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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미도]

팥_ 2016. 4. 18. 14:08



  오늘도 학교는 ‘그’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관심이 없는 분야라 듣지 않으려 해도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비단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매스컴은 언제나 바쁘게 그의 활약상을 실어 날랐다. 사람들은 그를 ‘히어로’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물론 요즘 세상에 히어로가 어디 있냐며, 전부 정부의 선동일 뿐이라고 헐뜯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투명한 가면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호남형의 얼굴과, 언제나 밝고 희망찬 언사, 제 안위를 가리지 않고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행동 등으로 인해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었다. 타카미네 미도리는, 굳이 따지자면 ‘요즘 세상에 히어로가 어디 있냐’는 측이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이상한 옷을 입고 도시를 박살내는 빌런은 없다. 그러나 이상한 옷을 입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히어로는 있다. 언론은 그가 초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영화 속에서나 보았던 것들을 상상했다. 공중에 날아올라 망토를 휘날리며 손 하나 꿈쩍하지 않고 무거운 것들을 들어 올리는, 그런 흔해 빠진 상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몸소 현장에 뛰어들었다. 자동차에 깔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좁은 틈 안에 제 몸을 욱여넣고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부상자와 함께 빠져나왔고, 소방관들조차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는 대형 화재 현장에 뛰어 들어가 사람 두셋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왔다. 사람들은 그가 영화 속의 초인은 아니더라도 여러 의미로 초인이긴 한 것 같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일단, 그 무수한 사건들 속에서 죽지 않은 것부터가 그랬다.

  그가 이 사회에 없어선 안 될 존재인가? 타카미네는 책상 위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결국 다 경찰이랑 소방관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연재해와, 자연재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이 한 짓일 지도 모를 기묘한 현상들에 나라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는, 딱 그 시기에 나타났다. 잘 짜인 각본 같았다. 성난 국민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돌리기 딱 좋은 존재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국민들의 원성은 차츰 사그라졌다.

  교실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가 학교 주변에서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쫓기면서도 마주하는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웃어 주었다는 목격담들이 잇따랐다. 왜 우리 동네에 왔을까? 아이들은 그 한정된 주제로 실컷 떠들고 있었다. 타카미네는 생각했다. 왜 아무도 ‘히어로’가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지? 히어로의 적 따위, 영화가 아닌 현실에는 있을 리 만무했다.

  타카미네는 더욱 책상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흥미도 없는 정보들이 어지럽게 귓가를 맴돌고 과하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건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시체? 

  타카미네는 발걸음을 멈췄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타고 오르는 싸한 감각에 숨조차 뱉기 어려웠다.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저 인적이 드문 길에 웬 남자가 쓰러져있을 뿐인 형상이었다. 아마 보통의 사람이 봤다면 실신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구급차를 부르거나 했을 것이다. 타카미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아주 느리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꽤 오래 전에 겪었던 경험이니 트라우마 같은 것 없이 자연스레 소멸됐을 거라 생각했는데. 코끝을 찌르는 시체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타카미네는 헛구역질이 나와 열심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쓰러진 남자가 크게 몸을 꿈틀대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타카미네는 그만 남자의 옆에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타카미네의 눈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저, 저기……”

  타카미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자는 타카미네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건지, 타카미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앓던 소리를 내던 걸 멈추고 눈을 번쩍 떠 타카미네를 바라보았다. 붉은색이 섞인 갈색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타카미네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남자는 땅을 짚고 비척대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을 이길 수가 없다는 듯 끙끙대던 사람이 순식간에 멀쩡해져 자리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타카미네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물론 누가 보아도 애써 고통을 참고 있는 모습이긴 했다. 그러나 남자는 보란 듯이 웃으며 타카미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지, 어린 친구? 이런 곳에 다 주저앉아 있고!”

  남자는 언제 아팠냐는 듯 활기찬 목소리였다. 저 기묘한 말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타카미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남자의 손을 잡았다. 게다가 어린 친구라니. 타카미네는 제가 성인으로 오해받았던 횟수를 떠올렸다. 아마 지금은 교복을 입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은 고등학생더러 ‘어린 친구’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제 나이가 마흔을 넘어가지 않는 이상은.

  남자는 타카미네가 손을 붙잡자마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조금 전까지 바닥에서 신음하며 뒹굴던 사람의 힘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 곧장 타카미네를 일으켰다.

  “역시 도움이 필요했던 건가?”

  “……그건 당신 아녜요? 조금 전까지 분명 아파서,”

  남자는 허리에 손을 얹고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묘하게 자부심이 넘치는 말투에 타카미네는 인상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러나 타카미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히어로가 도움이 필요할 리가 있나.”

  남자는 제가 뱉어낸 말이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듯 두어 번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카미네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 등을 돌렸다. 타카미네는 멍한 눈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당당하지만 어딘지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했다. 

  히어로. 기묘하지만 익숙한 말투. 부드러운 갈색 빛의 머리카락. 어제 학교 주변에서 이상한 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던 목격담. 타카미네는 뉴스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불투명한 가면 아래에 흐릿하게 감춰져있던 얼굴은 분명……

  지금 고꾸라진 그 남자의 얼굴과 거의 흡사했다. 타카미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쓰러진 남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히어로는 도움이 필요 없다더니. 타카미네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린 건지 남자는 타카미네가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이 남자가 평범한 남자였다면 구급차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었다. 구급차를 부르고 싶지 않았으니 그렇게 혼자서 참고 버틴 거겠지. 타카미네는 남자의 팔을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사람은 생각 이상으로 무거워 당장이라도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이상한 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던 말이 타카미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찜찜한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서. 진짜 귀찮아…… 타카미네는 한숨을 내뱉고는 느릿한 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