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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아카/흑적] Emotion

팥_ 2014. 1. 31. 00:00

* 쿠로코 생일 기념 흑적 합작, 주제 <배신감> 으로 참여한 글입니다.

합작 링크 : http://ndminor.tistory.com/entry/kuroakaiszzang






0.


  내가 농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만뒀던 것도 다 너 때문이었다.


1.


  시작은 감사였다. 이도 저도 아닌 채 존재감 없이 살아가던 나를 끄집어내어 그림자라는 어떤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준 너에 대한 감사. 그림자로서 처음으로 코트에 발을 내디뎠던 날. 그 날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네가 좋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가끔씩 말간 웃음을 보여주는 네가, 아닌 듯 하면서도 모두에게 다정한 네가 좋았다. 감사가 연모로 서서히 변해가는 과정이었다.


  아카시군. 네 이름을 발음할 때 나는 혀끝의 울림이 좋았다. 그래서 공연히 몇 번이고 네 이름을 불러보곤 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네 이름을 불러보다 우연히 네가 그걸 듣고 대답이라도 해주는 날이면 나는 꼭 뛸 듯이 기뻐졌었다. 이런 상황이 점점 위험해져 갈 것임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런 내 감정이 폭발하게 될 그 어느 날, 결국 우리 둘 모두 파멸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이 감정이 커져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렇다. 그 누가 이걸 막을 수 있겠는가. 너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모든 것에 있어서 그저 범인일 뿐인 나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한 번 불어나기 시작한 감정은 끝을 모르고 빠른 속도로 커져 나갔다. 내 감정의 속도를 내가 따라잡지 못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붙잡아보려 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넘어지기 일쑤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감정은 그런 나를 놀리듯 단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은 채 끊임없이 커져나갔다. 나와 그 감정 사이의 격차가 계속 벌어져만 갔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결말이 정해진 시작이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인정하지 못 해 바꾸려 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졌다, 내가.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 후 얼마 안 가 나는 네게 고백했다.


  벚꽃이 눈처럼 쏟아지던 4월의 어느 날, 교정 뒤뜰에 놓인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카시군, 좋아하고 있어요.


  차라리 거절당했으면 좋았을 것을. 거절당했더라면 지금 이 판국까지 다다르진 않았을 테니. 내 고백에 너는 잠시간 놀란 눈치를 보이다 이내 살풋 웃어 보였다. 하늘하늘 날리는 분홍색 벚꽃잎들과 참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1초가 1시간 같은 기다림이었다. 너의 붉은 머리카락 위로 꽃잎들이 점점이 쌓여갔다. 손을 뻗어 그 꽃잎들을 흩트려주고싶은 마음을 몇 번이나 참았을까. 벚꽃 색이 엷게 물든 것과 같은 네 입술이 달싹거리다 마침내 떨어졌다. 


  아마, 나도 그럴걸.


  그렇게 말한 너는 네 머리 위에 쌓인 꽃잎들을 손으로 털어내며 내게 웃어 보였다. 그 모양새가 얼마나 예쁘던지. 후에 우리가 어떤 길을 걷건, 어떤 사이가 되건 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대로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 너를 와락 끌어안았다. 꽃잎이 나풀거렸다. 


2.


  연모라는 감정과 증오라는 감정의 차이는 딱 습자지 한 장이었다. 어느 한쪽의 감정이 끝을 모를 만큼 치달으면 자연스레 다른 한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나 또한 결국 그러했다. 당신에 대한 연모가 도를 지나쳐 증오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걸 알지 못한다. 천천히 종이에 색이 물들 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뀌었음을 알게 되는 이유나 시기는 사람마다 제각각인데, 나의 경우는 아마 네가 나를 ‘테츠야.’ 라고 불렀을 때부터 일 것이다.


  악몽 같은 그 날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 날의 너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카시 세이쥬로의 모습을 한 너는 누구지? 그 예쁜 미소를 섬뜩하게 바꾸고, 옳고 바른말만 말하던 입에서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오고, 늘 상냥하게 ‘쿠로코.’ 라 부르던 나를 ‘테츠야.’ 라 부르는 너는 누구란 말인가.


  너는 참 많이도 변했다. 원래의 너 역시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변해버린 너는 더더욱 그랬다. 내가 더 이상 너를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면서 그것으로 인해 너를 대하는 감정이 증오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점점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느낌이 확실해져 갔다.


  테츠야.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손톱이 손바닥의 살갗을 찢어낼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곤 했다. 제발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며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냥하게 나를 불러주던 네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 벚나무 아래에서 예쁜 미소로 나를 받아주던 네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나는 그렇게 너를 보면서도, 너를 안으면서도 너를 그리워했다.


  너를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손 쓸 새도 없이 변해버린 너를 증오한다고,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겉모습을 뒤집어쓰고 있는 너를 증오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문제점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증오한다면 왜 너를 놓지 못하고 있는가. 괜히 마음고생 할 것 없이 너를 놓아버리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너를 놓아버리는 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감히 너를, 어떻게. 


  많은 시간을 고민해본 결과 내가 너를 차마 놓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증오라는 감정 뒤에서 결국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애증이었다, 이건. 너를 증오하지만 사랑했고, 사랑하지만 증오했다. 참으로 어려운 감정이지만 진실로 그러했다. 애초에 너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증오할 일도 없었겠지. 그러기에 이것은 애증이었다. 애정을 기반으로 한 증오. 그랬기에 너를 놓지 못했던 것이다. 네 얼굴을 보는 것조차 꺼려하면서 너를 놓지 못한 이유. 어쩌면 내 우유부단함에 대한 변명일 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너에 대한 내 감정이 차게 식어내린 건 아니었으니까. 만일 그랬다면 나는 진작에 이런 상황을 못 버텼을 테지만.


  우습게도 애증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 모호한 감정을 정리하고 나자 다음 일은 일사천리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지금까지 변한 너에 대한 내 마음을 확실히 하지 못해서 내 태도 또한 확실히 하지 못했었다면, 이제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너를 놓아줘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일이니까. 너를 놓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할 테니. 정확히는, 변하지 않은 너를 말이다.


  아카시군. …우리 그만할래요?


  앙상한 나뭇가지에 흰 눈이 덮여 우리들의 머리 위로 눈을 쏟아내던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3.


  그 후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윈터컵 결승전의 코트 위에서였다.


  마유즈미 치히로. 네가 데려온 남자는 누가 봐도 나와 같은 남자였다. 존재감이 없음부터 시작해서 코트 위에서의 패스 방식까지 나와 전부 같았다. 그가 너와 네 팀원들에게 패스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떠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네가 저 남자의 존재를 찾아준 게 뻔했다. 네가 내 존재를 찾아줬듯이 말이다. 화가 났다. 무엇에 화가 난 것일까 나는. 나와 헤어지고선 나와 비슷한 남자를 찾아 나처럼 만들었다는 점에? 애초에 내 존재를 찾아준 것도 그저 이상적인 팀을 만들기 위한 이용 수단이었을 거라는 점에?


  너와 대화를 해야만 했다. 너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모든 감정의 찌끄레기들을 다 닦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나 보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 남아있던 감정의 잔여물들은 더 이상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2쿼터가 끝나고 너를 찾아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너를 만난 건 찾기 전에 감정을 추스르려 세수라도 할까 하고 들어간 화장실 안에서였다. 너는 세면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씻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너의 뒤에서 멍하니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볼 뿐이었다. 곧 네가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네 얼굴이 담겼다. 네 눈이 조금 커지는 것을 거울을 통해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다시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이 얼굴에 깔렸다. 그렇게 잠시간을 거울을 통해 마주하던 우리의 침묵을 깬 것은 네가 먼저였다. 너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 테츠야.”


  테츠야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다시 속에서 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이윽고 네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짜증나게도 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카시군. 오랜만이지만 미안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뭐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그래. 테츠야가 좋을 대로.”


  뭐가 그리도 여유로운지. 너는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도. 


  “…왜 나와 비슷한 남자를 선택한 겁니까?”


  너의 표정은 아무런 미동조차 없었다. 어쩐지 분한 마음이 차올랐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화내고, 열을 내고 있는데 너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치부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라쿠잔은 완벽한 팀이야. 다만 거기에 조금의 변화가 필요했을 뿐이지. 그 변화의 성공을 나는 중학교 때 너를 통해 체험한 적이 있었고, 역시 이곳에서의 변화도 너와 같은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너와 닮은 사람일수록 실패할 확률도 낮을 테고.”


  네 입술에선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자칫하다간 네 얼굴에 주먹을 꽂는 일이 발생할까봐 나는 몇 번이고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기를 반복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어쩌면, 그리웠을지도 모르지.”


  내게서 시선을 피한 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인 끝에 결국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그 덧붙여진 말과 동시에 너를 벽으로 밀쳐내고 팔로 가둬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랄 법도 한데, 너는 여전히 고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워? 이제 와서?


  “그리워요? 뭐가요. 설마 내가?”


  분노로 떨리는 내 목소리에 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와 동시에 네게 입 맞췄다. 상냥함과는 거리가 있는 입맞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였을 뿐인데 어떻게 상냥하게 굴 수 있겠는가. 거친 입맞춤 탓인지 아카시가 내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소리가 울려 나는 그때서야 입술을 떼어내었다. 너는 눈을 감은 채로 몇 번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날 좋아하고 있었나요?”

  “…….”

  “내가 헤어지자 하던 그 순간에도?”

  “…그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왜 나를 잡아주지 않았어. 네가 그때 내 말을 순순히 인정하지만 않았어도, 그만하자는 내 말에 부정적인 의사 조금만 내비쳤어도 나는 그 말을 철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너무나도 순순히 내 말을 받아들였었다. 마치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처음부터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듯 말이다. 그랬기에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네가 나를 아직까지 좋아했을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 생각했고, 분수를 모르는 상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너를 바라보았다. 


  “좋아했고, 좋아해 테츠야. 먼저 내게 고백해준 것도 너였으니, 끝낼 권리가 있는 것도 너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만하자는 네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어. 그렇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네가 많이 그리웠나봐. 널 닮은 사람을 보니 욕심이 나더라. 이 사람으로 너를 이기고 싶어졌어, 테츠야. 그저 승리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을 거야. 그렇잖아? 전 애인에게 그와 닮은 사람으로 패배를 안겨주는 흐름이라니. 물론 그가 현 애인이었다면 더 완벽했겠지만, 그건 안 되겠네. 그러기엔… 내가 아직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하니까.”


  조근조근 말하는 너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결국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네가 따라 나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뛰고, 또 뛰었다. 혹여나 네 목소리가, 네 발자국 소리가 들릴까봐 두려워서. 가슴 한편에 쌓여있던 감정의 잔여물이 바스스 부서져 흩어졌다. 드디어 나는 이 감정을 이름 붙여 정리할 수 있었다. 이건, 그랬다. 배신감이었다. 머리를 관통해 그대로 손끝, 발끝까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이 저릿한 감각은 배신감이었다. 나를 닮은 이를 골라 나와 같이 훈련시켜서 나를 이기겠다는 네 말에 느낀 게 아니었다. 내가 배신감을 느낀 부분은 따로 있었다.


  네가 나를 좋아했다는 것,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내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 왜 그때 나를 잡아주지 않았어. 왜. 어째서. 네가 나를 잡아줬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여전히 우린 아름다운 세상만 바라보고, 우리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텐데. 답답함이 뭉친 덩어리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나는 애꿎은 가슴만 주먹으로 쳐내었다. 결국 나는 뛰는 것을 멈추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도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더 세게 가슴을 내리쳤다. 멍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좋아했고, 좋아해. 너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럴수록 치가 떨리는 배신감과,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너무 늦었다, 우린.


4.


  높은 수심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바닥에 겨우 찰박거리며 깔려있는 그것은 더 이상 감사도, 연모도, 증오도, 애증도 아니었다. 단순한 배신감, 그것뿐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배신감' 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쓰고 싶었는데 그걸 위해 적어뒀던 콘티를 못 쓰게 되는 바람에... 더 망작이 나왔습니다.. 마감 전날 독감에 걸려서 응급실에 다녀왔거든요... 그래서 펑크만을 피하기 위해 급조 콘티로 썼더니 ㅠㅠ 존잘님들 그득그득한 합작에 똥투척 죄송합니다. 이런 합작에 내가 참가하다니... 테츠오빠 생일축하해... 흑적 결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