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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Q/공큐] Brave New World

팥_ 2015. 12. 24. 21:02



00Q 크리스마스 합작 <글> 부문으로 제출한 글입니다.

http://rocn12.wix.com/00q-christmas





  “무슨 짐을 그렇게 들고 가?”

  제 몸보다 더 큰 상자 하나에, 그 위로도 겹겹이 상자를 쌓아 올려 앞이 보이긴 하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짐들을 들고 가는 Q의 팔을 본드가 붙잡으며 물었다. 역시나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던 건지, Q는 본드가 팔을 붙잡자 크게 놀라며 몸을 휘청거렸다. 덕분에 앞으로 쏟아지는 작은 상자들을 본드가 급하게 팔을 벌려 받아내려고 했지만 세 개의 상자를 모두 받아내기는 현직 더블 오 요원의 반사신경으로도 무리였다. 두 개의 상자는 아슬아슬하게 본드의 품으로, 나머지 하나의 상자는 윤기가 흐르는 본드의 구두 위로 안착했지만 결국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왜 그렇게 세게 붙잡아요?”

  바닥에 엎어져 내용물을 전부 쏟아내고 만 상자를 바라보며 Q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드는 익숙하다는 듯 Q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흘려들으며 상자에서 흘러나온 내용물들 중 하나를 주워들었다. Q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는 쏟아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한숨과 앞에 본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게 다 뭐야?”

  “뭐긴요, 보면 몰라요?”

  “오늘따라 삐딱하시네.”

  “누구누구 씨가 멀쩡히 잘 가던 사람 길목 막고 방해해서요.”

  아무튼 한 마디도 안 져요. 본드는 한 쪽 눈썹을 들썩이며 조금 전에 주운 반짝이는 물건으로 시선을 돌렸다. 채도가 낮은 붉은색을 바탕으로 하여 각도가 변할 때마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구형의 물체였다. 봐도 모르겠는데. 본드는 몇 번 더 목적을 알 수 없는 물건을 이리저리로 돌려보다가 다시 Q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Q의 손에는 작은 금색 종과 방울들, 리본이 묶인 지팡이 몇 개가 들려있었다. 아. 본드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탄성을 뱉어냈다.

  “설마 크리스마스 트리라도 꾸미는 건가?”

  “당연하죠.”

  Q는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전부 상자 안으로 주워 담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코끝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에?”

  “랩에 두려고요.”

  본드는 Q가 옆에 내려둔 거대한 상자를 자연스럽게 들어 올렸고, 그런 본드를 빤히 바라보던 Q는 역시 자연스럽게 큰 상자 위에 올려진 작은 상자들을 들었다. 

  “테러리스트들이란 사람 많은 연휴에 일을 터뜨리기 좋아하는 족속들이니 보나마나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여기 박혀있을 게 뻔한데, 이렇게라도 기분 내야죠.”

  “그래도 트리는 좀 어린애 같지 않나?”

  Q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날이 선 눈으로 본드를 쳐다보았다. 아마 ‘어린애’라는 단어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일 터였다. 본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그런 단어를 택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데도 ―사실 거의 매일에 가까웠다.― Q는 본드의 그런 말들에 지금과 같이 하나하나 전부 반응했고, 본드는 Q의 짜증스러운 반응들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MI6 건물 1층 로비에 전시된 트리는 몇 살짜리 꼬마가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한 서른여섯 쯤?”

  “글쎄, 스물아홉의 쿼터마스터가 트리 만들 생각에 들떠있다는 건 알겠는데.”

  “시끄러워요.”

  Q가 목에 걸린 사원증을 꺼내기 위해 들고 있던 상자를 힘겹게 다른 손으로 옮기려드는 찰나 본드가 빠르게 몸을 움직여 Q 대신 제가 먼저 Q의 사원증을 빼내 들었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가장 먼저 본드의 눈에 들어온 건 랩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나무 한 그루였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칙칙한 랩에 홀로 푸릇푸릇한, 그것도 제법 높이가 되는 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있는 광경이라니 놀랍다 못해 우스울 정도였다. 

  “……정말 매년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당연하죠. 크리스마스라구요, 본드.”

  “크리스마스엔 좋은 술과 좋은 호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애인은 이미 있으니 됐고.”

  “그 애인이란 게 절 말씀하시는 거라면 안타깝게도 좋은 술도 좋은 호텔도 안 되겠네요. 좋은 호텔을 대신해서 좋은 랩 정도의 조건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로 좀 도와줄래요?”

  아직 장식도 무엇도 없이 휑하니 비어 있는 나무 앞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은 Q가 본드를 돌아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괜히 몸을 흠칫거린 본드는 뒤늦게 Q를 따라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런 웃음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 본드가 기억하는 Q의 웃음은 아예 웃지 않거나, 혹은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키느라 괴기하게 일그러진 미소거나 둘 중 하나였었다. 적어도 조금 전처럼 무언가 흑심이 담긴 웃음은 절대로 아니었다. 나쁠 건 없지만, 역시 나 때문인가? 본드는 제법 심란한 마음으로 고민을 품고서 입을 열었다.

  “네 요원들은 어디다 두고?”

  아무래도 주말이었던 탓에 평소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본드는 랩 구석에 앉아 제 상사가 고작 트리 때문에 더블 오 요원과 옥신각신 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Q 브랜치의 한 요원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Q의 시선이 그런 본드의 고개를 따라가나 싶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얼굴엔 다시 한 번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제임스, 아무래도 당신 때문에 Q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요. 본드는 언젠가 머니페니가 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농담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글쎄요, 제임스,” 

  Q는 동시에 본드의 넥타이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본드의 귓가에 뜨거운 열기가 끼쳤다.

  “내가 랩에서 단둘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사람이 저 사람은 아니지 않겠어요?”

  좋은 호텔이 필요하다면서요. Q는 그렇게 속삭이며 느리게 본드의 넥타이를 놓아주었다. 여전히 Q의 얼굴엔 수상쩍은 미소가 가득했고, 본드는 근래에 지은 표정 중 가장 멍청해 보이는 표정으로 Q를 바라보았다. ……역시 나 때문이로군. 본드는 덕분에 흐트러진 넥타이를 자꾸만 헛나가는 손으로 매만지며 생각했다.


  트리 꾸미기에 정신이 팔린 Q를 놓아두고 본드는 슬쩍 뒤로 물러나 책상에 살짝 몸을 기대었다. Q는 언제 본드를 도발했냐는 듯 꼭 처음으로 트리를 만드는 어린 아이처럼 심각한 얼굴로 커다란 지팡이 장식을 들고서 어느 쪽에 걸면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본드는 이런 분야에는 영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어릴 적에도 역시 트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 가장 본드의 흥미를 끄는 것이라면 역시 ‘트리 꾸미기’보다는 ‘트리를 꾸미고 있는 Q’였다. 본드는 팔짱을 끼고서 천천히 Q의 뒷모습을 훑었다.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이고 아직도 장식을 걸 곳을 찾아 고민 중인 Q의 뒷모습은 어쩐지 자세만 보아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표정이 훤히 보이는 듯해 본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마 조금만 더 있으면 결국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며 어디에 걸면 좋겠냐며 물을 것이다. Q는 이상한 방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었다. 분명 일을 할 때는 한 요원의 목숨이 걸린 일도 척척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더니, 꼭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결정짓는 걸 힘들어 하는 타입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이 그랬고, 또 고양이 장난감을 고를 때가 그랬다. 본드의 눈에는 색만 다르지 똑같이 생긴 공을 두고 Q는 거의 한 시간을 고민했던 전적이 있었다. 뭐가 다른 거냐고 물으면 Q는 재질부터 시작해서 촉감, 탄력성까지 줄줄 장난감의 속성을 읊어댔지만 아무리 들어도 본드에게는 똑같이 생간 장난감 공 두 개일 뿐이었다. 

  결국은 그런 점들이 좋았다. 어찌 보면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제 일에는 그렇게도 깐깐하고 거침없는 어린 천재 쿼터마스터께서 사사로운 일에는 사실 헐렁하고 또 귀찮아한다는 점들이 본드에게는 제법 귀엽게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본드는 한껏 헝클어진 Q의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뒷목덜미에 시선을 주었다. 일에 몰두할 때의 Q를 보면 꼭 결벽증 환자에, 어떻게든 포마드로 잔머리 하나 없이 머리를 고정 시키고, 수트를 입을 때도 몸에 딱 맞는 쓰리피스 수트를 갖춰 입는 사람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Q는 편안한 걸 좋아했고 귀찮은 걸 싫어했다. 어떻게 말려도 결국은 곱슬머리로 돌아오고 마는 머리카락은 손대기를 포기한 듯 언제나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최대한 편안한 차림으로 차려 입은 수트 위에는 구겨진 야상이 함께했다. Q의 집은 발 디딜 구석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고, ―자신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에 찾을 수 있으니 됐다고 주장했다.―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드물어 설거지거리는 거의 없었지만 대신 싱크대에는 머그컵들이 가득했다. 한 마디로 결벽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가 있나 싶어 처음에는 그저 신선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신선한 느낌은 곧 호기심을 자아냈고, 어느새 호감으로 변해있었다. 본드는 자신이 Q에게 호감을 갖고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했던 날 벽에 머리를 박고 좌절했다. 제 인생을 통틀어 보았을 때, 자신이 조금이라도 애정이라는 감정을 느꼈던 무수한 사람들 중 단연 가장 최악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도 한 번쯤 돌아볼 만한 미모를 가지지도 않았고, 성별을 떠나서 몸매가 좋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한없이 착한 타입도 아니고, 애교가 많아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Q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받는 타입인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확실한 건, 본드가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 중 가장 ‘별로’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와 동시에 가장 저를 가슴 뛰게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점이었다.

  “본드, 이것 좀 봐줘요.”

  결국 Q는 예상대로 본드에게 몸을 돌리고 지팡이 장식을 들어 올려 보여주었다. 본드를 돌아보는 Q의 얼굴엔 한껏 고뇌한 흔적이 역력히 담겨있어 본드는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한 걸 꾹 참아내고는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Q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팡이는 이게 마지막인데 어디에 다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급류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제가 주는 애정에 휩쓸려버린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 일 년 동안 몇 번을 죽었다 살아났는지도, Q와 몇 번을 싸웠는지도, 그리고 몇 번을 사랑한다 속삭였는지도 몰랐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짧은 축에 속했다. 본드는 적당히 긴 삶을 살아오며 이미 많은 일 년들을 보내고 또 보냈다. 1월부터 12월까지, 질리도록 그렇게 일 년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번 일 년은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똑같은 12월도 똑같은 12월이 아니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본드에게는 가장 낯설고도 신선한 감각이었다. 

  “이쪽에 달자니 저쪽이 비어보이고, 또 저쪽에 달자니 이쪽이 비어보여서 어디에 다는 게 좋을 지,”

  본드는 Q가 들고 있던 지팡이 장식을 천천히 뺏어 들었다. Q는 하던 말을 멈추고 본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본드는 장식품을 움켜쥐며 Q를 마주보았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Q의 녹색 눈동자가 유난히도 깊었다. 잘 닦은 유리구슬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드는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옅은 속눈썹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서히 눈 밑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장식품이 바닥에 떨어져 통통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본드는 애초에 그것에 신경 쓸 생각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빈손으로 Q의 볼을 감싸 쥐었다. 들뜬 얼굴로 열심히 트리를 꾸미던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괜히 어린애 같다며 트집을 잡았지만 실은 그 점이 사랑스러웠다. 랩 구석에서 열심히 장비를 손보고 있던 Q의 요원이 언뜻 뇌리를 스치기도 했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차피 이 거대한 트리라면 둘을 가려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아니, 가려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본드는 씩 웃으며 느리게 Q의 입술을 덮었다. Q는 기다렸다는 듯 본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일 년 전만 해도 본드가 키스를 해오면 Q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괜히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늘 그렇다는 듯, 이미 익숙하다는 듯 본드의 목에 팔을 두르거나, 혹은 단단한 등을 끌어안거나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본드는 그게 좋았다. 익숙해졌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 입맞춤이라는 행위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는 것. 그런 것들이 본드를 즐겁게 했다.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자신을 기다려주는 Q라서 본드는 이 정도로 즐거울 수 있었다.

  “……다 끝났어요?”

  느리고 달콤하게 Q의 입안을 탐닉하듯 헤집고 다니던 본드의 입맞춤이 끝나고 살짝 입술이 떨어지자 Q는 본드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상태로 속삭였다.

  “글쎄.”

  본드가 대답하곤 짧게 Q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그럼 이제 아까 당신이 떨어뜨린 장식 좀 주워서 어디에 달면 좋을지 결정해주지 않을래요?”

  서로의 입술과 입술이 거의 맞닿다시피 한 상태로 Q가 속삭이자 뜨거운 기운이 적나라하게 본드의 입술을 훑었다. 약간은 야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포근한 느낌이었다. 본드는 다시 한 번 Q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빨아 당겼다.

  “한 번 더 키스하고 나면 어느 쪽이 나을지 알 것 같기도 한데.”

  본드의 중얼거림에 Q는 살짝 눈을 치켜뜨고 본드를 흘겨보다가 결국 푸스스 웃으며 아직도 본드의 목에 감겨 있는 제 팔에 힘을 주어 제 연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얼마나 완벽한 위치에 달아줄지 기대돼서 죽을 것 같네요, 더블 오 세븐.”

  “아마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트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걸.”

  기왕이면 그 완벽한 트리가 오늘 밤 네 침대 옆에 세워질 트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지. 본드는 웃으며 속삭이고는 다시 한 번 Q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묻었다. 지하의 한기가 둘을 맴돌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뜨거웠고, 포근했다.

  더 이상 처음이라는 게 없을만한 나이에 Q를 만나게 됐지만 신기하게도 Q와 함께 한 순간순간들은 전부 본드를 처음으로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과 해온 입맞춤이었고, Q와도 이미 몇 십 번을 더 했을 행위인데도 또다시 새로운 감각이었다. 온갖 기계와 무기들이 가득한 랩에서, 창문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먼지만 흩날리는 공간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다 키스하는 상황이라니. 처음일 만도 했다. 본드는 살짝 실눈을 뜨고 제 코앞에 있는 Q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게 감은 눈꺼풀 아래로 진 음영이 이유 없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태어나서 한 번 겪어볼까 말까한 일들을 수백 번 겪으며 사람에게 매번 새로운 감각을 안겨주는 사람이라니, 역시 평생 품고 살아도 좋을 사람이 아닐까. 본드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인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의 느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본드는 웃으며 Q의 얼굴을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크리스마스, 역시 모든 게 용서되는 날이니 이 정도의 이상을 품는 건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