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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미도] 가을이 온 날

팥_ 2016. 10. 2. 00:52



치아미도 합작에 참가한 글입니다.

http://perorooo.wixsite.com/chiamido





  집 밖으로 나와 운동화의 앞 코를 바닥에 툭툭 내려치던 타카미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을 쓸어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꽤 무더운 날씨였는데, 하루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서늘한 공기가 살갗을 스쳤다. 타카미네는 계속해서 팔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탓인지 유난히도 하늘이 새파랗게 보였다. 타카미네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겉옷이 필요할 것 같았다. 타카미네는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계절이 오고 있었다.



  처음엔 이름에 ‘가을’ 같은 걸 달고 있는 게 웃기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보다도 뜨겁고 무더운 열기를 가진 사람이 가을이라니. 붉은 기운을 띠고 있는 갈색 빛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떠올리면 어울리는 것도 같았지만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이미지와 그는 역시 달랐다. 가을은 좀 더 맑고 쾌청하며 선선하다는 느낌이니까. 


  “오늘도 즐거웠다, 그렇지?”


  유난히도 태양이 작열하는 날이었다. 부활동을 마치자마자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이사라 선배와 아케호시 선배가 안 오는 줄 알았더라면 도망갔을 텐데…… 타카미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모른 척 하는 건지, 혹은 들리지 않는 건지 그는 연신 웃는 얼굴로 제 할 말을 늘어놓기 바빴다. 그 할 말이라는 건 전부 오늘 부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절반 이상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의성어로 가득 차 있었기에 타카미네는 가볍게 그의 말들을 흘려 넘겼다.


  “9월 쯤 되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여름이랑 똑같아……”

  “음? 뭐 그렇지! 초가을의 낮은 여름만큼이나 더우니까.”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들은 건지 늘어놓던 말을 멈추고 타카미네의 말에 대답해왔다. 그리고선 손을 들어 이마 아래로 그늘을 만든 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타카미네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디푸른 하늘에 색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밝은 태양이 번쩍이고 있었다. 1초나 제대로 쳐다봤을까, 순식간에 눈이 아파져오는 기분에 타카미네는 고개를 숙이고 연신 눈을 깜빡였다. 태양의 잔상이 점처럼 변해 떠다니고 있었다. 

  분명 바람은 자잘하게 살랑이고 있건만 그걸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태양의 열기가 뜨거워 타카미네는 뒷 목덜미가 타는 것만 같았다. 타카미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목덜미에 맺힌 땀을 훔쳤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서늘한 손은 오른 열을 어느 정도 식혀주기에 충분했다. 


  “못 참겠다!”

  “ㄴ, 네?”


  대체 이 사람은 어디까지 제멋대로일 셈인지. 그나마 집이 가까워서 다행이라며 안도하고 있던 타카미네는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 큰 소리를 내는 그 덕분에 화들짝 놀라며 따라 멈춰 서고 말았다. 타카미네. 그는 그렇게 이름을 담아 타카미네의 손목을 쥐었다. 


  “저기…… 선배 진짜 힘 조절 못하니까 놓아주세요. 아프고, 덥고……”

  “아이스크림이다!”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는 잘도 듣더니만 어째서 이런 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타카미네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자 그는 웃으며 타카미네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끌어당기더니 이윽고 달리기 시작했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손목이 잡힌 탓에 이도 저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다른 곳에 들른다는 것부터가 귀찮은 일인데 이 날씨에 뛰기까지 해야 한다니. 벌써 그에게 잡힌 손목이 땀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멈춘 곳은 편의점 앞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에 가면서 누가 그런 식으로 크게 인사를 합니까…… 타카미네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의 뒤를 따랐지만 그는 역시 듣지 못한 듯 곧장 아이스크림이 놓인 코너로 향했다. 


  “자아, 골라라 타카미네! 선배의 뜨거운 사랑을 담은 아이스크림이다!”

  “……뜨거우면 다 녹거든요?”


  그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곧장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다맛 아이스크림이었다. 타카미네는 신중한 얼굴로 아이스크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조금 시간이 흐르고서야 겨우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타카미네가 고른 건 딸기 요거트맛 아이스크림이었다. 타카미네가 아이스크림을 고르기가 무섭게 그는 타카미네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낚아채 계산대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우렁찬 인사와 함께 계산을 끝낸 아이스크림을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여전히 바깥은 더웠고 심지어는 철을 잊은 매미의 울음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늘 아래에 위치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카미네는 조금 머뭇거리다 그의 옆에 따라 앉았다. 

  아이스크림은 달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건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는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는 그늘 속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자 언제 더웠냐는 듯 공기는 금세 시원해졌다. 타카미네는 조심스럽게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기 시작했다. 이가 시린 건 질색이었다. 그는 어느 새 아이스크림을 절반이나 먹은 상태였다.


  “오늘은 타카미네도 즐겁게 부활동을 하는 것 같아서 나도 기뻤다.”


  그는 씨익 웃으며 타카미네를 바라보았다. 타카미네는 괜히 시선을 떨구었다. 정말이지, 너무 밝고 뜨거워서 괜히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글쎄요…… 도망칠 타이밍을 놓친 거지만요.”

  “이 녀석,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결국 끝까지 해내는 거 다 안다고?”

  “네에, 네에, 선배가 도망치지 말라고 끌어안고 귀찮게 굴었으니까요.”


  타카미네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아이스크림은 이제 어느 정도 녹아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는 타카미네가 무슨 반응을 보이건 간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부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더니 이내 아니스크림을 다 먹은 듯 막대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그의 시야에 쓰레기통 하나가 들어온 듯 그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잘 봐라, 타카미네.”

  “……좀 그냥 평범하게 가서 버려요.”

  “유메노사키 농구부 부장 모리사와 치아키, 출동이다!”


  그의 손끝을 떠난 아이스크림 막대는 크게 포물선을 그리더니 빨려 들어가듯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졌다. 


  “봤는가, 타카미네!”

  “네에…… 앗,”


  아이처럼 신이 난 그는 활짝 웃으며 타카미네의 옷자락을 붙잡고 떠들어댔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떠들지 모르기 때문에 타카미네는 귀찮은 기색을 역력하게 보이며 대충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손등에 떨어진 녹은 아이스크림 때문에 곧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타카미네는 허겁지겁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었다. 


  “저기 선배, 기대는 안 하지만…… 혹시 손수건이나 휴지 있어요?”


  타카미네의 물음에 그는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예상은 했어요. 타카미네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를 뱉어놓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등에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내었다. 그래도 끈적거리는 느낌은 사라지질 않아 한 번 더 입술을 묻고 살갗을 빨아들이자 그제야 조금 끈적임이 사라진 것 같았다. 찝찝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얼른 집에 가서 손 씻으면 되니까. 타카미네는 슬슬 또 흐르려 하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얼른 입에 넣었다.


  “…….”

  “……왜 그렇게 봐요?”


  이와 입천장을 통해서 머리까지 전해지는 냉기에 타카미네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우물거리며 아이스크림을 삼켰다. 한 번에 큰 덩어리를 삼키려다 보니 머리가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타카미네는 갑작스럽게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살짝 입을 벌리고 물끄러미 타카미네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리사와 선배?”


  타카미네가 그의 얼굴 앞으로 손을 뻗어 휘휘 저어보이자 그는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눈을 감고 머리를 좌우로 털어댔다. 그리고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뺨을 두드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듯 타카미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또 뭡니까? 타카미네가 그렇게 물을 새도 없이 그는 타카미네의 손을 제 얼굴에 가져다대었다. 그늘에서 쉬었으니 이렇게 뜨거울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그의 얼굴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역시 타카미네의 손은 시원하구나?”

  “……제 손을 이런 식으로 쓰지 말아주세요.”


  타카미네는 껄끄러운 얼굴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이제 아예 눈을 감고서 타카미네의 손에서 느껴지는 한기를 즐기고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엔 드물게도 웃음기가 없었다. 찡그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타카미네의 얼굴은 점점 미묘하게 풀려가고 있었다. 손끝이 서서히 뜨거워졌다. 손이랑은 전혀 상관없을 얼굴까지도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카미네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는 정말로 손을 빼고 싶었다.


  “좋아!”


  그는 소리를 지르며 타카미네의 손을 놓아주었다.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타카미네는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시선을 바로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다시 활짝 웃으며 타카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다 식혔으니까 돌아갈까?”


  그는 타카미네의 손에서 아이스크림 막대를 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대는 다시 한 번 포물선을 그리며 깔끔하게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타카미네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를 따라 일어났다. 타카미네가 먼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타카미네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어색한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을 걸어볼 용기는 없었다. 결국 그 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앗, 미도리 군! 웬 겉옷임까?”

  “테토라 군이 너무 둔한 것이오. 졸자도 추워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소이다!”

  “아…… 집에서 나왔는데 좀 추워서. 갈아입기는 귀찮고……”


  교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타카미네의 주변에 앉은 나구모와 센고쿠가 말을 걸어왔다. 2학년 때도 셋이서 같은 반이 되진 못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3학년 때는 용케도 모두 같은 반이 되어있었다. 나구모와 센고쿠는 축하 파티라도 열자며 들떴었고, 타카미네는 그 정도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들뜨긴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온 같은 유닛의 멤버들이 모두 같은 반이라니, 낯선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투른 타카미네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더위는 많이 죽은 것 같긴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쌀쌀한지는 모르겠슴다? 아무튼 이제 가을이네요! 체육제도 본격적으로 다가왔고, 금세 바빠질 검다!”

  “그런가…… 말만 들어도 귀찮네. ……그래도 열심히 해야겠지.”

  “힘을 내시오, 미도리 군!”


  센고쿠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1교시 과목의 담당 선생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나구모와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3학년이 되면서 나름대로 수업을 열심히 들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지루한 과목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타카미네는 슬쩍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전에는 그가 가을이라는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성큼 다가온 가을에 시도 때도 없이 그의 생각이 났다. 

  가을의 태양은 여름보다 진했다. 가을의 태양은 빛보단 열을 뿜어냈다. 더욱 뜨겁고, 더욱 강렬하다. 다만 가을의 공기는 여름보단 서늘해 태양의 뜨거움을 포옹해줄 정도는 되었다. 그 차이였다. 그는 정말이지 가을 같은 사람이었다.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고,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더웠지만 막상 그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 편안해졌다. 가을의 태양은 푸릇푸릇하던 곡물들을 잘 여문 황금빛으로 바꾸어 주었다. 타카미네는 어쩐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렇게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타카미네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라인을 켰다. 그의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도 생각했는데, 오늘이 날인 걸까. 가을이 왔다는 생각을 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타카미네는 대화 목록으로 들어가 대화방 하나를 띄웠다. 선생님은 수업을 하는데 집중하여 꽤 구석에 앉은 타카미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타카미네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이 망설이듯 액정을 두드렸다. 


  보고 싶어요.



  졸업식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유성대가 모여 선배들에게 꽃다발을 주고, 농구부가 모여 또 한 번 꽃다발을 준 것 정도만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동아리 모임을 마친 후에는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사라, 아케호시와 함께 돌아가려는 타카미네를 붙잡은 건 그였다. 이사라도 아케호시도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유성대의 일로 할 말이 아직 남았다며 이사라와 아케호시를 먼저 돌려보냈다. 타카미네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성대의 일로 저 선배가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이사라와 아케호시는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듯 그의 말에 대답하곤 돌아갔다. 남은 건 그와 타카미네 단 둘이었다.

  텅 비어버린 코트에서 타카미네는 제대로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 많은 곳들 중에서 그의 얼굴 위로 시선이 흐르는 일은 없었다. 


  “타카미네.”

  “……네, 네?”


  갑자기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타카미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타카미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몇 달 전, 부활동을 마치고 함께 돌아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그 날을 다시 겪는 기분이었다. 타카미네는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눈을 돌렸지만 그럼에도 제게로 쏟아지는 시선에 결국은 이겨내지 못하고 그를 향해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저렇게나 자신이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할 말이란 게 뭐예요? 뭐, 테토라 군을 도와서 열심히 하라는,”

  “미안하다, 타카미네! 유성대의 일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네? 그럼……”


  체육관에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고작 그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도 그게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타카미네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는 정확히 두 걸음을 옮겼다. 그와 타카미네 사이의 거리는 이제 거의 주먹 하나를 사이에 둔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시선은 여전히 타카미네를 향하고 있었다. 


  ‘뜨거워……’


  꼭 저만을 향해 열을 내뿜는 태양 같다고 생각했다. 타카미네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그와 자신과의 거리는 가까울 대로 가까웠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까운 거리 탓에 그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귓가를 흔들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서, 어깨를 활짝 펴고 다시 눈을 떴다. 타카미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타카미네.”

  “…….”

  “좋아한다.”



  타카미네는 답이 없는 스마트폰을 계속해서 툭툭 건드리다가 다시 한 번 대화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타카미네가 보낸 메시지에는 읽음 표시가 떠있었다. 타카미네는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재빠르게 대화방을 나갔다. 이상한 행동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답장을 보냈을 때 곧장 읽음 표시가 뜬다면 괜히 부끄러울 것 같았다. 타카미네는 손에 스마트폰을 꼭 쥐고 책상에 엎드렸다. 이제 읽었으니 금방 답이 오겠지. 타카미네는 진동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타카미네는 다시 한 번 대화방을 확인했다. 여전히 읽음 표시는 떠있었다. ……바빠서 당장 대답 못한 거겠지. 나중에라도 올 테니까 기다리자. 타카미네는 한숨과 함께 책상 위로 엎드렸다. 그러나 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유닛 연습을 마칠 때까지도 답은 오지 않았다. 



  “……네?”


  타카미네는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그는 여전히 결연한 얼굴로 타카미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주절주절 긴 말은 늘어놓지 않겠다. 뭐라고 말을 하건 내 말로 타카미네의 마음이 바뀐다거나 할 것 같지도 않고, 괜한 말로 동정을 사거나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타카미네는 상냥한 아이니까, 내가 말을 늘어놓으면 늘어놓을수록 쉽게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대체…… 무슨……”


  혼란스러웠다. 그는 지금 입버릇처럼 말하던 ‘좋아한다’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타카미네를 끌어안지도 않았고, 마구잡이로 머리를 쓰다듬지도 않았다. 가깝지만 그 치고는 먼 거리에서 조용히 제 할 말을 또박또박 전하고 있었다. 


  “나는 타카미네가 본래 마음대로 결정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뒤로 세 걸음 물러나 눈을 감았다. 


  “잠시만요, 부장, 아니 모리사와 선배, 저는……”

  “백을 세겠다!”


  그는 천천히 팔을 벌렸다.


  “네가 괜찮다면 백을 세는 동안에 이 품에 안겨다오! 괜찮지 않다면 이대로 가면 된다. 타카미네가 떠나면 이 일은 전부 없었던 일이 될 거야. 부담 갖지 마라! 나는 그저 타카미네와 함께 보낸 3학년 생활이 막을 내리기 전에 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을 찾는 듯 눈썹 사이가 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건 큰 숨소리였다.


  “백!”


  숫자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도 컸다. 꼭 타카미네의 발소리를 가려주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니, 모리사와 선배!”

  “구십구!”


  타카미네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지만 그는 일체 타카미네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숫자를 거꾸로 세어나갔다. 타카미네는 입을 꾹 다물고서 그와 함께 보낸 일 년을 천천히 떠올렸다. 언제부터였어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아마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타카미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농구부에 들어오라며 끈질기게 제의를 해왔고, 농구부에 들어가고 나서는 유성대에 들어오라며 역시 끈질기게 굴었다. 결국 어쩌다보니 둘 다 수락하기는 했지만 타카미네 자신도 어째서 그의 제의를 수락하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생활에도, 아이돌 활동에도 큰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의욕이 없던 타카미네를 위해 그는 아침 연습이 있는 날마다 타카미네를 직접 데리러 왔다. 저혈압이 있어 아침잠이 많은 체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꽤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날,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라 제 손을 가져가 식혔던 것도, 집까지 가는 동안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도 전부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유성대의 모두를 열정적으로 챙기고 타일렀지만 타카미네를 대하는 건 다른 멤버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조금 더 생활의 깊은 부분까지 챙기려고 했던 점들일까. 타카미네는 그게 그저 유성대 내에서 자신이 가장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오십오!”

  “……선배는 정말 막무가내네요.”

  “오십사!”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고백까지도 이런 식이에요? 없던 일로 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 없던 일이 돼요? 선배는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받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오, 오십이!”

  “다른 날도 아니고 헤어지기 직전에서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쁜 거 알죠?”

  “오십일!”

  “비겁하고.”

  “……오십!”


  상처를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자꾸만 매몰찬 말이 쏟아져 나왔다. 타카미네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속상함이 자꾸만 마은 한 구석을 적셔왔다. 그는 언제나 웃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타카미네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가 어느 부분에 상처를 받는 지도 알고 있었다. 타카미네는 말을 뚝 멈췄다. 다시 조용해진 체육관 안에 그의 목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기분 탓인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서운하고 섭섭했다. 앞으로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그가 섭섭했다. 그야말로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얼굴을 볼 일이 잦지는 않을 테니 괜찮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고려해줄 정도로 타카미네는 여유롭지 않았다. 졸업식 내내 타카미네는 정신이 없었다. 올 것 같지 않은 날이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타카미네는 지쳤고, 피곤했다. 그리고…… 자꾸만 밀려오는 서운함의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점점 더 우울해졌다. 


  “……일 년 내내 나를 그렇게 흔들어놓고.”

  “십!”

  “진짜 치사한 사람이에요.”

  “구!”


  그의 목소리가 ‘오!’를 외치기 시작했을 때, 타카미네는 걸음을 떼었다. 정확히 다섯 걸음을 걷자 다시금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

  “…….”

  “일……”

  “……자주 보러 오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

  “…….”


  타카미네의 목소리는 그의 옷에 묻혀 웅얼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품에 닿아온 냉기는 곧 온기로 바뀌어갔다. 녹색 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뺨을 감질이고 있었다. 


  “……아냐, 그건 억울하니까 저 대신 선배가 죽어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 때문에 타카미네는 곧 작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가 싶더니 곧, 벌렸던 팔을 움직여 타카미네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 막혀요…… 타카미네의 중얼거림은 차가운 공기에 묻혀 흩어져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계속해서 타카미네를 끌어안고, 다시 한 번 끌어안고, 또 한 번 끌어안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타카미네의 주변에는 검은 아우라가 흐르는 듯해 아무도 쉽게 타카미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급기야 상황은 나구모가 유닛 연습을 평소보다 이십 분 정도 일찍 끝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타카미네는 조용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홀로 하굣길에 나섰다.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지만 답은 없었다. ……많이 바쁠 수도 있지. 시차도 있을 거고. 오늘 하루 몇 번이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타카미네가 먼저 보낸 라인에는 최대한 빠르게 답을 해왔던 그였고, 이렇게 오랫동안 답을 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기에 섭섭함과 걱정이 자꾸만 제 감정을 지배했다. 이런 식으로 구는 건 결국 그에게 영원히 애처럼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해외로 나간 지도 벌써 근 팔 개월 정도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매사에 열의가 넘쳤다. 졸업을 한 후에는 더욱 더 그랬다. 타카미네는 고작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그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나름대로 쉽게 그를 보내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연락은 자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그리운 감정이 치솟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실제로 만나서 손을 잡고,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고, 온기를 나누는 일은 할 수 없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꼭 오늘에 와서야 모든 게 터져버린 것 같았다. 성큼 다가온 가을은 더욱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벌써부터 가을을 타는 건지, 혹은 가을이기 때문에 그가 생각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그는 제 곁에 없고, 자신은 그가 보고 싶다는 거였다. 


  타카미네가 터덜터덜 집 근처에 다다르자 노을 너머로 검은 인영이 집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타카미네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최근 아이돌과 학생들에게 골치 아픈 스토커가 붙는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아 타카미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주먹을 굳게 쥔 채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냥 손님일지도 모르니까. 자꾸만 겁이 나려는 자신을 애써 다독이며 타카미네가 점점 더 집에 가까이 다가가자, 검게만 보였던 실루엣은 점점 제 색을 찾아갔다. 


  “…….”


  타카미네는 발을 우뚝 멈췄다. 그 사람은 타카미네를 등지고 선 탓에 타카미네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 비슷한 갈색 머리카락. 조금 더 컸나 싶기도 한 저와 비슷한 키. 약간 삐딱하게 선 자세. 몇 달이 지났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뒷모습이 아니었다. 


  “……선배.”


  타카미네가 작게 목소리를 내자 그는 크게 놀라며 황급히 뒤를 돌았다. 그는 천천히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타오르는 노을빛을 받아 더욱 붉게 물든 머리카락이 바람과 함께 넘실댔다. 뜨거운 눈동자가 똑바로 저를 응시했다.


  “……라인 답장은 하지도 않더니, 이게 무슨……”

  “타카미네! 놀랐지!”

  “…….”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몸을 타고 흘렀다. 타카미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타카미네에게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오나 싶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다.


  “음…… 원래 오늘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말이다. 타카미네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던 참에 타카미네가 보낸 라인을 봤다. 나도 당장 보고 싶다고, 지금 보러 가고 있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당신이란 사람은 진짜……”

  “미안하다, 고작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는 마음 정도로 네 마음을 무시해서. 내가 잘못했다, 타카미네. 많이 걱정했지? 그래도 대답 정도는 하는 거였는데 말이다. 내가 너무 들뜨는 바람에……”

  “…….”


  그는 두서없이 떠들던 목소리를 감추었다. 타카미네는 꾹 쥔 주먹을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어느새 배어나온 눈물이 축축하게 손에 스며들었다. 타카미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속에서 젖은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건지, 그가 몸을 움찔거렸다. 타카미네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활짝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그는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타카미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타카미네는 한 번 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백 셀 테니까,”

  “응?”

  “안으러 와요.”

  “…….”

  “배,”


  타카미네의 입에서 ‘백’이라는 숫자가 전부 밖으로 내뱉어지기도 전에 그는 타카미네를 향해 달려왔다. 그가 몰고 온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났다. 타카미네는 꼼지락거리던 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등에 둘렀다. 차가웠던 공기가 서서히 달구어지고 있었다. 타카미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정말로,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