨리 걸은 탓일까, 생각보다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제 옆집을 가리켰다.

  “와, 감사해요. 덕분에 하나도 안 헤맸네.”

  오이카와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웃으며 카게야마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감사의 의미로 제가 점심 살게요. 근데 이 근처에 맛있는 데 있나?”

  “아뇨, 괜찮,”

  “에이. 이탈리아에서 만난 이웃이 일본인인 것만으로도 밥 살 일인데. 도와주시기까지 하셨잖아요. 당연히 제가 사야죠.”

  카게야마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어차피 점심을 먹을 때이기도 했고, 혼자 먹는 밥에도 이골이 나있었다. 가끔 훈련이 끝난 후에 동료들과 함께 먹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가끔이었으니까. 카게야마는 곰곰이 생각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카레 좋아하세요?”



  오이카와의 집은 근처라고 했다. 영 껄끄러웠지만 제 숙소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비가 그칠 때까지 오이카와의 집에 머무는 게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카게야마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이카와의 집까지 가는 내내 견디기 힘든 침묵만이 감돌았다. 보통 크기의 우산을 성인 남자 둘이서, 그것도 현직 모델과 배구선수 둘이서 함께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부러 우산 바깥쪽으로 몸을 내밀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이카와는 제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왔다. 카게야마는 들릴 듯 말 듯하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오이카와 쪽으로 몸을 붙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이카와는 수건과 걸레를 내어주었다. 카게야마는 익숙하게 걸레에 신발을 문질러 닦고 수건으로 머리의 빗물을 털어냈다. 집을 구경하기도, 가만히 서있기도 멋쩍어 배낭을 내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은 카게야마가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악명 높은 런던의 집값 때문인지 그리 큰 집은 아니었지만 아주 작은 집도 아니었다. 집 곳곳에는 오이카와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그가 찍었던 화보들이 커다랗게 걸려있기도 했고, 구석구석마다 그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세워져있었다. 

  “나 영국에 있는 줄 몰랐어?” 

  오이카와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제 앞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색이 옅은 밀크티였다. 밀크티에서 시선을 옮겨 바라본 오이카와는 똑바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괜히 한 번 침을 삼켰다.

  “몰랐어요.”

  작은 소리로 대답한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뜨거웠다. 그래도 옛날보다 더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아니, 아마 오이카와는 꽤 유명할 것이다. 그저 카게야마가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본래부터 연예계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오이카와와 교제하면서는 가끔 포털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기도 했지만, 괜히 부끄러워져 금세 인터넷 창을 끄기 일쑤였다. 그리고 오이카와와 헤어진 후에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교제하기 전에는 관심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았다면 헤어진 후로는 TV를 보다 패션쇼 이야기만 나와도 곧장 채널을 돌렸다. 포털사이트 메인에 연예면 기사가 뜨면 노트북을 덮었고, 거리를 걷다 그가 모델을 맡았던 브랜드의 가방을 멘 사람이 보이면 방향을 틀었다.

  “근데 영국엔 무슨 일이야? 아직 이탈리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행이요.”

  카게야마는 여전히 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비를 잔뜩 맞은 터라 온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왠지 오이카와가 내온 밀크티를 입에 댈 용기는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저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마시지도 않을 밀크티를 호호 불기만 했다.

  “비시즌 기간인데다가 휴가까지 받아서요. 유럽 살면서 다른 나라 안 가보는 것도 왠지 손해 보는 것 같고.”

  “그래? 원하면 가이드 해줄까?”

  웃음기 섞인 말에 카게야마는 찻잔에 대고 호호 불던 것을 멈췄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가 있나 싶었다. 혼자 헤어진 것도 아니다. 함께 사랑했기에 함께 헤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일 년이 지났는데도 PTSD를 앓는 사람처럼 구는 저와는 다르게 오이카와는 너무나도 태연스러웠다. 최대한 빨리 이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는 계속 웃고만 있었다. 혹시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저게 연기라면 드라마 쪽으로 나가도 될 거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막…… 관광지 보러 온 건 아니에요.”

  “그럼?”

  “그냥…… 그냥요.”

  카게야마는 말을 흐렸다. 정말로 딱히 어딜 가야지, 하고 온 건 아니었다. 사실 카게야마의 여행은 꽤 충동적인 거였다. 휴가를 받아 일본에서 푹 쉬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때가 되니 문득 다른 나라가 궁금해졌다. 그 중에서도 언제나 해가 쨍쨍한 이탈리아와는 정반대인 영국이. 정말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카게야마는 즉시 본래 일정보다 일주일정도 빠르게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아주 잠깐 나온 거라 우산을 안 갖고 왔어요. 이탈리아에서 살던 버릇 때문인가.”

  “안 됐네. 여긴 거기랑은 다르게 언제나 비가 내리는 곳이라 항상 우산이 필요하거든. 영국엔 얼마나 있을 건데?”

  “일주일 정도요. 내일 출국해요.”

  “흐음, 그렇구나. 엿새 동안 뭐 했어?”

  어째서 자꾸 말을 거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나중에야 ‘이 사람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딱히 오이카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처음 만났던 그 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집까지 걸어가는 내내 제가 반응을 하든 안 하든 계속해서 말을 걸던 그가, 첫 만남에 밥을 사겠다던 그가, 이탈리아에선 보기 드문 일본식 카레 식당에 데려갔을 때도 웃으며 ‘오자마자 일식이네요?’ 하면서 흔쾌히 밥을 사던 그가. 

  “그냥 뭐…… 조깅했어요. 비가 와서 배구는 못하고.”

  사실은 조깅 말고도 이것저것 하기는 했다. 런던아이에 타본다든가, 템즈 강 유람선을 타본다든가 하는 기본적인 것들. 런던아이에 타서 런던을 내려다 볼 때만 해도 이곳에서 그와 재회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었는데. 카게야마는 씁쓸하게 웃으며 결국 밀크티를 입에 대지 않고 내려놓았다.

  “비 맞으면서 조깅은 하고 배구는 못 했어?”

  “그야 공이 젖잖아요.”

  카게야마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크게 웃으며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이며 제가 했던 말을 되짚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웃을만한 포인트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오이카와는 늘 이유 없이 ―카게야마의 입장에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꼭 저를 바보취급 하는 기분이라 있는 힘껏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고 있으면 곧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귀여워서 그랬다는 말을 덧붙였었다. 

  “미안, 미안, 참 그대로다 싶어서.”

  한참동안 웃음을 토해내던 오이카와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는 카게야마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몸이 경직되는 기분을 느꼈다. 

  “하여튼 배구 바보인 건 여전하네.”

  가볍게 카게야마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오이카와는 손을 내렸다. 카게야마는 뻣뻣해진 몸을 풀 생각도 못하고 간신히 눈만 깜빡였다. 

  “그러지 말고 내일 할 일 없으면 연락해. 마침 나도 오프거든.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어도 여기저기 보여줄 테니까.”

  뒤이어 들려온 오이카와의 말이 방아쇠라도 된 것처럼,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오이카와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일 년 전 모습 그대로, 혹은 더 능글맞아진 채로. 

  “오이카와 씨는,”

  카게야마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한 문장이 뭐라고.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져갔다. 버석하게 굳은 오이카와의 눈을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역시 그랬구나. 역시, 당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구나. 오이카와의 눈이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어떻게, 어떻게.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매일 매일이 꿈같은 하루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오이카와의 고백을 받게 되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승낙한 후로부터는 행복한 날들만 계속이었다. 카게야마의 팀도 리그 상위권을 달렸고, 오이카와 역시 각종 패션쇼에 초대돼 런웨이를 섰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생활이었다. 함께 젤라또를 먹으며 광장을 걷고, 날이 선선한 날엔 자전거를 빌려 타고, 벤치에 앉아 패션지를 읽는 오이카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들고, 빈 공원에서 가볍게 줄넘기를 하는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그런 날들이었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오이카와가 차를 몰고 구단 앞으로 카게야마를 데리러 왔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늘 챙겨 보러 왔다. 카게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션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최대한 오이카와의 패션쇼를 보러 갔고,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와도 똑바로 눈을 뜨고 런웨이를 걷는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던 사람이 한없이 진중해지는 순간이었다. 누가 뭐래도 제 일에 대해서만큼은 프로의식이 철저한 사람이었으니까.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그런 점을 사랑했다. 

  문제는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됐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집에서 홀로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던 카게야마의 집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 오이카와였다. 

  “무슨 일이에요?”

  “이거 봤어?”

  오이카와는 불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더니 카게야마의 앞에 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뭔데요?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이카와가 내민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그곳엔 처음 보는 사진과, 모국어로 쓰인 기사가 있었다. 


  모델 오이카와 토오루와 배구 국가대표 카게야마 토비오, 의외의 친분? 

  (사진) 

  유명 모델 오이카와 토오루와 남자 배구 국가대표 선수인 카게야마 토비오가 타지에서 의외의 친분을 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이웃으로 만나……


  “이게 왜요?”

  “다들 난리야. 자기가 이탈리아 사는 패션업계 종사자인데 어쩐지 오이카와 패션쇼마다 오는 거 봤다는 거부터, 둘이 진짜 사이 좋아 보인다, 영혼의 절친 아니냐, 등등등.”

  오이카와는 숨을 몰아쉬며 드물게 세팅이 안 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아웃팅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중학생 때, 오이카와는 이미 그 때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동갑내기 동양인과 첫 연애를 시작했고, 사귄 지 겨우 2주 만에 키스하는 사진이 교실에 나돌았다. 덤덤히 뱉어낸 말이었지만 그 일이 그에게는 오래도록 트라우마로 남은 듯해 카게야마는 말없이 오이카와의 등을 안고 토닥여주었었다.

  “우선 진정해요. 응?”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스마트폰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안았다. 생각보다 순순히 카게야마의 품에 안긴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별 일 없잖아요. 여긴 일본도 아니고……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괜찮아요, 오이카와 씨.”

  “……모르겠어. 당분간 집에서만 만날까? 그게 안전하겠지?”

  “그게 더 이상할 걸요. 그냥 하던 대로 해요. 똑같이 경기 보러 가고, 패션쇼 보러 가고. 똑같이.”

  그냥 똑같이. 단호한 말투에 오이카와는 슬쩍 카게야마의 품에서 떨어져 그의 눈을 응시했다. 어쩌면 흔들리고 있을 눈일지도 모르지만, 카게야마는 최대한 그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절대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곧고 바른 시선으로 그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한숨을 내쉬며 팔을 벌려 힘껏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금세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던 화제는 생각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런웨이 위의 오이카와를 담기 위해 온 기자들이 카게야마부터 찾기 시작했고, 코트 위의 카게야마를 담기 위해 온 기자들이 관객석의 오이카와를 찾았다. 툭하면 포털사이트 메인에 둘의 기사가 올랐고, 별 관계없는 각자의 일임에도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미 없이 제목에 이름을 집어넣는 일이 허다했다. 카게야마 토비오의 절친으로 알려진 모델 오이카와 토오루는 누구? 요즘 대세 오이카와 토오루와 친하다는 男배구선수 카게야마 토비오 집중탐구★ 같은 식이었다. 

  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던 네티즌들까지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이탈리아에서 자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정도니 인터넷의 힘이 무섭긴 했다. 그 와중에 와전된 소문은 둘이 동거하고 있다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평소의 오이카와였다면 분명히 능글맞게 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인터뷰라도 하자거나, 포옹하는 사진이라도 찍히자거나, 그런 식으로 유하게 대처했을 테다. 거기에 카게야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를 흘겼을 거고. 그렇게 가벼이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하기만 했다. 결국 그가 카게야마의 배구 경기를 보러 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카게야마는 꿋꿋하게 오이카와의 패션쇼를 보러 갔다.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봐주었다. 

  오이카와는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눈에도 명백하게 보일 정도로 그는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다. 카게야마는 이미 인터넷에서 ‘세기의 커플’이라 농담하는 것도 보았지만 굳이 오이카와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흔들리고 있는 오이카와를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오이카와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트라우마는 별개였다. 끝내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당분간 집에서만 만나자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서도 패션쇼에 찾아갈 자신은 없어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감추고서 카게야마의 집을 찾아가는 오이카와의 파파라치 사진이 뜨고 말았을 때, 오이카와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토비오.”

  오이카와가 지친 얼굴로 이름을 불러오는 순간 카게야마는 직감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년간의 연애도 끝이 났다고. 

  오이카와는 꽤 빙빙 돌려 말했다. 아마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거죠? 조용히 말을 듣던 카게야마가 직접적으로 물었을 때, 그제야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계속 응원할게.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오이카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카게야마는 울고 싶어졌다. 그것이 이별이었다.



  괜찮으면 내일 비행기 타기 전에 만나자. 

  결국 오이카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카게야마에게 우산을 쥐어주었다. 이거 받으면 또 만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느라 우산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혀로 입술만 축이고 있을 때 오이카와가 먼저 말했다. 그 말에 올려다본 오이카와의 얼굴은 다시 처음처럼 멀끔해져있었다.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말해왔다. 카게야마는 잠시 고민하다 오이카와가 쥐어준 우산을 잡고 간신히 답했다. 

  비행기 시간 빨라서 오래는 못 만나요.

  괜찮아,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정도면 돼.

  밖으로 나왔을 땐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약해진 빗줄기를 보며 느리게 우산을 펼쳤다. 오이카와와 함께 썼을 때는 그렇게 좁던 우산이 크게만 느껴졌다. 사실은 별로 큰 우산도 아닌데.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우산의 안 쪽을 쳐다보았다. 하늘이 보일 리가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우산 살만 카게야마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오이카와가 강제로 빌려준 우산을 손에 들었다. 큰 짐들은 이미 진작 이탈리아로 부쳐놓은 터라 비행기를 타는 사람의 짐이라기엔 간소한 것들뿐이었다. 손에 든 우산이 머쓱하게도 영국에 도착한 이후로 가장 맑은 날씨였다. 

  기억을 더듬어 오이카와의 집 앞까지 걸어가자 이미 오이카와가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타.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그 말에 매번 구단 앞까지 저를 데리러 오던 오이카와의 기억이 떠올라 카게야마는 멈칫거리다 겨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차 안에선 익숙한 향기가 났다. 오이카와가 늘 쓰던 향수였다. 시원하고 상쾌한 향. 

  “아직도 같은 향수 써요?” 

  무심코 뱉은 물음에 오이카와가 운전을 하다 말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응. 다른 것도 써봤는데 역시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서.”

  또 다시 침묵. 카게야마는 우산을 쥔 손을 괜히 꼼지락거렸다. 우산 뒷자리 바닥에다 놔. 그걸 또 언제 본 건지 오이카와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꺼냈다. 카게야마는 끄덕이지도 않고 뒤로 손을 뻗어 우산을 내려놓았다. 

  “토비오.”

  우산을 내려놓는 중에 들린 익숙하고도 낯선 단어에 카게야마는 잠시 멈칫했다. 일 년 만이었다. 좋아하는, 좋아했던 목소리로 듣는 자신의 이름.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카게야마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요즘은 어때?”

  “……뭐가요?”

  “좋아하는 사람.”

  뒤이어 나온 말들은 전부 완전히 예상 밖의 말이라 카게야마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쳐다봤지만 오이카와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정면만을 바라보고 운전할 뿐이었다. 

  “무슨 뜻이에요, 그거.”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고 오이카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겨우 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오이카와는 꼭 어제 같았다. 정확히는 어제 카게야마가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물어보기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말 그대론데? 좋아하는 사람 없냐고.”

  “그걸……”

  왜 당신이 물어보는데요? 카게야마는 차마 남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카게야마는 남은 말을 마저 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꾹 쥐는 길을 택했다.

  “난 아직도 좋아해.”

  “…….”

  “너.”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차 안이 진공상태로 변한 느낌이었다. 귀가 먹먹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의 엔진 소리도, 도로의 소음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과 차단된 기분. 카게야마는 꽉 틀어 막혀 웅웅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빠르게 눈만 깜빡였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좋아하고 있었어.”

  “…….”

  “그 때도, 그 이후로도 쭉. 계속, 계속 생각했어. 틈만 나면 배구 기사 찾아보고, 네 사진도 찾아보고. 이상하지. 처음엔 네 이름 듣고도 국가대표 선수인 줄도 몰랐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배구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이카와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했다. 세게 주먹을 쥔 카게야마의 손이 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어쩌라는 거야, 정말. 나보고 어쩌라고.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속으로 되뇌었다. 어쩌라는 건데,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그거 알아, 토비오?”

  몰라요.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요. 카게야마는 속으로만 대답하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애초에 나 같은 겁쟁이는 누굴 사랑하면 안 됐어.”

  그 말에 카게야마는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오이카와를 향해 돌렸다.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서서히 스며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고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자신이 애써 오이카와를 피하고, 피할 동안 오이카와는 반대로 자신을 찾고 있었다. 다시 만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 위해 찾고 있었다. 그게 TV가 됐건, 인터넷이 됐건, 신문이 됐건, 오이카와는 상관없었던 거다. 그저 옛 연인의,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

  “미안했어.”

  “…….”

  “다시 만난다면 꼭 제대로 사과가 하고 싶었어.”

  미안해. 미안해 토비오. 오이카와는 이제 똑바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날까봐 무서웠다. 제가 봐온 중 가장 덤덤해 보이는 오이카와 앞에서 울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데요, 당신은.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꾹꾹 참아야만 했다. 억지로 누르고, 또 눌러서 삼켜낸 후에야 카게야마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도착한 거죠?”

  “응.”

  “그럼 갈게요.”

  오이카와의 말에는 제대로 답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여는 카게야마에게 그는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잘 가.”

  “…….”

  “계속 응원할게.”

  마지막 말은 카게야마가 문을 열고 나와 다시 닫음과 동시에 들려왔다. 계속 응원할게. 카게야마는 나지막하게 들린 목소리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래도 계속 응원할게.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어디선가 들었던 게 분명한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몇 발자국도 채 가지 못하고 헐레벌떡 돌아와 출발하려던 차를 붙잡고서 급하게 창문을 쾅쾅 두드렸다. 참 그 다운 인사법이라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변한 건, 그의 마지막 인사를 믿지 못했던 자신뿐이었다. 오이카와 씨! 애타게 소리를 지르며 두드리자 창문은 금세 내려갔다. 카게야마는 제 얼굴이 어땠는지 모른다. 아마 최악이었을 거라 짐작만 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잔뜩 벌개져서는 입만 뻐끔댔겠지. 카게야마가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몇 번이나 벙긋대는 동안 오이카와는 계속 기다려주었다. 계속, 계속.

  “저도……”

  “…….”

  “저도 계속…… 계속 좋아했어요.”

  “……응.”

  “그러니까……”

  카게야마는 결국 주먹을 쥔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눈가가 뜨거웠다.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하려니 아무것도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카게야마는 연신 눈을 깜빡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계속 응원할게요.”

  그 말을 뱉어내고 나서야 답답했던 속이 내려가는 듯했다. 차 안에서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보며 느리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마주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당당해졌다.

  “잘 가요.”

  “너도.”

  한참동안 창문 너머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오이카와가 먼저 창문을 올리고 떠날 때까지도 카게야마는 시선을 놓지 않았다. 좁은 도로에서 오이카와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카게야마는 끝까지 차의 자취를 쫓았다. 차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야 천천히 카게야마는 뒤를 돌았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어제와 같은 유별난 장대비는 아니었다. 평범한, 아주 평범한 런던의 안개비였다. 카게야마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완전한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