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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세아카/황적]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팥_ 2014. 2. 8. 20:17

* 쿠로바스 얀데레 합작, 커플링 <황적> 으로 제출한 글입니다.

합작 링크 글 부문 : http://blog.naver.com/hhm5402/90189934133

합작 링크 만화 부문 : http://blog.naver.com/hhm5402/90189949882

합작 링크 일러 부문 : http://blog.naver.com/hhm5402/90189942766






  기나긴 비행이었다. 아무리 퍼스트 클래스여도 장시간 좁은 곳에 갇혀 앉아 있는 것은 이코노미 클래스와 마찬가지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아카시는 찌뿌둥한 목을 돌리며 기지개를 켠 후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비행기 모드를 해제하였다. 그리고 해제와 동시에 폭탄이라도 맞은 것 마냥 진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동의 범인은 안 봐도 뻔했다. 아카시는 가벼운 한숨을 뱉은 후 47통의 부재중 전화와 51건의 알림이 떠있는 메신저를 눌러 확인했다. 분명 출장 간다고 연락했는데. 메신저는 전부 비슷한 내용이었다. 아카싯치, 어디에요. 왜 연락 안 돼요.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요? 요즘 계속 착하게 굴더니 갑자기 왜 이래요. 전화 받아 당장. 아카싯치, 아카싯치, 아카싯치… 아카시는 서둘러 키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자그마치 열두 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됐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통화 연결음이 정확히 단 세 번 울렸을 때, 키세 료타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찢듯 튀어나왔다.


  - 아카싯치!!!

  “…별일 없었지, 료타?”

  -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어디에요!!


  다행이었다. 쏟아지는 키세의 메신저들을 보는 순간 아카시의 머리를 가득 점령한 것은 결단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아카시가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간 것을 체크하지 못 했고, 곧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키세 료타 씨가 응급실에 있다고.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간 응급실에는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은 키세가 파리한 안색으로 잠들어있었다. 어찌나 난도질을 해놓았는지 살갗이 걸레가 되어있었다고 했다.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무리한 일은 못 할 거라고도. 깨어난 키세를 붙들어 안고서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제발, 다시는 이러지 말아 달라고. 차라리 저를 해치는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해치는 일은 만들지 말아 달라고. 그 후로 키세는 하루도 빠짐없이 왼쪽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녔다. 그 시계 아래에는 아물기 전에 얼마나 끔찍하게 너덜거렸을지 누구라도 보는 즉시 알만한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일로 아카시가 신신당부를 하고, 키세 역시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카시의 전화를 받은 키세는 그 날 같은 일을 벌이진 않은 것 같았다. 아카시는 키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숨을 뱉었다.


  “료타. 문자 안 읽었어?”

  - 문자요? ……아.


  갑작스레 잡힌 출장이라 전화로 급히 행선지를 알리려 했지만 일하는 중이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 차선책으로 남긴 문자였다. 문자를 남겼는데도 왜 이 난리가 났나 싶었는데, 혹시나 했던 걱정이 역시나였다. 이래서 꼭 전화로 직접 연락하고 싶었는데.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까지도 전화를 받지 않아 별수 없이 문자로 남겼건만 제가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작정 메신저만 잔뜩 보냈을 키세가 아카시의 눈앞에 선했다.


  “갑작스레 뉴욕으로 출장이 잡혀서 비행기 타느라 전화 못 받은 거야. 또 집안 뒤집어놨어?”

  - …이번엔 정말로 사라져버린 줄 알았어요. 

  “안 그럴 거라고 약속했잖아. 나는 지키지 않을 약속은 하지 않아, 료타.”


  키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카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다시 도쿄로 날아가 키세의 옆에 앉아 그를 끌어안고 다독이고 싶었다. 떨리는 손을 잡아주고, 차가운 메탈 시계를 풀어 벗겨주고, 그 아래 드러난 흉터를 만지고 쓰다듬고 싶었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부디 안심해줘, 료타. 하고 끝없이 속삭이고, 또 속삭이면서. 일단 도쿄로 날아가면 그 전에 묶여버리겠지만. 빈집에 홀로 남아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벌벌 떨고 있을 키세를 생각하니 아카시는 마음 한구석이 저려와 공연히 셔츠 위를 손으로 문질 거렸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를 찾겠다고 온 집안을 다 뒤집어 놨을 것이 뻔했다. 옷장이란 옷장은 전부 열어 옷가지들을 죄다 쏟아내 놓고, 소파고 뭐고 모든 가구들을 엎어놨겠지.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집안 사정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 같아 아카시는 이마를 짚었다. 


  - ……언제 올 거예요. 보고 싶어, 아카싯치.

  “걱정 마. 일 마치자마자 갈게. 내일 출발할 거 같아.”

  - …뉴욕 사진 보내주는 거 잊지 말아요. 일하는 사진도. 여자 비서랑 간 건 아니죠? 엄한 외국인 여자가 들이대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너무 비싼 옷 입고 다니지 말아요. 비즈니스 상대 여자면 같이 술 먹지 마요. 그 사람은 먹어도 되는데, 아카싯치는 안 돼. 적당히 마시는 척만 해요. …아니지, 남자여도 위험한데. 그냥 무조건 슬쩍 장단만 맞춰줘요. 몰래 바닥에 버리고, 입에 조금 머금었다 술잔에 뱉,

  “료타.”


  키세의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아카시가 빠르게 말허리를 잘랐다. 이 타이밍에 자르지 않았다간 괜히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더 증세가 심각해질 터였다. 수년간 이런 키세를 상대해오며 몸으로 터득한 타이밍이었다. 곧,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키세는 그랬다. 아무리 망상을 펼쳐내고, 울고, 화내고, 묶어 옭아매고, 집착을 해도 키세는 키세였다. 아무리 어린 아이가 고집을 피운다고 해도 엄마가 화를 내면 결국 그치듯, 키세 역시 아카시의 단호한 태도에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 안쓰러운 거겠지. 아카시는 키세의 침묵을 감싸 어르듯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사진 보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데려온 비서는 남자야. 애인도 있는 남자. 엄한 외국인 여자가 들이대면 바로 반지 보여줄게. 왼손 약지에 잘 끼고 있거든. 그리고 나 술 그렇게 안 약한 거 알잖아. 정말 딱 분위기 맞춰주는 정도로만 마실 거야. 난 너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안 취해, 료타. 내가 흐트러진 모습 보이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는 거 알면서 어리광이네.”

  - ……알았어요. 미팅 시작 전에 말해주는 거 잊지 말아요. 끝나고 말해주는 것도 잊지 말고.

  “응, 착해라. 사랑해.”

  - 나도 사랑해요, 아카싯치. 돌아오면… 묶어 놓을 거야. 꼼짝도 못 하게.

  “너 안을 팔은 남겨주길 바라, 료타. 얌전히 있어 부디. 일도 열심히 하고. 헛짓하면 가만 안 둘 거야.”

  - 알았어요, 나 애 아니야. 안 그래도 지금 촬영장 왔어요. 끊을게, 꼭 이따 전화해요. 알았죠?


  알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한 후에야 아카시는 키세의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래도 촬영장 갈 생각은 했나보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아카시는 왼손 약지의 반지를 다른 손으로 온기를 전하듯 감싸 쥐었다. 보통 아이들은 아이가 아니길 바라고, 어른들은 아이이길 바라지. 애가 아니라 말하던 키세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키세의 증상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아카시에게 충고할 정도로 말이다. 쿠로코도, 아오미네도, 미도리마도, 무라사키바라도, 모모이도 전부 아카시에게 한 마디씩 건네 왔다. 이렇게 살다간 금방 좀먹혀 없어지고 말 거라고. 이 세상에서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존재가 키세 료타라는 존재에게 사라지고 말 거라고.


  아카시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를 쥐고 있는 키세의 아귀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아마 곧 제 말도 먹히지 않을 때가 오겠지. 이대로는 키세의 손안에서 바스러지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손안을 탈출하면. 벗어난다면. 그렇게 된다면 키세가 죽는다. 아카시는 부서져 가루로 흩어지더라도 그 존재가 빛을 발하지 못할 뿐이었지 죽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키세의 손안에서, 잔뜩 깨지고 멍든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키세는. 키세는 살아갈 수 있을까. 모두가 말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 적응하면 그도 나름대로 살아갈 거라고. 하지만 아카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이 연인을 향한 사랑인지, 혹은 내리사랑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이거면 족했다. 이건, 책임이었다. 


* * *


  조심스레 비밀번호를 누른 아카시가 현관문을 열었다. 일부러 키세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 공항에서부터 그에게 손목을 내어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집은 태풍이 휩쓸고 간 듯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신발장에 얌전히 정리되어 들어있던 신발들이 전부 현관에 던져져 있었다. 아카시는 인상을 찌푸리고 신발을 밟지 않으려 애를 쓰며 집 안으로 발을 뻗었다. 집은 조용했다. 일하러 갔나? 그렇게 생각하며 침실의 문을 연 아카시는 곧장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화장대 위의 물건들은 전부 바닥으로 내던져져 곳곳에 유리파편이 널려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고급 솜이불이 난도질당해 토하듯 솜을 내뱉고 있었다. 창문. 아, 역시 깨졌군. 벽 한쪽을 통째로 메운 창문 역시 깨져 그 밑으로 유리조각들이 모래알처럼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어디서부터 손대면 좋을지 모를 이 아수라장 속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몸을 둥글게 웅크려 말고서, 엄마를 찾다 지쳐 잠든 아이처럼.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길 잘했군. 아카시는 그래도 최대한 유리조각을 밟지 않으려 애쓰면서 침대로 걸어가 잠든 키세의 옆에 걸터앉았다. 왼쪽 손목엔 늘 그렇듯 묵직한 시계가 매여 있었다. 아카시는 그 손목을 조심스럽게 들어 시계의 버클 부분에 튀어나온 버튼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와 손목 사이에 틈이 점점 벌어졌다. 아카시는 천천히 시계를 빼내 침대 위에 놓고, 드러난 흉터에 입을 맞췄다. 집에서는 풀고 있으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천천히 살결을 따라 흉터를 쓰다듬었다. 다 아문 흉터인데도 어쩐지 제가 다 쓰린 것 같아 아카시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아카싯치?”


  천천히 흉터 위를 쓰다듬으며 잠든 키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곧 긴 속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닫혀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드러난 황금색 눈동자가 아카시의 시선을 받아내었다. 응, 료타. 다녀왔어. 아카시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걸치고 그렇게 키세에게 대답했다. 그에 대한 키세의 반응은 미미한 것과 거리가 멀었지만. 언제 잠들었느냐는 듯 키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아카시를 끌어안았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을 겨우 버틴 채 아카시는 키세의 등에 제 팔을 둘렀다.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 일분일초가 지옥 같아서… 키세는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아카시의 이목구비를 따라 입을 맞췄다. 붉은색 눈동자에 입 맞추려다 급히 그 사이를 가로막은 눈꺼풀 위에 아쉬워하며 입을 맞추고, 그대로 따라 내려와 작지만 오뚝하게 솟은 콧망울 위에 또 한 번, 그리고 선명하게 선이 그려진 입술, 그 바로 밑의 턱, 목젖, 턱선, 뒷목… 한 번 입을 맞출 때마다 사랑한단 말을 함께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고선. 아카시는 그런 키세를 그저 내버려두었다. 딱히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키세가 만족할 만큼 할 수 있도록 아카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은 채 키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끝없이 쏟아지는 키세의 입맞춤을 받아내기만 했다. 


  “이제 얌전히 앉아요, 내 아카싯치.”


  몇 번을 더 끌어안고 키스한 후에야 아카시에게서 떨어진 키세가 아카시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살 훑어내며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가끔 키세와 떨어지는 일이 있고 나면 으레 행해지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행위였다. 아카시는 여전히 키세의 목에 두른 팔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앉혀줘, 료타.”


  아카시의 말에 키세는 화답이라도 하듯 바로 아카시의 허리와 엉덩이를 받쳐 들어 안았다. 혹여 떨어질까 아카시는 키세에게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 팔로 목을 끌어안고, 다리로는 키세의 허리를 꽁꽁 죄었다. 아카싯치, 코알라 같아. 큭큭 웃으며 아카시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는 키세의 손길에 아카시는 앞머리 사이로 살짝 드러난 키세의 이마에 키스하는 걸로 화답했다. 료타, 발 조심. 누구누구 덕분에 바닥에 유리 조각 많더라. 그쵸, 누구누구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하여튼 지기 싫어가지곤. 키세의 말에 아카시는 중얼거리며 키세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곧, 아카시의 몸이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혀졌다. 저를 내려놓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아카시는 마무리를 하듯 키세의 목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마치 늘 있어온 일이라는 듯 아카시가 자연스럽게 양팔을 의자 등받이 뒤로 넘겼고, 키세는 그 등받이 뒤에 서서 주먹을 쥔 아카시의 양손을 모아 잡았다. 그리고 키세는,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금속 물체를 꺼내 들었다. 차갑지 말라고 데워놨어요. 그렇게 속삭인 키세는 그 금속 물체를 아카시의 손목에 그대로 감듯 채웠다. 철컥 소리와 함께 흰 손목에 감긴 그것은 수갑이었다.


  의자 앞으로 돌아온 키세가 아카시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쭈그리듯 앉자 아카시는 숙련된 기계처럼 양발을 모아 키세의 앞으로 가져갔다. 바짓단과 양말 사이로 드러난 흰 발목에 마치 성스러운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키스한 키세는 입술을 뗀 후 수갑을 꺼낸 주머니의 반대쪽 주머니에서 이번엔 튼튼해 보이는 로프를 꺼내들었다. 익숙한 몸짓으로 그 로프를 아카시의 양쪽 발목에 감는 키세의 얼굴은 무엇보다도 더없이 진중했다. 조립 로봇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가 로봇을 조립할 때의 표정이 저러할까. 료타, 너무 세. 아카시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 소리에 키세는 번쩍 고개를 들어 아카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팠어요? 미안해요. 살짝 허리를 들어 아카시의 볼을 쓰다듬은 키세는 다시 로프를 감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금 여유를 두고, 그러나 혼자 힘으로 풀지는 못할 정도로 로프를 감은 키세가 마무리로 단단하게 매듭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자 확인 안 한 내 잘못도 있으니까, 하루로 해줄게요.”

  “착하네, 료타. 그래도 잘 버텼어.”


  그 말에 키세는 마치 개가 주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아양을 피우듯 허리를 숙여 아카시에게 머리를 디밀었다. 료타, 쓰다듬어줄 수가 없는걸. 작게 중얼거린 아카시가 대신 고개를 내밀어 금빛으로 흐르는 머리카락들 위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든 키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있었다. 그 웃음에 아카시도 덩달아 엷은 미소를 입가에 만들고는 묶인 발을 들어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이제 그만 이리와, 료타.”

  “응, 내 아카싯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자연스레 키세는 아카시의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볼, 쓰다듬어줘. 그 말과 함께 아카시는 눈을 감고 턱을 들어 키세에게 얼굴을 내미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얼마든지.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린 키세는 아카시의 얼굴에 손을 올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볼을 쓰다듬었다.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촉감으로 물체의 형상을 기억하려 하는 듯한 행위와도 비슷했다. 아카시는 계속 눈을 감은 채 가만히 키세의 손짓을 받아냈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딱딱하게 부딪쳐왔다. 아카시의 얼굴을 계속해서 맴돌던 키세의 손은 이제 정갈하게 정돈된 아카시의 붉은 머리카락으로 향해있었다.


  아무도 이 관계는 알지 못 했다. 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 할 거고, 알아서는 안 될 터였다. 누구든 간에 상관없이 모두가 이 관계를 비정상이라 칭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아카시는 이 관계를 이끌어나가야 했다. 저 하나만 적응하면 되는 일이었다. 눈을 감은 아카시는 생각인지, 다짐인지 모를 것을 머릿속에 띄워나갔다.


  이 관계는, 아카시의 책임과도 같은 것이었다. 키세 료타는 본래 멀쩡하게, 그러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저를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변해버린 것은 전부 제 탓이었으니, 아카시는 책임지고 그를 받아줘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키세 료타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은 아카시의 자살 시도, 그 이후였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윈터컵 결승전에서 아카시는 패배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간 아카시는, 제 방 천장에 목을 매었다. 아카시의 방 천장은 꽤 높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살을 시도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아카시의 개인 하녀가 그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였다면 대답이 없는 아카시의 방을 감히 멋대로 들어가지 못 했을 텐데, 어디서 그런 판단력이 나왔는지 하녀는 몇 번을 노크해도 반응이 없는 그 방의 문고리를 잡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제 도련님의 다리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가 아카시를 밧줄에서 내려 바닥에 눕히고, 구급차를 불렀다.


  의사는 몇 초만 늦었어도 그대로 끝났을 거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옆에 키세가 있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아카시를, 목에 선명하게 밧줄 자국을 남기고 누워있는 아카시를, 파리한 입술을 굳게 다문 아카시를 바라보면서. 후에 다른 이들이 말하기를 그 날의 키세는 평생 가도 다신 못 볼 모습이었다고 했다. 아무런 표정도 없이 멍하니 아카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저 달려와서 아카시의 침대를 붙잡고,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고. 살아달라거나, 사랑한다거나, 혹은 원망의 소리조차 아무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열 몇 시간 만에 깨어난 아카시에게 키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카시의 몸이 으스러져라 끌어안는 일이었다.


  그 날 이후로 조금씩 키세는 달라졌다. 시작은 사소한 집착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카시의 행선지를 알아야만 하는 그런 집착. 본격적으로 지금처럼 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졸업 후 함께 도쿄에서 동거를 하던 그 날 부터였다. 아카시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밝고 사랑스러웠던 제 연인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은 전부 제 탓이었으니까. 이렇게 변해버린 연인을 받아낼 수 있는 것도 저밖에 없었으니까. 이건 책임이자, 동시에 속죄였다. 아카시는 그렇게 예전의 키세를 가슴 속에 묻고, 변해버린 키세를 심장에 새겼다. 


  “료타.”

  “응, 아카싯치.”

  “키스해.”


  키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양 볼을 감싸고, 아카시의 양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술을 파고들 뿐이었다. 안고 싶은데 못 안고 있는 거야. 살짝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아카시가 중얼거렸다. 응, 알아요. 키세가 빠르게 대답한 후 다시 제 입술을 대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두 혀가 얽혀들었다. 뜨거웠다.


  가끔 아카시는 생각하곤 했다. 사실 이 관계가 거꾸로 된 것은 아닐까, 하고.


  키세가 저를 쥐고 있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이 거듭될수록, 키세 료타가 아카시 세이쥬로를 부서져라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카시 세이쥬로가 키세 료타를 쥐고 있는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의 잣대가 기울고 있었다. 부서져라 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부서져 내린 것을 억지로 모아 쥐고 있는 것이었다.


  키세 료타는 이미 죽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죽음을 택했던 그 날에. 이미 죽었다. 


  지금 제 옆을 지키고 있는 키세는 그저 부서진 잔해를 모아 놓아 억지로 만들어낸 키세일 뿐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카시에게 말했다. 네 삶을 되찾으려면 키세를 저렇게 둬선 안 된다고. 그때마다 아카시는 생각했다. 키세를 살아있는 존재로 두기 위해 제가 이러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틀린 말이었다. 이미 죽어버린 키세를 억지로 살려 두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은 진작 키세를 놓아줬어야 했다. 그게 맞았다. 다시 키세 료타를 온전하게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선 키세와의 이 관계를 끝냈어야 했다. 그저 제 욕심이었다. 책임, 그리고 속죄라 이름 붙인 욕심이었다. 그리고 그 욕심은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끝없이 키세를 난도질할 뿐이었다.


  다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없는 아카시 세이쥬로가 이걸 모를 리 없었다.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다 알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인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결국 아카시 세이쥬로는 키세 료타를 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비정상적인 관계가 유지되길 바랐다. 억지로 살려낸 키세를 곁에 두기 위해서. 놓아줬을 때 생겨날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욕심,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아카시의 입안을 구석구석 훑어내던 뜨거운 혀가 빠져나갔다. 키세의 숨소리가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아카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랑해, 료타.


  아카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쥐고 묶어 놓는다. 


  사랑해요, 아카싯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회답하는 너에게, 나는 이 이름의 실체를 고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그냥 우리 둘 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자. 그것이 거짓이어도, 억지여도, 강제라 해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가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