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07 카게른 교류회에 배포하였던 글입니다.
1. 오이카게
한때는 거대한 문명이었던 것들의 잔해를 군홧발로 대충 걷어낸 오이카와가 힘겹게 콘크리트 더미들을 뛰어넘었다. 대충 둘러보기에도 생존자가 있을 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하긴, 개미새끼 하나 안 남기려고 이딴 짓까지 저질렀는데 없어야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래도 혹시 모를 생존자를 위해 몸에 주렁주렁 두른 탐지기들을 이곳저곳에 대어보며 열심히 길인지 뭔지 모를 곳을 걸었다.
몽매한 민간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런 짓까지 벌인 그들이 이제 와서 생존자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최악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대단한 상을 수여한다거나, 살아남아준 데에 대한 감사인사를 건네거나, 각종 수단을 전부 동원해서 치료한다거나 하는 방향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옅은 숨까지 전부 끊어놓기 위해서였다. 구조를 요청하는 이들의, 마지막 남은 힘까지 끌어 모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들의 숨을 끊어놓기 위해서. 오이카와는 부디 제 구역에서는 생존자가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다. 방안에 앉아 버튼을 눌러 수억의 사람들을 죽이는 일보다 힘든 것이 제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어제 새벽 남부 지역에서 생존자가 한 명 발견되었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존자를 발견한 병사는, 드디어 구조대를 만났다는 기쁨에 울며 웃는 그의 이마를 향해 단박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도 같았다. 훌륭한 처사였다며 간부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오이카와는 그들의 목소리에 어쩐지 속이 울렁거려 슬그머니 식당을 빠져나왔었다. 제가 맡은 구역에서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그렇게 군화의 끈을 묶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탐지기가 요란스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혹여 누가 들을 새라 우선 급하게 탐지기의 소리를 껐다. 오이카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이카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방독면을 바르게 고쳐 썼다. 소리가 울린 곳은 바위무더기가 켜켜이 쌓인 곳이었다. 오이카와는 자세를 낮추고 휴대용 크레인을 꺼내 가장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려 옮겼다. 고작 하나를 옮겼을 뿐인데 아래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아래가 비어있는 건가? 오이카와는 위를 덮은 나머지 바위들을 계속해서 옆으로 옮겨냈다. 네다섯 번 쯤 옮겼을 때, 그리 깊지 않은 공간이 나타났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계속해서 희미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눈에 닿지 않는 구석에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장비들을 옆에 내려놓고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은 깊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넓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오이카와가 손전등을 켠 순간, 오이카와는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검은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부근을 향해 손전등을 돌렸다. …작다. 오이카와는 부디 제가 생각한 그것이 아니기를 빌며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내 그 작은 등 앞에 멈춰 선 오이카와는 방독면을 벗고 손전등을 비추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오이카와가 생각한 그대로인, 어린 남자 아이였다. 남자 아이는 얼굴에 닿은 불빛에 꿈틀거리며 눈을 희미하게 뜨고 불빛이 내려오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 오이카와는 바닥에 손전등을 떨어뜨리며 허둥지둥 총을 찾았다. 눈을 뜨고 나를 봐버리면 늦는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겨우 총을 찾아낸 오이카와가 급히 장전을 하고 총구를 겨누려 했지만 오이카와보다 아이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아이는 줄곧 이곳에 갇혀있었던 어린 생명체라곤 생각되지 않을 속도로 오이카와에게 달려들어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오이카와는 아이가 달려든 반동으로 비틀거리다 결국 바닥에 총을 떨어뜨렸다. 작고 둥근 머리가 오이카와의 품에서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젠장. 작게 중얼거린 오이카와가 우선 아이를 떼어놓으려 얼굴에 손을 가져다댄 순간, 아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가 화들짝 놀라 아이에게서 벗어나려 뒷걸음질을 쳤지만 오이카와를 끌어안은 팔 힘이 강해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오이카와를 올려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것은 아이의 목소리라기엔 괴상한 색을 띠고 있었다. 기이한 목소리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오이카와가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하고 멍하니 아이를 내려다보는 찰나, 풀어진 눈꺼풀을 두어 번 끔뻑거리던 아이는 그대로 오이카와의 품에 무너졌다.
2. 쿠니카게
생각보다 더 차가워진 바람에 카게야마는 코를 훌쩍이며 옷깃을 여몄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뜨거운 햇빛이 지독히도 괴롭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는 늦가을이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는 붉어진 코끝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가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러나 액정에는 아무것도 떠있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짧은 한숨과 함께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왼손도 함께 깊게 찔러 넣었다.
오늘은 쿠니미가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원래도 출장이 잦은 쿠니미였지만 이번에는 삼 개월이나 되는 장기출장이었다. 쿠니미는 무덤덤하게 그 사실을 전했지만, 카게야마는 전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며 연애를 시작했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동거를 시작했다. 그 후로 3년, 둘이 떨어졌던 시간은 길어봤자 2주 정도에 불과했다. 카게야마는 쿠니미에게 섭섭함에 화를 냈고, 쿠니미는 피곤한 표정으로 카게야마의 말에 대꾸하다 결국 큰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게 바로 출장 전 날의 일이었고, 카게야마가 쿠니미와 화해할 새도 없이 다음 날 연습을 위해 체육관에 다녀왔을 때 당연하게도 이미 쿠니미는 짐을 챙겨 떠나고 난 뒤였다. 다녀올게. 작은 메모지 한 장만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서.
카게야마가 화가 났던 것은 쿠니미가 장기출장을 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려준 날이 출장 전 날이었으며, 마치 ‘내일 야근이야.’라는 말을 전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을 먹다가 ‘내일부터 삼 개월 동안 뉴욕으로 출장 가.’ 하고 말을 던진 쿠니미에 화가 난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밥과 함께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쿠니미는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덤덤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싸움의 시작이었다.
삼 개월 간 연락한 횟수 역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뉴욕과 도쿄 사이의 시차 때문에 시간이 거의 맞지 않기도 했고, 거기에 더불어 쿠니미가 너무나도 바빴다. 출장 초반에는 싸우고 난 후의 민망함에 카게야마가 연락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카게야마가 연락을 하더라도 쿠니미가 받지 못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둘은 삼 개월 간 단 한 번도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존심 같은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순식간에 밀려오는 감정에 파묻힐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참고, 또 참았다.
나 그날 연습경기 있어서 마중 못 나가. 카게야마는 마지막 통화에서 쿠니미에게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사실 쿠니미는 별다른 실망감을 표출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찌됐건 출장 전의 싸움 이후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간 것이 마음에 걸려 소박하게나마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나 거짓말임을 눈치 채고 게이트를 나오면서 저를 찾기라도 할까봐 공항 주차장에 주차된 쿠니미의 차 앞에서 기다리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다.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점점 시려오는 발끝을 동동 굴러대던 카게야마의 눈앞에 문득 언제 다가온 지 모를 신발 한 쌍이 들어왔다. 아마도 꽤 익숙한… 카게야마는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세 달 만에 보는,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쿠니미가 서있었다.
“연습경기 있다며?”
쿠니미의 말에 카게야마는 미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버벅거리다 대뜸 뒤춤에 감춰놓았던 오른손을 꺼내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쿠니미가 평소에 좋아하던 푸른 수국이 한가득 풍성히 담긴 꽃다발이었다. 쿠니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카게야마가 내민 꽃다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날… 내가, 어… 그냥 대뜸 화내서 미안했,”
고개를 숙이고 더듬더듬 정리가 덜 된 말을 꺼내던 카게야마는 결국 말을 다 끝낼 수 없었다. 그대로 쿠니미가 카게야마를 와락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바닥에 꽃다발을 떨어뜨리며 푸른 꽃잎이 흩날리는 속에서 그대로 쿠니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저, 쿠니미, 꽃다발… 카게야마가 뜨거워진 얼굴로 작게 말을 꺼냈지만 쿠니미는 대답 없이 카게야마를 안고 있기만 했다. 그리고 한참 후, 쿠니미가 작은 목소리를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뱉어냈다.
“보고 싶었어.”
그 짧은 문장에 카게야마는 쿠니미의 옷자락을 쥐고서 그의 어깨에 깊게 얼굴을 묻었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차마 대답하지 못한 말이 울컥 밀려오는 감정에 아스라이 스러져갔다.
3. 쿠로카게
“…누구세요?”
카게야마는 제가 잠에서 덜 깨었나 싶어 몇 번 눈을 부비적거렸지만 제 눈앞에 앉은 남자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정장차림과 독특한 모양의 머리를 하고서 제 침대 끝에 걸터앉아 흥미롭다는 눈으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에게 카게야마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저 신원을 묻는 일 뿐이었다. 사실 당장 소스라치게 놀라며 신고부터 하는 것이 맞는 일일수도 있으나, 남자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앉아있는 터라 카게야마는 정상적인 사고가 마비된 기분이었다.
“쿠로오 테츠로.”
짤막하게 답한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카게야마를 향해 길게 목을 빼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남자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 곧 그런 카게야마를 놀리기라도 하듯 더 얼굴을 가까이 해오는 남자 덕에 결국 침대 위로 무너지듯 누워버리고 말았지만.
“아니 제 말은, 누구신데 여기 계시냐고요.”
카게야마는 불퉁한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남자는 다시 몸을 바로 하고서 멋들어진, 그러나 묘하게 어딘가 께름칙한 미소를 지으며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어제 네가 날 불렀잖아?”
“…네?”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남자는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카게야마의 방 안을 크게 훑더니 다시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는 카게야마가 앉아있는 침대 쪽으로 긴 다리를 뽐내기라도 하듯 휘적휘적 걸어오더니 대뜸 카게야마의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빠르게 걷어냈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로 이불의 끝을 잡아보려 애썼지만 이미 이불은 저 멀리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카게야마는 붉어진 얼굴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향한 곳은 휑하니 드러난, 거대한 보조기가 덕지덕지 붙은 카게야마의 오른쪽 다리였다.
“와, 진짜네?”
“저기요. 어떻게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나갈 마음 없어 보이니 그냥 신고할게요.”
“섭섭하네, 카게야마. 네가 어제 부른 거 기억 안나?”
남자의 말에 카게야마는 더 이상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듯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러나 곧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나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텐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것은 분명 어제 제가 한탄하듯 중얼거린 말이었다.
“날 찾는다고 내가 어디든 다 가는 줄 알아? 재밌어보여서 기껏 찾아왔더니만.”
남자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카게야마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타고 뼛속까지 흘러들었다. 당장에라도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어쩐지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떨리는 눈동자로 남자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남자의 눈동자는 끝이 없는 어둠이었다. 검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둠이었고, 암흑이었다.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한기, 섬찟한 기분, 남자의 손이 닿은 것만으로 꿈쩍도 하지 않는 몸뚱어리.
“못 믿겠다 하면 저 바깥에 지나가는 남자라도 죽여서 믿게 해줄까 했는데,”
남자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창밖엔 젊은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태평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믿는 것 같으니 그만 둘까?”
그렇게 말한 남자는 유쾌하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쥐었던 손을 놓았다. 동시에 저를 옭아매던 냉기가 함께 떨어져나간 느낌에 카게야마는 몸을 크게 떨며 헐떡이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 나랑 계약 할 거야? 남자의 목소리에 밭은기침을 뱉어내던 카게야마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힘겹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암흑뿐이었던 남자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맴돌고 있었다.
4. 츠키카게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정반대였다. 머리색도, 성격도, 온도도, 말투도. 우리가 사귀고 있음을 주변에 처음으로 알렸을 때 주변 사람들이 경악했던 것은 우리가 둘 다 남자라는 이유보다도, 우리가 너무나도 상극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의 말을 들은 모두가 우리를 걱정했다. 너희 정말 괜찮겠어? 그 말에 카게야마는 ‘당연하죠.’라고 답했고 나는 ‘어떻게든 되겠죠.’라고 답했다. 이것마저도 우리는 달랐다.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카레 만두를 쌓아놓고 먹고 있는 카게야마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많은 우려 속에 관계를 시작한지도 벌써 4년째였다. 놀랍게도 우리는 아직까지 잘 교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사귀는 거냐고 대단하다며 괜히 걱정했다고 말하는 것이 주변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란 건 그 누구보다도 우리, 나와 카게야마였다.
우리는 지독히도 많이 싸웠다. 싸움의 이유는 정말로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저녁 식사로 서로 먹고 싶은 것이 달라 싸우거나, 길을 묻는 여자에게 대답을 해줬을 뿐인 것을 오해해 싸우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싸우거나, 잠을 잘 때 등을 돌리고 잤다는 이유로 싸우거나.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토닥거리면서 귀엽게 연애한다고 표현할 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는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싸우곤 했다. 그만큼 우리는 모든 것이 달랐다. 지금도 그렇다. 저렇게 쌓아두고 먹을 만큼 카게야마가 좋아하는 카레 만두를 나는 썩 좋아하지 않았고, ―애초에 음식을 쌓아두고 먹는 취향도 아니지만― 카게야마 역시 내가 가끔 즐기는 달콤한 케이크나 디저트 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물이라도 마시면서 먹든가.”
“싫어. 맛에 방해돼.”
“체해서 침대에 시체 꼴로 누워있게?”
“내가 너냐? 나는 튼튼해서 안 체해.”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이 별 것 아닌 대화로 시작해서 대판 전쟁을 벌이고, 둘 중 누가 집을 나가네 마네부터 시작해서 못해도 일주일은 냉전 상태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제법 오래된 연인이었고, 싸움 대신 그것을 받아 넘기는 기술이 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안 싸운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엔 하루에 한 번 싸웠다면 지금은 사흘에 한 번 싸우는 정도라는 거지.
나는 다시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배구 잡지를 뒤적이며 만두를 먹고 있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냉수와 우유 사이에서 살짝 멈칫했지만 카게야마의 취향을 고려하여 우유를 꺼내 유리컵에 적당한 높이로 따랐다. 아마 예전이었다면 고려할 것도 없이 물을 꺼냈을 것이다. 나는 흰 우유가 담긴 컵을 들어 카게야마 쪽으로 향했다.
“야.”
카게야마를 부르자 카게야마는 잡지에서 눈을 떼고 나를 올려다보더니 곧 내가 내민 우유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내 얼굴로. 눈치를 살피듯 몇 번 눈동자를 도록거리더니 결국 말없이 받아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살짝 흘리며 도로 소파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카게야마의 둥그런 머리가 슬그머니 나를 따라 돌아가더니 이내 불편한 각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비웃었지?”
“맛에 방해된다며?”
“그건 물이고.”
“우유가 더 방해된다고 생각하는데.”
“나 마시라고 갖다 준 거 아니었냐?”
“네네, 많이 마시고 무럭무럭 크세요.”
카게야마는 더 이상 대답해봤자 피곤하다고 생각했는지 심통 난 얼굴로 나를 잠시 째려보다 고개를 돌려 우유를 마시고, 만두를 베어 물었다.
아마 예전의 카게야마였다면 이렇게 먼저 대화를 포기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이기겠다고 끝까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겠지. 변한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도, 나도 우리가 다름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채워나가는 방법을 배워왔다. 맞지 않는 톱니들을 억지로 바꾸어서라도 우리는 서로를 맞물려나갔다. 이렇게까지 해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서로를 좋아하니까. 너와 나의 다름까지 좋아하니까. 그것뿐이다.
5. 우시카게
카게야마는 헛웃음을 지으며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깊은 어둠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슬쩍 눈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3시 47분. 모두가 잠든 시간,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때 아닌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가자. 대뜸 흘러나온 우시지마의 말이 시작이었다. 우시지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제 머리를 가만히 쓸어 넘기는 그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던 카게야마는 뜬금없는 말에 몸을 돌려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우시지마는 평소와 같은 진중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며 곧 말을 덧붙였다. 바다에 가자.
그렇게 해서 이 시간에 차에 몸을 싣고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시지마의 성격 상 카게야마가 뭐라고 하든 기어코 바다에 갈 게 분명했으므로 카게야마는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거는 대신 우선 순순히 그를 따라나서는 것을 택했다. 대체 갑자기 왜요? 그렇게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무어든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이니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말해주겠지 싶어 카게야마는 결국 그 말을 삼켜냈다.
우시지마는 바다까지 가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앞만 보고 도로를 달릴 뿐이었다. 마침내 우시지마가 입을 연 것은 쉼 없이 달리던 차를 멈추고 기어를 주차에 놓았을 때였다. 다 왔어. 우시지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문을 열고 내렸다. 발밑에 바로 고운 모래가 깔려 있었고, 동시에 파도가 넘실대는 청량한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우시지마는 차 뒷좌석에 늘 싣고 다니던 담요를 꺼내 카게야마의 어깨에 걸쳐주고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왔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어깨에 살짝 고개를 기대고는 제 손을 파고드는 우시지마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둘은 마른 모래와 젖은 모래의 경계선을 따라 천천히 백사장을 걸었다. 새벽의 공기와 바다 특유의 짠 공기가 합쳐져 기묘한 냄새를 만들어냈다.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카게야마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계속해서 모래사장에 제 발자국을 남겼다. 습도가 높은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헝클어뜨려도 카게야마는 머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시지마가 대뜸 여기까지 저를 끌고 온 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쌀쌀한 듯한 공기는 신선했고, 검푸른 바다는 잔잔하게 아우성쳤으며, 맞닿은 손은 우시지마의 것이었다. 나쁠 이유가 없었다.
한참을 걷던 우시지마는 곧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곤 몸을 돌려 컴컴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그런 우시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따라 몸을 돌렸다. 이곳에 도착해서 정면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우시지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참동안 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우시지마를 기다려주듯 옆에서 함께 서서 바다에 눈을 맞추었다.
“부모님이 묻힌 곳이다.”
대뜸 들려온 우시지마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 내용에 카게야마는 급하게 우시지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시지마의 눈은 여전히 넘실대는 바다에 머물러있었다.
“오늘, 정확히는 어제가 부모님 기일이었고.”
“…그걸 왜 이제 말해요.”
“나는 그분들의 영혼을 기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사람이 아니야.”
우시지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시지마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늘 그랬듯 올해도 그냥 지나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
“너와 함께라면 떳떳하게 갈 수 있지 않을까.”
“…….”
“미안하다. 이런 일에 너를 이용,”
“우시지마 씨.”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말을 가로 막고는 느리게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시지마의 옷에 밴 바다 향기가 물씬 코끝에 묻어났다.
“내년에도 와요, 우리.”
내후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 해에도. 축축이 젖은 카게야마의 목소리 위로 우시지마의 끄덕임이 내려앉았다. 따스하고도 묵직한 무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