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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아카/엽적] 관계의 끝

팥_ 2013. 12. 24. 00:37

20131030

 

  그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쏟아지는 하얀 눈송이 사이에서 겨울 방학식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은퇴식이기도 했다. 기어이 밖에서 식을 진행하고 마는 고지식한 학교 덕분에 머리고 어깨고 몸에 한 가득 굵은 눈이 쌓여있었다. 앞이 뿌옇게 보일 정도로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 속에서 나는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사람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형식적인 방학식따위 애초에 아무도 참여하고 있지 않았고, 내게 중요한 것은 그보다도…

 

  찾았다. 다행히 우리 반이 서있는 줄은 2학년 쪽과 붙어 있었기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보다도 하얗기만 한 세상에서 붉게 흩날리는 머리칼 덕분이었겠지만. 눈에 뒤덮여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오직 아카시만이 다른 세계에 서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반듯하게 서있었다. 남색 더플코트를 단정하게 입고서, 머리색처럼 붉은 목도리를 매고 추위따위는 모른다는 것처럼 서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겠지. 무섭도록 내리는 함박눈마저 아카시의 주위에서는 조용히 사박사박 어깨로 내려앉을 뿐이었다. 그렇게 고고하고 우아하게 서있으면서도 코 끝만은 감출 수가 없었는지 발갛게 물들어 있는게 새하얀 시야 사이에서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아카시여도 춥긴 추운거구나. 가서 손에 입김을 불어 코 끝을 데워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줄과 줄 사이가 널널했어도 이미 행동으로 옮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할 말이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늦어버릴 말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학교에 나올 일도, 함께 부활동을 할 일도 없으니까. 아카시가 1학년 때 입부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지부진하게 끌어왔던 일을 정리해야만 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지지부진하게 끌고 가는 건 정말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는데, 상대가 아카시이기 때문이었을까. 아카시는 그랬다. 그 어떤 상대라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 지지부진한 관계를 끝내려는 참이면 특유의 미소와 몸짓으로 금세 내 페이스를 잃게 만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하지만 이제는 지지부진하게 끌고 갈 여유도 없었다. 낭떠러지인 것이다. 나는 앞으로 졸업식까지 학교에 나오지 않을 테고, 아카시와는 사적으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오늘이 데드라인이었다. 나는 호기롭게 숨을 골랐다.

 

  "아카시!"

 

  식이 끝나자마자 어떻게든 실내로 들어가려는 아이들의 몸부림 덕분에 순식간에 운동장이 혼잡스러워졌다. 혼돈 속에서 나는 붉은 색의 끄트머리를 겨우 찾아 붙잡고 소리쳤다. 아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아카시는 올바르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시! 손에 힘을 주어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한 아카시의 어깨를 잡아 불렀다. 그제야 아카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연습 없이 맞게 된 완전한 방학 축하해, 코타로."

 

  천천히 돌려 나를 바라본 아카시의 얼굴에 놀람과 함께 동시에 미소가 피었다. 그 미소와 함께 작은 입술에서 뱉어지는 온화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는 순간적으로 또다시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릴 뻔했다. 이래서 위험하다고, 너는. 

 

  "무슨 일이지, 코타로?"

 

  얇지만 힘있는 그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말없이 아카시의 손목을 잡고 교사 뒷편으로 나왔다. 저 복잡한 곳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행사가 끝나 다들 교실로 들어간 학교의 뒷편은 꼭 숲속의 겨울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눈이 쌓이는 소리, 그리고 나와 아카시의 숨소리. 그게 전부였다. 아카시의 머리와 어깨 위에 어느새 눈이 가득 쌓여있었다. 나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 말을 골랐다. 말을 고르다니, 정말 나답지 않은 짓이었다. 하지만 나도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기에 함부로 서투르게 말을 뱉었다간 아슬아슬하게 끌어온 이 관계가 한 순간에 조각날 거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말을 고르고, 또 고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카시를 불러 세운 이유는 관계를 조각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관계를 끊어내고 새로운 관계를 이어붙이기 위함이었으니까. 

 

  "아카시."

 

  내 목소리에 아카시가 내 눈으로 시선을 완전하게 던졌다. 단 하나도 다른 곳으로 주는 시선 없이, 완전하게 내 것이었다. 그 시선에 나는 목이 탐을 느껴 공연히 아카시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주기만 했다. 

 

  "아카시."

  

  괜히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아카시."

 

  새삼스럽게 입 안에서 아카시의 이름을 발음할 때 나는 공허한 소리가, 혀의 움직임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이쯤 되면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날카롭게 말할 만도 한데 어쩐지 아카시는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여전히 그 시선은 완전히 내 것이었다. 

 

  "아카시…."

 

  아카시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을때, 지금껏 가만히 있던 아카시의 손이 올라왔다. 내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자연스럽게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내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길이 꼭 어서 말하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았다. 아카시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우리는 뭐였을까."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는, 결국 고르고 고른 말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분명 내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지. 아카시라면 분명 더 좋은 말을 골라냈겠지만 나로서는 저게 한계였다. 우리는 뭐였을까. 지난 2년의 시간동안 우리는 뭐였을까, 아카시. 보통의 선후배 사이는 아니었다. 보통의 주장과 부원 사이도 아니었다. 분명히 그것보다는 훨씬, 아주 훨씬 더 가깝고 미묘한 사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뭐였을까. 연인도 아니었다. 우리는 연인인 적이 없었으니까. 아카시에게 나는 뭐였을까. 2년 동안 너무나도 궁금했었다. 너에게 나는 무엇이었니. 아니, 무엇이긴 했었을까. 내가 이 알 수 없는 관계를 끌어오면서 오늘까지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결국 그것이었다. 내가 너에게 무엇도 아니었을까봐. 나만 너를 무언가로 생각하고 있었을까봐. 그게 두려웠다. 그 사실을 확답받을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워 나는 그렇게 피하고, 피해 이 낭떠러지까지 도착한 거였다.

 

  "네가 아무리 혈기왕성하게 뛰어다닌다고 해도 이 날씨에는 감기 들어, 코타로."

 

  한 동안 말이 없던 아카시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놀랍게도 평소 그대로였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은, 아카시 세이쥬로였다. 웃으면서 차게 얼어붙은 내 뺨을 쓰다듬는 아카시의 손은 코트 주머니 안에 넣어놓고 있어서인지 따뜻하기만 했다. 아카시는 여전히 내게 모든 시선을 다 준 채로 제 목에 둘러진 긴 붉은 목도리를 풀러냈다. 그리고 그 붉은 목도리는 그대로 내 목에 걸쳐졌다. 아카시는 목도리의 끝을 잡고 내 목에 한 번, 두 번 감아냈다. 순식간에 목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아카시의 드러난 목은 금방이라도 바들바들 떨릴 것만 같았다. 나는 멍하니 내 목에 둘러진 아카시의 목도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따뜻했다. 익숙한 향이 나는 목도리를 코까지 끌어올려보았다. 아카시를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2년 동안 수고했어. 방학 잘 보내."

 

  웃으며 말한 아카시는, 눈이 쌓인 바닥에 발자국을 남기며 교사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또다시 너를 잡을 타이밍을 잃은 채, 멍하니 눈을 맞으며 목도리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역시 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 * *

 

  졸업식 날도 꼭 방학식 날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나는 아카시의 붉은 목도리를 칭칭 동여매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아카시는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을 마치고 신이 나서 사진을 찍자는 레오누나에게 대강 맞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여전히 아카시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반 아이들과도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야 나는 아카시를 포기할 수 있었다.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었다. 내가 그 관계에 끝을 내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만든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역시 그저, 산산조각 냈을 뿐이었을까. 목에 둘러진 목도리에 손을 뻗어 풀러내려는데 문득 눈 앞에 붉은 것이 어른거렸다. 꽃이었다. 하얀 눈 밭 사이에서 장미꽃이 보였다. 그리고, 머리카락이었다. 붉은 머리카락. 

 

  "졸업 축하해, 코타로."

 

  아카시였다. 나는 멍청하게 대답할 말을 잊고 아카시의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카시는 그런 내 표정에 웃으며 장미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겼다. 그제서야 나는 조금 정신이 들어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자유로워진 아카시의 손이 향한 곳은 내가 풀러내려다 만 목도리의 끝이었다. 

 

  "목도리 돌려받으러 왔어."

 

  부드럽게 눈송이를 타고 흩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다시 꽃다발을 아카시의 품에 안기고 내 스스로 목도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다 풀어낸 긴 목도리를 너의 흰 목에 걸치고 천천히, 꼼꼼하게 감아냈다. 

 

  "아카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목도리를 감으며 나는 아카시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대답해오는 시선은 여전히 완전하게 내 것이었다. 아카시는 자기 물건을 함부로 남에게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아카시가 내게 목도리를 건넸다. 그 목도리가 아마도 오늘 내가 아카시가 오기를 기대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날 아카시가 내 물음에 대한 답을 피한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저, 내가 멍청했을 뿐이었다. 예전부터 아카시는 온 몸으로 그 답을 외치고 있었다. 그걸 내가 피했을 뿐이었다. 혹시나, 만에 하나 그 답이 아닐까봐. 내가 오해했을까봐. 그게 무서워서 내가 아카시의 외침을 무시했던 거였다. 내가 멍청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읽어낼 수 있었다. 너의 시선, 목소리, 손짓, 모든 게 그렇게 확실하게 정답을 말하고 있는데. 더 이상 이걸 어떻게 무시한단 말인가.

 

  "우리는 사랑이었지."

 

  아카시의 목에 목도리가 전부 둘러졌다. 찬 공기에 부딪쳐 들리는 내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떨리고 있었다. 아카시의 눈동자 안에 내가 가득 담겼다. 대답해 줘, 빨리. 내가 맞다고 대답해 줘. 나는 칭찬을 조르는 강아지처럼 아카시의 눈을 마주했다. 아카시의 손이 올라가 내 머리에 얹혔다. 나는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아카시의 입술이 귓가에 스쳤다. 뜨거웠다. 

 

  "이제야 그걸 알다니, 멍청하네 코타로."

 

  아카시의 웃음소리가 뜨겁게 흩어져 귓바퀴에 부딪쳐왔다. 참을 수 없는 떨림이 몸을 감싸왔다. 나는 그대로 아카시의 뒷머리를 잡아 작은 입술위로 내 입술을 묻었다. 너는 나에게 사랑이었고, 너도 나에게 사랑이었다. 우리는 사랑이었다. 2년 만에 끊어낸 이 관계의 끝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어져 살아날 터였다. 아카시의 두 팔이 내 목에 감기며 장미 꽃다발이 눈 위로 떨어졌다. 하얀 눈 밭 위로 붉은 꽃잎들이 흐트러졌다. 떨림이 잦아들었다. 교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졸업식 노래가 울려퍼졌다. 2년 간의 관계도 이제, 졸업이었다. 

 

 

 

 

 

 

 

 

 

 

단편이라기엔 너무 아무 설정도 없이 앞뒤 재지도 않고 의식의 흐름으로 써서 조각글로 넣어야하나 싶기도 하고... 2년 간의 엽적은 그저 아슬아슬 썸타던 사이. 아카시의 밀당과 조련 아래 하야마는 그저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자기 마음을 키워갔을 거 같다. 그리고 방학식날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