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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아카/청적] 바다

팥_ 2014. 9. 1. 01:14



아오미네 다이키 생일 기념 청적 '사망' 소재 글 합작에 참여한 글입니다.

급조로 합작열고 반나절 만에 마감하기로 한 글이라 날림이 심합니다.

http://notfound.tistory.com/3








  아카시는 바다 앞에 멈춰 섰다.


  바다는 푸르고도 하이얬다. 넘실대는 파도가 모래사장 위로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하얀 거품을 만들어냈다. 제법 높은 크기로 쳐오는 파도는 젖지 않은 모래사장의 영역을 자꾸만 침범해왔다. 아카시는 제 구두 끝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올라온 바다를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구두가 물에 젖을 것 같았지만 아카시는 그것을 피해 뒷걸음질을 친다거나 하지 않았다.


  “안녕, 다이키.”


  아카시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바다는 대답이 없었다. 조용히 꾸물대며 모래사장을 기어 올라올 뿐이었다. 그리고 기어코 아카시의 구두를 푸른 물결이 덮었다가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아카시는 그러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바다가 차올랐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랫동안 아카시의 구두 밑에서 찰랑대었다. 아카시는 손을 뻗어 제 구두를 적신 바다를 만져보았다. 타오르듯 내리쬐는 여름의 햇살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시원했다. 아카시의 손을 한 번 옭아맨 바다는 다시 또 사그라들었다. 아카시는 손을 들어 이번에는 태양을 향해 뻗었다. 내리쬐는 햇빛 사이로 손에 묻은 물방울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반짝이면서도 시원한 바다. 아오미네 다이키를 닮아있었다. 네가 묻힌 바다여서일까, 다이키. 아카시는 차마 뱉어내지 못 한 말을 삼켰다. 아까보다도 높게 바다가 차올랐다. 아카시는 짭쪼름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저에게 인사라도 하는 것 같았다. 구두위로 넘실대다가 사라지는 푸른 물결을 바라보던 아카시는 결국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 *


  아오미네 다이키는 여름에 태어나서 여름에 사라졌다. 


  그 누구도 아오미네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가 더 이상 농구를 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더라도, 아오미네라면 모든 걸 이겨내고 일어서리라고 생각했다. 연인이었던 아카시마저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오미네가 사라지고 나서야 아카시는 깨달았다. 저는 아오미네 다이키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아카시와 아오미네는 여느 연인들과 같은 사이는 아니었다. 사사롭게 서로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다거나, 모르는 부분을 캐묻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너는 너, 나는 나, 이런 식일 뿐이었다. 흘러가는 서로의 시간을 잡아두려 하지 않았다. 극과 극이다 싶을 정도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던 그들이었지만 그것만큼은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아카시는 그런 관계에 만족했다. 만족했었다. 아오미네가 그렇게 되고 나서는 만족하지 못했지만. 


  “다이키.”


  아카시의 부름에 가만히 책을 읽고 있던 아오미네가 아카시를 돌아보았다. 생전 책과는 연이 없었던 아오미네지만 사고로 하반신을 못 쓰게 되고나니,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기에 새로이 붙인 취미였다. 책을 읽는 아오미네의 얼굴은 늘 심드렁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억지로 읽는 모양새였다. 그래도 멍하니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아카시는 꿋꿋하게 아오미네의 손에 책을 들려주었다.


  돌아본 시선의 끝에서 아카시는 아오미네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카시는 가만히 창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오미네는 읽던 페이지 사이에 가름끈을 넣어 책을 덮었다. 아카시는 저를 허투루 부르는 법이 없었다. 아카시에겐 모든 행위의 이유가 존재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답지 않게 뜸 들이는 시간이 길긴 했지만. 아카시는 그렇게 한참을 창밖을 내다보았다. 뭐라도 보고 있나 싶었지만 아오미네는 굳이 아카시를 따라 보지 않았다. 이미 몇 개월간 수도 없이 봐온 풍경이었다. 새로운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카시는 아오미네에게 들릴 정도로 숨을 몰아쉬었다. 곧 천천히 아카시의 입술이 떨어졌다.


  “바다에 가자.”


* * *


  아오미네 다이키는 바다에서 태어났다. 아오미네의 고향은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바다와 함께 자라났다. 중학생이 되며 도쿄로 이사를 온 후에도 종종 바다를 그리워하는 듯한 말을 하곤 했다. 고등학생 때 까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가 자랐던 바다에 들렀던 것 같지만 프로로 코트에 서게 된 뒤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리를 잃은 지금도, 당연히 그랬다. 


  아카시는 차에서 접이식 휠체어를 꺼내 펼치고 조심스럽게 아오미네를 그 위에 태웠다. 땀이 뻘뻘 흐를 정도로 힘이 소요되는 일이었지만 아카시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아카시는 천천히 해안가를 따라 휠체어를 밀었다. 아오미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카시 역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아오미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카시는 물끄러미 그 푸른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윤기를 잃고 푸석푸석해진 짧은 머리카락들. 그 머리를 슬쩍 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관두었다. 


  “시원하네.”


  여름이었지만 바닷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었다. 아카시는 조용히 혼잣말을 던지듯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는 여전히 눈으로 파도를 쫓을 뿐이었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카시는 궁금했다. 아오미네는 다리를 잃은 이후로 눈에 띄게 말수가 적어졌다. 초기에는 소리도 지르고, 물건도 던져가며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내기도 했었다. 아카시는 묵묵히 그것들을 전부 받아들였다. 그러나 점점 아오미네는 힘을 잃어갔다. 이제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응, 아니 정도의 의사표현만 할 뿐이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고갯짓으로 대신했다. 아카시는 두려웠다. 아오미네의 세상이 좁아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을 다시 한 번 넓혀주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아카시는 용기가 없었다. 그의 영역 안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이제껏 신경 쓰지 않았던 곳에 이제 와서 그곳을 침범할 용기가 없었다. 갑자기 달라진 제 태도로 인해 아오미네가 어떤 생각을 할지, 그것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깨부수고 억지로 그의 영역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카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에서 사라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오미네에게 저는 어쩌면 좋을까.


  “다이키.”


  휠체어가 멈춰 섰다. 아카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오미네의 시선은 수평선에 닿아있었다. 아카시는 목소리를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무슨 생각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요즘은 어때? 그렇게도 묻고 싶었다. 아카시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오미네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오미네의 시선을 따라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는 푸르렀다. 방금 전 바라봤던 아오미네처럼. 바람에 실려오는 짭쪼름한 향기까지도, 참 아오미네다웠다. 다이키는 바다를 닮았구나. 네가 태어난 곳의 바다를. 아카시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얀 모래사장이 눈앞에 가득 찼다. 그 뒤로 이어진 제 발자국과, 휠체어의 바퀴자국까지도. 우리가 보통의 연인이었다면 이 모래사장엔 발자국 두 쌍이 나란히 이어졌겠지. 하지만 남은 건 초라한 아카시의 발자국 한 쌍과, 뱀처럼 이어진 바퀴자국 한 쌍 뿐이었다.


  “…바다, 예쁘다.”


  아카시는 아오미네에게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덧없는 소리만 뱉어냈을 뿐이었다. 아마 아오미네 역시 아카시가 하려던 말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아카시는 가만히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하얀 모래사장 위로 점점이 물방울이 떨어져 짙은 자국을 잠겼다. 바닷바람 사이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휠체어의 손잡이를 쥔 아카시의 손에 힘이 실렸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오미네 다이키는 목을 매달았다.


  아오미네의 생일이었다. 생일 케이크와 몇 가지 음식을 사러 외출을 다녀온 아카시가 아오미네의 방에 들어왔을 땐 방은 비어있었다. 아카시는 바닥에 음식을 내려놓고 급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엉망이었다. 이불도, 시트도 전부 바닥에 흘러내려 있었다. 아오미네가 기어서 이동한 흔적이 역력했다. 아카시는 필사적으로 자취를 쫓았다. 그 자취의 끝은 방 안에 딸린 작은 욕실이었다. 아카시는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아오미네 다이키의 모습이 있었다. 차라리 높은 곳에 매달려있었다면 그렇게 비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수건을 잘라 만든 밧줄을 수건걸이에 걸고서 목을 맨 채 바닥에 늘어져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제 발을 써보지도 못한 사람. 아카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저를 휘몰아쳤다. 


  하염없이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카시의 눈에 낯선 종이 조각이 들어왔다. 아카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필체였다. 


  ‘바다에 데려다줘.’


  아카시는 종이를 떨어뜨리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언제나 후회했다. 그 날, 지금 이 바닷가에서 제가 용기를 냈더라면. 바다가 예쁘다는 소리 대신 요즘은 어떠냐는 말 한 마디만 물었더라면. 아오미네 다이키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카시는 아오미네의 가루들을 바닷가에 뿌리며 생각했었다. 바다는 변함없이 푸르고도 하이얬다. 그 날처럼. 거기는 어때? 아카시는 묻고 싶었다. 그러나 끝까지 묻지 못했다. 바다에 데려다 달랬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오미네가 살아있을 적보다 이곳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토기가 차올랐다. 제 마음 편하자고 이런 생각을 하나 싶었다. 저를 옭아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겠다고, 그의 잔향에서 벗어나겠다고. 


  아카시는 쭈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슬슬 다리가 저려올 법도 한데 아카시는 요지부동이었다. 바다 냄새가 코끝에 밀려왔다. 아오미네의 잔향.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냄새 어딘가에 네가 섞여있겠지. 이 파도 어딘가에 네가 섞여있겠지. 지금 내 발을 어루만지는 것이 너는 아닐까. 아카시는 눈을 내려감았다.


  “생일 축하해.”


  아카시의 입에서 흘러나온 떨리는 목소리가 파도에 녹아내렸다. 잠시 파도가 주춤한 것도 같았다. 바다가 차올랐다. 오래도록 머물러있었다. 아카시는 다시 바다로 손을 뻗어보았다. 바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아카시는 살짝 웃어보였다. 고마워. 와줘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저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었다.


  푸른 물결이 시원한 바람을, 짭쪼름한 향을, 아오미네 다이키를 싣고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