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obas/글

[키세아카/황적] 순수한 사랑 (For. 뎻 님)

팥_ 2016. 1. 14. 00:55



뎻님 생일 축하해요 ♥





  “……너 뭐하니.”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낯선 인영에 아카시는 쓰레기봉투를 옆에 내려놓고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낮췄다. 긴 다리를 접고 자는 게 불편한지 아주 쭉 펴고서,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채 제 집 앞에서 잠들어있는 남자의 얼굴 위로 아카시는 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남자 덕분에 하마터면 이마가 제대로 부딪칠 뻔한 것을 아카시가 빠르게 얼굴을 뒤로 뺐기에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지, 지금 몇 시예요?”

  “아홉 시. 학교 안 가?”

  남자는 멍한 얼굴로 아카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펄쩍 뛰어올랐다.

  “아카싯치?!”

  “설마 우리 집 앞인 줄 모르고 자고 있었던 건 아니지, 료타?”

  아카시는 저를 와락 끌어안고 놔주질 않는 키세를 밀어내며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학교 안 가? 아카시는 다시 한 번 물었지만 키세는 아카시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학교 같은 거 안 가도 돼요. 어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아카시는 곰곰이 지난밤을 떠올렸다. 확실히 평소보다 일찍 잠들긴 했지. 어제는 유난히도 피로가 몰려왔기에 일찍 침대에 눕고 싶었다. 새벽에 우는 길고양이 소리에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안대에 귀마개까지 끼고 수면제를 먹었었지. 그게 아마 저녁 8시 경이었을 터였다.

  “몇 시에 왔는데?”

  “아마 자정? 촬영 끝나고 바로 왔거든요.”

  “자정에 남의 집에 오는 건 실례야.”

  “그치만!”

  아카시의 단호한 어조에 키세가 억울하다는 듯 작게 소리를 질렀다. 아카시는 두 손으로 키세의 가슴을 짚고 밀어내었다. 키세는 이번엔 순순히 떨어져 나왔다. 

  “몸이 너무 차.”

  아카시는 뒤늦게 지금이 1월이라는 걸 생각해냈다. 키세의 옷차림은 평범한 면바지에 터틀넥, 그리고 코트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리 요새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고 해도 겨울밤을 밖에서 지새우기에는 많이 얇은 옷차림이었다. 

  “일단 들어가자.”

  아카시는 키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키세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진 것 같았지만 아카시는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아카시는 평소 집에서 무릎에 올려놓는 용도로 쓰고 있는 두툼한 담요를 키세의 어깨에 둘러준 후, 뜨거운 커피를 내왔다. 고등학생이라면 핫 초콜릿 쪽인가? 이런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키세의 경우는 고등학생이기 이전에 배우이니 커피여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키세는 아카시가 내준 머그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내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아카시는 제 몫의 커피를 내려 담고 키세의 건너편에 앉았다. 키세는 제 옆에 앉으라는 듯 계속해서 비어있는 옆자리를 눈짓했지만 아카시는 애써 무시했다.

  “사람이 집에 없다 싶으면 집에 갔어야지.”

  아카시는 커피를 홀짝이며 꾸중하는 투로 말했다.

  “저도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피곤했나 봐요. 며칠째 밤샘 촬영 중이라서.”

  그리고 키세는 하품을 내뱉었다. 아카시는 살짝 인상을 썼다.

  “기껏 난 개인 시간을 우리 집 앞에서 잔다고 허비한 거야?”

  “허비라뇨! 아카싯치를 얻기 위한 비용이죠!”

  아카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일까. 저 고등학생이 자신을 쫓아다니게 된 게. 


  첫 만남은 모든 만남이 다 그렇듯 우연이었다. 대학생 때 알고 지내던 선배가 모델의 대타를 부탁했던 게 바로 그 우연의 시작이었다. 그가 대학생 때 사진 동아리의 회장을 맡았을 때부터 아카시는 종종 그의 모델이 되어주곤 했는데, 한 동안 연락이 뜸하다 싶더니 갑자기 걸려온 전화의 내용이 바로 저것이었다. 아카시는 모델 경력이라곤 대학생 때 잠깐 모델이 되어준 것밖에 없는 제가 프로의 사진을 할 수는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는 원래 오기로 했던 모델의 분위기가 아카시와 매우 흡사하다며 꼭 아카시가 와주길 원했다. 얼굴이 나오는 작업도 아니고, 필요한 건 얼굴이 가려진 옆모습과 뒷모습, 얼굴 아래의 흉상 정도라는 부탁에 결국 아카시는 옷을 챙겨 입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고등학생 신인 모델이라는 키세 료타가 있었다. 

  작업은 주로 키세와 함께 찍는 컷들로 이루어졌다. 키세는 쉬는 시간에 먼저 아카시에게 다가와 물었다. 앉아서 눈을 감고 메이크업 수정을 받고 있던 아카시는 한쪽 눈을 뜨고 키세를 올려다보았다. 키세의 얼굴엔 한 가득 호기심 어린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한편으로는 얼굴 구석에 자부심이 묻어있기도 했다. 아카시는 단번에 이 어린 모델이 자신을 깔보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어쨌든 프로라는 걸까. 아카시는 메이크업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키세가 입을 떼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성숙한 느낌을 잘 표현하시네요.”

  이런 종류의 타입은 뻔했다. 먼저 칭찬을 해주면 여러 가지 의미로 못 견뎌한다. 아카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키세에게 손을 내밀었다. 키세는 당황한 얼굴로 아카시의 손을 맞잡았다. 

  “저는 고작 대학생 때 잠깐 선배 도와드렸던 게 전부라서요. 이래서 나이에 상관없이 프로가 따로 있나 봐요.”

  아카시는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든 후 키세의 손 안에서 제 손을 빼내었다. 키세는 여전히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확실히 처음의 고압적인 느낌은 사라진 뒤였다. 아카시는 순식간에 피곤해졌다. 이래서 어린 애들을 상대하는 건 질색이었다. 이제 그만 대화를 그만 두고 싶었다.

  “……아, 아카시 씨도 대단하세요! 전혀 아마추어 같지도 않고…… 외모도 분위기도……”

  키세가 풍기는 분위기는 조금 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키세는 연신 횡설수설하며 아카시를 칭찬했다. 아카시는 키세의 말을 전부 들어주었지만 피로는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칭찬 한 번에 이렇게 태세가 바뀌나? 아카시는 곧 제 앞의 상대가 고작 열일곱 살임을 깨달았다. 관심과 칭찬에 약한 나이라는 건가. 키세는 그렇게 아카시를 붙잡고 한참을 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카시는 라인 하나를 받았다. 키세 료타라는 이름으로 도착한 ‘아카싯치, 저예요!’라는 의미 불명의 메시지였다. 아카싯치……? 아카시는 오랫동안 의문의 호칭을 곱씹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 우리 집에 온 이유는 뭐야?”

  그 이후로 키세는 열심히 아카시에게 연락을 했다. 아카시는 그런 키세를 무시하지도, 그렇다고 진지하게 응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나면 대답해주고, 바쁘면 답장하는 것을 까먹고,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키세는 꿋꿋하게 아카시에게 연락을 했다. 몇 번은 아카시를 불러내기도 했다. 아카시는 귀찮아하면서도 키세의 부름에 전부 응해주었다.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도 없었고, 이런 일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건 더욱 싫었다. 

  “참, 약속 기억하죠?”

  키세의 인지도는 날이 갈수록 올랐다. 결국 키세에게 드라마 캐스팅이 들어왔고, 키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드라마는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났다. 키세는 하루아침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아카시에게 거는 연락은 뜸해졌지만 그렇다고 절대 연락을 안 하지는 않았다. 키세는 습관처럼 아카시를 찾았다. 하루는 아카시가 먼저 키세를 불렀다. 촬영 중이었는지 키세의 답은 늦었지만 그의 대답에선 다급함이 ―느낌표를 열 개도 넘게 붙였다.― 느껴졌다. 아카시는 물었다. 왜 그렇게 나를 쫓아다니는 거야? 그러자 잠시 후에 전화가 왔다. 키세로부터의 전화였다. 아카시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약속?”

  전화를 받자마자 키세는 고함을 쳤다. 설마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귀에서 휴대전화를 멀찍이 떨어뜨렸다. 당연히 모르니까 묻지. 그리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억 안 난다고 발뺌할 생각 마요. 아카싯치는 기억 못 해도 제가 다 기억 하니까!”

  저 아카싯치 좋아한다구요! 키세는 억울한 듯한 말투로 고함을 쳤다. 아카시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키세 료타가 저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나? 물론 없었다. 물론 그간의 행적을 본다면 누가 봐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맞았고, 아카시도 그걸 느꼈기에 대뜸 키세에게 먼저 연락해 물었던 것이었다. 키세의 대답은 아카시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아카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아카시가 키세의 고백을 잊고 행동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발뺌 안 할 테니까. 무슨 약속?”

  키세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투정을 부렸다. 아카시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키세를 달랬다. 어떻게 그렇게 티를 냈는데 모를 수가 있어요? 키세의 투정은 대부분 저런 식이었다. 그야 네가 일부로 티를 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아카시는 그렇게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더 시끄러워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냥 말을 삼켰다.

  “저 시청률 20퍼센트 넘으면 정식으로 데이트 해주기로 했죠?”

  그 무수한 투정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약속이었다. 키세가 새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아카시를 찾자, 보다 못한 아카시가 내건 공약이었다. 어떤 관계가 됐든 간에 아카시는 키세가 저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망친다든가 하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카시는 키세라면 당연히 받아들일만한 공약을 내세웠다. 

  “그랬지.”

  잊고 있던 건 아니었다. 다만 키세가 대뜸 말한 ‘약속’이라는 단어에서 쉽게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카시는 불안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넘었어요! 20퍼센트!”

  키세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촬영 끝나자마자 달려온 건데 초인종을 눌러도 아카싯치가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잠깐 기다리면 나올까 싶어서 기다리다가 눈을 한 번 깜빡였더니 아침이지 뭐예요?”

  키세는 들뜬 목소리로 어제부터 오늘에 걸친 일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했다. 아카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무래도 키세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데이트 해.”

  아카시는 담담한 목소리로, 어찌 보면 결의에 찬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끄럽게 재잘대던 키세의 목소리가 한 순간에 멈췄다. 키세는 크게 뜬 눈동자로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싫으면 말고.”

  “해요! 해요!”

  아카시의 말에 키세가 다급히 말을 잘랐다.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갈까요? 아카싯치, 어디로 가고 싶어요? 놀이공원? 영화관? 바다?”

  “집.”

  들뜬 키세가 끝없이 말을 늘어놓을 기미가 보이자 아카시는 재빠르게 키세의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집이요?”

  키세의 얼굴에 눈에 띄게 실망스러운 빛이 가득 찼다. 그 표정 변화가 너무나도 극명해 아카시는 살짝 웃었다. 

  “네가 요즘 얼마나 유명한지 자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료타. 너랑 어디 나갔다간 그대로 팬들한테 붙잡혀서 아무데도 못 가고 말 걸.”

  아카시는 키세를 달래듯 말했지만 한껏 팔자로 휘어진 키세의 눈썹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우리 집에서 데이트하는 게 싫어?”

  결국 아카시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넌지시 던진 아카시의 물음에 키세는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고 아카시를 쳐다보았다. 이로써 미끼는 던져진 셈이었다.

  “우리 집인데?”

  아카시는 살짝 웃으며 손을 뻗어 키세의 머리를 매만졌다. 

  “너 지금 우리 집에 와있는 거야.”

  그 말은 키세에게 주문처럼 작용했다. 아카시의 말에 키세는 지금까지 제가 들어와 있던 곳이 아카시의 집이라는 걸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키세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아무래도 정말로 제가 태어나 처음으로 아카시의 집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키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것이 모두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키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데이트하는 게 싫어?”

  아카시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동시에 키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집에서 데이트하자는 말은……”

  키세는 또 한 번 침을 삼키고 조금 전까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아카시의 손을 붙잡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아카시가 더 빨랐다. 아카시는 빠르게 원래 있던 자리에서 손을 치우고 키세를 향해 웃어보였다. 키세는 넋을 놓은 얼굴로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일부러 한껏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그건 아니야.”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키세의 눈동자가 다시 가라앉았다.

  “대신 시청률 25퍼센트 넘으면,”

  아카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세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마치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애완견 같다고 아카시는 속으로 생각했다.

  “손 정도는 잡게 해줄게.”

  “……손이요?”

  키세의 얼굴엔 또다시 실망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아카시는 웃음이 날 것 같은 걸 억지로 삼켜내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싫어? 싫으면 말고.”

  “좋, 좋아요! 완전!”

  키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한 번 아카시의 말을 끊고 고함을 쳤다. 아카시는 웃으며 머그를 쥐고 있는 키세의 양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키세는 크게 어깨를 들썩였다. 키세의 손은 어느새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30퍼센트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카시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열심히 해야 해, 료타. 알겠지? 그리고는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여주었다. 아카시는 키세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불타오르는 걸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키세 료타는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저렇게 꾸준히, 맹목적일 정도로 행동할 수 있다니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괜찮다면 키세에게 마음을 보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일에 서툴렀다. 날 때부터 벅찰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 바로 아카시였다. 아카시는 살아가며 사랑을 주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진실 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여라. 어렸을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듣고 자란 소리였다. 아카시가 주는 사랑은 ‘보답’이었다. 키세가 아카시에게 주는 것과는 기본적인 성질 자체가 달랐다. 키세가 주는 사랑은 순수했다. 아카시는 그 순수함이 부러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갖기엔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순수한 사랑을 돌려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카시는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키세의 ‘순수함’은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부터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키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키세의 마음이 자신에게 녹아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아카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순수한 사랑’을 주는 법을 연습했다. 아무도 모르게, 키세조차 모르게, 자신만의 비밀로 하고서. 아직도 서툴렀지만 그래도 이쯤이면 키세에게 얼추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 본 키세의 반응으로 아카시는 한 걸음 더 제가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에 다가서게 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답’같은 사랑을 주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굳이 다른 사람까지 갈 것도 없었다. 평소 키세에게 형식적으로 답을 해주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순수한 사랑은 순수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오늘 아카시는 키세에게 ‘순수한 사랑’을 주었고, 그로 인해 키세는 아카시에게 ‘순수한 사랑’을 느꼈다.

  아, 이런 식이로군. 아카시는 새로운 감정과 진리를 배웠다. 비록 저보다 열 살 정도 어린 사람이었지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키세는 아카시가 갖지 못한 걸 갖고 있었다. 아카시는 키세에게 그런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상호보완적인 관계,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였다. 아직은 많이 서툴렀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카시 역시 키세와 비슷한 크기의 것들을 줄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다. 아카시는 영리하고, 습득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키세의 사랑은 전부 아카시에게로 순식간에 흡수될 것이다. 

  아카시는 키세를 바라보며 웃어주었다. 키세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아카시를 마주 보고 웃어주었다. 아카시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맑은 종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