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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적엽/엽적홍] 침범

팥_ 2014. 7. 27. 22:07

선농온에 배포하였던 글입니다.

가져가주신 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니지무라 슈조는 어느 날 갑자기 하야마의 삶에 끼어들었다. 


  사건의 발단은, 새롭게 1군으로 발탁된 부원이 있다는 코치님의 전언이었다. 라쿠잔 농구부의 1군과 2군 사이의 장벽은 제법 높고 단단한 것이었기에 하야마와 그를 비롯한 나머지 레귤러들은 2군에서 제법 열심히 했나보다며 별 생각 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도착한 체육관에는 아카시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야마는 요란스럽게 아카시에게로 달려가 뒤에서 아카시를 끌어안았다. 그 덕에 아카시가 크게 휘청거렸지만 하야마가 단단히 안아 잡은 덕분에 넘어지는 사태는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놀랐잖아, 코타로.”


  아카시는 살짝 인상을 쓰며 제 어깨위에 떡하니 머리를 걸쳐 놓은 하야마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야마는 눈을 감고서 마치 주인을 향해 애교를 피우는 강아지라도 된 마냥 아카시의 손에 대고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정말, 똥강아지 같잖니. 핀잔을 주는 미부치의 말에도 하야마는 그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싱글벙글 미소를 한가득 피울 뿐이었다. 


  “새로 들어온다는 1군은 2학년 전학생이라고 해. 테스트를 거쳐 바로 1군으로 발탁됐다고 코치님이 그러시더군.”


  아카시가 하야마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학생? 레오누나, 우리 전학생 왔어?”

  “처음 듣는데? 에이키치 넌 들었어?”

  “나? 그런 거 관심 없으니까 모르겠는데.”


  뭐야, 그럼 제대로 전학 수속 밟기도 전에 입부 신청부터 한 거 아니야? 하야마의 말에 일순간 체육관이 얼어붙었다. 누군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테스트를 받자마자 바로 1군으로 발탁된 점도 그랬고, 제대로 전학을 마치기도 전에 농구부의 테스트를 치렀다는 점 역시 그랬다. 그렇게 얼어붙은 체육관의 정적을 깬 것은 두 명 분의 발소리였다. 레귤러 다섯 명은 동시에 발소리가 난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의 코치님과, 또 한 명은… 2학년 세 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동갑내기 선수들 중 최고의 PF라 불렸고, 만나는 족족 패배를 안겨줬으며, 고등학교에선 더 이상 농구를 하지 않겠다며 각종 고등학교의 스카우터들을 죄다 물렸던 그,


  “…니지무라 선배?”


* * *


  니지무라를 대하는 아카시의 태도는 나머지 2학년을 대하는 태도와 확연히 달랐다. 언제나 존칭을 붙여 그를 불렀고, 무언가 상의할 일이 있을 때면 그를 먼저 찾았다. 아카시를 대하는 니지무라의 태도 역시 나머지 2학년이 아카시를 대하는 태도와 확연히 달랐다. 한 번은 니지무라가 손가락을 튕겨 가볍게 아카시의 이마를 때린 적이 있었다. 모두가 얼어붙어 긴장하고 그 광경을 지켜본 반면, 니지무라는 그저 웃으며 연이어 아카시의 볼을 잡아 흔들기 까지 했다. 그것에 대한 아카시의 반응은 고작 ‘아파요, 선배.’ 이 말이 다였다. 니지무라는 아카시를 막 대할 수 있는 라쿠잔 농구부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카시가 안 보인다 싶어서 찾아다니면 그 때마다 아카시는 꼭 니지무라의 곁에 있었다. 저와 보내는 시간보다 니지무라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지 않은가 싶을 정도였다. 지금도 그랬다. 쉬는 시간이 되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하야마가 아카시에게도 물병과 수건을 건네기 위해 아카시를 찾아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이번에도 역시나. 두툼한 서류파일을 든 아카시가 체육관 구석에서 니지무라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야마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아카시를 향해 걸어갔다. 심통맞은 목소리로 ‘아카시!’ 하고 크게 부르려는 순간, 니지무라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카시의 머리로 향했다. 아카시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니지무라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야마는 결국 머릿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야마는 체육관이 울릴 정도로 거칠게 아카시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워지는 거친 발소리에 아카시가 고개를 돌렸다. 코타로? 하고 물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하야마의 입술이 입을 틀어막았다.


  삽시간에 얼어붙은 체육관을 다시 깨어나게 한 건 미부치의 목소리였다.


  “코타로! 내가 부활동 중에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지!”


  짜증이 가득한 미부치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다시 체육관의 시선들이 흩어져 제각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하야마는 아카시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아카시는 화남 반, 황당함 반이 섞인 표정으로 하야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앞에 선 니지무라 역시 헛웃음을 지으며 하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만요, 선배.”


  한숨을 쉰 아카시가 하야마의 손목을 잡아 끌어 니지무라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뭘 그렇게 자꾸 안달 내는 거야, 코타로?”

  “아카시가 저 녀석한테 너무 부드럽게 구니까 그렇지.”


  팔짱을 끼고서 불쾌하다는 투로 말하는 하야마의 목소리에 아카시가 손을 뻗어 하야마의 뺨을 아이 달래듯 어루만졌다. 하야마는 일부러 아카시의 손이 닿은 뺨에 바람을 넣어 볼을 부풀렸다. 


  “선배는 그냥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야. 선배가 나한테 그런 마음 가질 리도 없고. 뭐가 됐든 내 연인은 너잖아.”


  그렇게 말한 아카시가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하야마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하야마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동시에 하야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힘없이 팔짱이 풀어졌다. 아카시는 느긋한 미소를 띠고 하야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런 거 해주는 것도 너밖에 없고. 그러니까 이제 니지무라 선배 그만 신경 써도 돼. 알겠어, 코타로?”


  아카시는 다시 손을 뻗어 제가 입술을 붙였던 하야마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야마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아카시를 끌어안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카시! 알겠어! 절대로 알겠어! 무조건 알겠어!”


  오묘한 비문을 섞어서 계속해서 알겠다는 말을 반복하는 하야마를 아카시가 웃으며 품에서 밀어내고는 등을 돌려 니지무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래, 내가 오버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아카시 애인인 거 다들 뻔히 아는데 제까짓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겠어? 엄청 친해 보이는 건 역시 짜증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중학교 때 서로 주장 부주장이라 그 때부터 친했다는데. 내가 이해해야지. 나는 대인배니까! 아카시가 뽀뽀해주는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하야마가 뿌듯한 표정으로 니지무라와 아카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카시는 이야기를 마쳤는지 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려 걸어갔고, 니지무라는 그 뒤를 따라가서는 아카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함께 발을 맞춰 걸었다. 하야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냐,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하야마는 다시 억지로 웃음을 띄우고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니지무라는 이제 아카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손을 들어 아카시의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한 하야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려는 찰나, 니지무라가 뒤를 돌았다.


  하야마는 그 날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니지무라가 비웃는 듯한, 혹은 깔보는 듯한 웃음을 짓는 모습을. 언제나 호쾌하게 호남형의 웃음을 짓던 니지무라의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당황한 하야마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는데 니지무라의 입이 열리고 소리 없이 벙끗거렸다. 그리고 하야마는 그 입술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딱 한 단어였다.



  ‘병신.’


  다시 고개를 돌린 니지무라는 아카시와 함께 마저 걸어갔고, 하야마는 뻣뻣하게 굳어진 발을 뗄 수 없었다.



…미안, 아카시. 알겠다고 한 거 취소할게.

하얗게 질린 하야마의 주먹이 파르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