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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아카/엽적] 새

팥_ 2014. 4. 15. 21:40

* 적우(아카시 오른쪽) 합작, 커플링 <엽적> 으로 제출한 글입니다.

http://marvelpinks2.wix.com/akashi-rightside






  “아카시!”


  짭조름하면서도 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카시의 옆으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뛰어오는 인영에 아카시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펼쳐진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 책을 덮었다. 가까이서 들려오는 몰아쉬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벤치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이내 비어있던 벤치의 다른 한 자리에 온기가 자리 잡았다. 아카시는 덮은 책을 제 왼쪽 옆자리에 놓고 온기가 가득히 자리 잡은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 온기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감기 들어, 코타로.”


  마치 주인의 부름을 기다리는 충견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는 하야마의 모습에 아카시는 살풋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서 손을 뻗어 하야마의 머리카락을 가벼이 털듯 매만졌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주황색 머리카락은 짙은 향기를 머금고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아카시의 느리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하야마는 덧니가 보이도록 웃으며 조금 더 허리를 숙여보였다. 그러더니 결국은 담요를 덮은 아카시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눕는 하야마의 모양새에 아카시는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야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머리라도 말리고 나오지 않고.”

  “그치만 아카시 얼굴이 안 보이면 불안하단 말이야.”

  “또 떼쓰려고.”

  “떼라니 섭섭하게. 안 추워?”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입술을 비죽 내밀어 불만을 표출하던 하야마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더니 팔을 뻗어 아카시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그에 아카시가 응해주듯 살짝 고개를 숙여 하야마의 손이 좀 더 자유롭게 제 얼굴에 닿을 수 있도록 도왔다. 바람을 오래 맞고 있어선지 평소보다는 조금 더 거칠게 일어난 피부가 손끝을 타고 느껴졌다. 하야마는 저를 내려다보는 아카시의 눈을 한 순간도 피하지 않고 마주보며 가만히 아카시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눈이 아닌 손으로 모든 것을 기억에 담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아카시는 그런 하야마의 손을 붙잡지도, 내치지도 않은 채 그저 물끄러미 하야마를 바라볼 뿐이었다. 


  “…춥지는 않지만 이만 들어가 보려던 참이었어. 오래 나와 있었더니 조금 피곤한 것 같아서.”


  하야마의 집요한 손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아카시가 조금 시간을 두고 뒤늦게 하야마의 말에 답했다. 아카시의 말에 하야마는 아카시의 무릎 위에서 번쩍 일어나 가벼운 몸짓으로 가볍게 뛰어 땅에 발을 디뎠다. 갑자기 또 뭘 하려나 싶어 아카시가 하야마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하야마는 짐짓 인상을 쓰고서 그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허리에 손까지 얹은 모양새가 지금 뭔가 단단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리고 싶은 듯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닌지 아카시는 딱히 대응하는 일 없이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하야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지는 쪽은 하야마일 터였다. 그리고 역시나, 그랬다. 하야마는 곧 허리에 얹은 손을 내리고 한숨을 쉬더니 아카시 앞으로 더 가까이 걸어와 잠시 입술을 비죽거리곤 입을 열었다.


  “피곤할 때까지 나와 있지 말래도, 아카시.”

  “혼자 나왔는데 들어갈 때도 혼자면 외롭잖아. 기다렸어, 코타로.”

  “…말 잘하는 건 알아줘야 돼 정말. 이제 들어가자 그만.”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하야마가 허리를 숙여 아카시의 오금 부분과 뒷목에 팔을 받쳐 들어올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당황할 법한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카시는 태연한 얼굴로 하야마의 목에 제 팔을 두를 뿐이었다. 한층 더 가까워진 둘의 얼굴에 하야마는 키득키득 웃더니 아카시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대었고 아카시는 그런 하야마를 피하지 않고서 부드럽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일 뿐이었다.


  “휠체어는 어쩌려고?”

  “이따가 내가 가져오면 돼.”

  “나 혼자 두고?”

  “……너 재우고 나서!”


  살짝 당황한 듯한 하야마의 목소리에 아카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하야마의 목에 두른 팔에 더 힘을 주어 단단히 붙들었다. 읏차, 하는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하야마가 아카시를 번쩍 추켜올렸고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아카시는 ‘놀랐잖아, 코타로.’ 하고 타박하듯 말하면서도 즐거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붉은 태양이 바다에 비쳐 색색으로 부스러지는 빛들이 모래 알갱이들이 반사되어 오색으로 빛나는 광경 사이로 한 사람의 발자국이 만들어져 갔다. 그 한 사람의 발자국만으로 두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광경은 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안정적으로 아카시를 안아 들고 걸어가는 하야마의 뒷모습 사이로 아카시의 다리가 허공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배고프지 않아 아카시? 밥 먹을래?”


  문도 잠그지 않고 나왔던 것인지 하야마가 어깨를 이용해 문을 밀자 문은 아무런 마찰도 없이 가볍게 열려 하야마와 아카시를 반겼다. 문 잠그고 다니랬지, 코타로. 아무리 여기가 외진 곳이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했잖아. 아카시의 타박에 하야마는 건성으로 대충 미안하다고 얼버무리고는 곧 두 사람이 자기에 적당한 크기의 침대 위에 아카시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좀 피곤해서. 그냥 자려고. 코타로는?”

  “옆에서 너 자는 거 보다가 마저 할일 좀 하고 자지 뭐. 누워봐 아카시, 다리 마사지 해줄게.”

  “응, 코타로.”


  대답과 함께 아카시는 폭신한 베개를 베고 배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하야마는 익숙하다는 듯 그런 아카시의 발쪽으로 내려가 바지 사이로 드러난 흰 발목에 손을 대었다. 발목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 섬세한 손놀림으로 꾹꾹 마사지를 하는 하야마의 손길에 아카시는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하야마의 마사지를 받는 것은 아카시의 하루 일과 중 가장 마지막 코스였다. 움직일 수 없는 다리지만 불행히도 고스란히 통증은 느껴지는 탓에 쿡쿡 쑤셔오는 다리를 하야마가 주물러줄 때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안마를 받아 편안한 것보다는 매일같이 해주는 마사지 속에 들어있는 하야마의 애정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겠지만. 


  반면 하야마는 이 시간이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슬펐다. 온전히 아카시를 위해 쏟는 시간이니 당연히 가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아카시의 처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가장 슬펐다. 가만히 누워 제 마사지를 받고만 있는 아카시가, 휠체어나 제가 없이는 홀로 침대에서 거실로 나가지도 못하는 아카시가 제가 알고 있던 아카시가 맞나 싶어서. 손 안에 말랑한 종아리가 잡혀올 때면 더욱 그랬다. 한 때는 근육으로 딱딱하게 뭉쳐있었을 다리가 지금은 근육이란 걸 찾아볼 수 없이 마냥 말랑거리기만 했으니. 예전의 아카시건 지금의 아카시건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지만 아카시의 다리를 다시 찾아줄 수만 있다면 글쎄,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늘 하야마는 생각했다.


  “코타로.”

  “응, 아카시.”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말랑한 아카시의 다리를 주무르던 하야마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공연히 하야마의 손만 분주하게 아카시의 양 다리를 넘나들 뿐이었다.


  “사고 나고 나서 처음엔 그저 죽고 싶었어. 이러면 안 될 소리지만, 매일매일 죽게 해달라고 빌었거든.”

  “…….”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걸 실천에 옮기지 못하게 막았던 건 결국 네 존재였어, 코타로. 네가 내 곁에 있었잖아. 네가 모든 걸 다 버리고 내 옆에 와줬을 때 그러면 안 되지만 조금 기뻤어. 사실 그 전까지 네가 날 버리더라도 이해해야한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거든.”


  하야마는 이제 주무르던 손길을 완전히 멈추고서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카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아카시의 얼굴엔 여전히 평화로운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하야마는 섬찟한 기분에 아카시를 붙잡고 당장이라도 눈을 떠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여 하야마는 차마 그것을 깰 수 없었다.


  “…사실 불안해. 네가 내 옆에서 떨어지면 그게 일초건 일분이건 그 순간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책을 펼쳐도 머릿속은 온통 네가 날 버린 후의 내 삶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하거든. 혼자 낑낑대며 휠체어를 끌고 움직이는 내 모습, 휠체어에서 넘어져 거추장스러운 다리를 끌고 기어가는 내 모습,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네 이름을 부르는 내 모습. 무엇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부탁할게, 코타로. 나를 떠나지 말아줘.”


  아카시의 얼굴에서 평화로운 미소가 거둬졌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그 허여멀건한 얼굴에 하야마는 결국 아카시의 위로 엎어지듯 아카시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고 직후의 아카시는 누가 감히 건드릴 용기도 내지 못할 만큼 불안정했다. 마구잡이로 깨져 푸른빛을 번뜩이고 있는 유리조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야마는 그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기어코 보듬어 안았다. 온몸에 찔려 피를 흘리진 않았느냐고 누군가는 묻겠지만 글쎄, 하야마는 제 자신을 사포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카시를 보듬어 안을 수 있었고 날카로웠던 유리조각의 깨진 면 역시 겨우 무뎌져 둥글어질 수 있었다.


  이제는 전부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하야마의 품에서 아카시는 금방이라도 꺾일 태풍 앞의 풀 한 포기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하야마는 아카시의 이마를 덮은 붉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손으로 올리고 드러난 동그란 이마에 온기를 가득 실어 입을 맞췄다. 


  “아카시, 네가 놓친 게 있어.”

  “…….”

  “나는 널 절대 못 떠나.”

  “…….”

  “네가 일초라도 안 보이면 불안해 미쳐버릴 것 같은 건 나도 같은 사정이거든.”


  아카시의 이마에서 살짝 밑으로 내려온 하야마의 입술이 아카시의 양쪽 눈꺼풀 위로 한 번씩 내려앉았다. 하야마는 아카시의 어깨를 안았던 손을 내려 아카시의 손목을 강하지 않게 쥐었다. 마른 손목의 안쪽으로 우둘투둘한 흉터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몇 번이고 아카시를 잃을 뻔했는지 모른다. 몇 번이고. 이 기분 나쁜 흉터의 감촉이 그 증거였다. 하야마의 몸이 살짝 떨렸다.


  “살아줘서 고마워, 아카시.”

  “…….”

  “그러니까 매일 내 곁에서 살아줘. 어떤 모습의 너라도 좋아. 그게 너라면. 살아만 줘. 그러면 돼. 그러면 절대 내가 너를 먼저 떠나는 일은 없어.”


  젖은 눈꺼풀에서 내려와 부르튼 입술 위로 부드럽게 앉았다 떨어진 하야마의 입술이 달싹였다. 속삭임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아카시의 귓가에는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카시의 손목을 어루만지던 하야마의 손 위로 아카시의 손이 덮어졌다. 하야마의 손등을 몇 번 어루만지던 아카시는 곧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단단한 깍지를 꼈다. 제 손가락을 얽어오는 가는 손가락을 느끼며 하야마는 차마 밖으로 뱉지 못한 말을 삼키고 다시 한 번 아카시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살포시 눌러 내렸다.


  네 다리가 낫길 늘 바라고 바라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내 가슴 깊은 곳 어두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것의 정 반대되는 일을 바라고 있다는 걸. 너는 날개를 다친 새와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두렵다. 날개를 다쳐 내 품에 내려앉았던 네가 낫자마자 떠나가 버리는 일이 나는 두렵다. 네가 나아 예전의 모습을 되찾길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내 품에 갇혀 안겨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또 나는, 이것을 알게 된 네가 낫지 않은 날개를 끌고서 도망치는 일이 두렵다. 


  그것은 정말이지, 차마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