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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카게오이]

팥_ 2014. 11. 1. 03:27

퍄님 ; 땀방울이 코끝에 힘겹게 달려 있다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혜유님 ; 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위의 두 문장을 이용해서 쓴 글입니다.





  나는 새벽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척거렸다.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네 시선이 자꾸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네가 나를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내가 네게 그럴만한 일을 만든 것도 처음이었지. 

  처음으로 네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너를 대할 때면 항상 조심스럽고 또 섬세하게 대해왔었다. 농담을 하면서도 혹여 네가 싫어하진 않을지 여러 번 고민 끝에 입에 담았고, 네게 입을 맞출 때도 몇 번 입술을 달싹이며 뜸을 들이다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세상의 전부였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이에게 어떻게 험하게 굴 수 있을까. 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도 참지 못하는 것이 있을 줄은 몰랐다. 솔직히, 그 누구여도 참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옛 애인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띄게 어쩔 줄 몰라하고, 손을 떨며, 내게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연인이라니. 물론 단순히 그것 뿐이라면 나도 그냥 참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내 사랑스러운 연인은 제 옛 애인이 저를 스치고 지나갈 때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빤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내가 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다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정도가 더했다. 웬일인지 네 옛 애인이 말을 걸어왔고, 너는 그것에 순순히 응했다. 바로 옆에 내가 있었음에도. 어쩔 줄 모르겠다는 티를 행동으로 전부 드러내며 그의 말에 하나하나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고, 그가 농담같은 말들을 제멋대로 잔뜩 던져놓고 다시 사라지는 순간에도 너의 시선은 그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너와 그의 대화 속에서 그저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다. 너도, 그도, 내가 없는 것처럼. 마치 서로가 연인이었을 때처럼 그들만의 세상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상에 언저리에서 버티는 것이 이제는 한계였다. 돌아올 줄 모르는 너의 돌아간 고개를 보며 결국 나는 큰 목소리를 내었다.


  카게야마!


  너는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내 얼굴이 어땠는 지는 모른다. 그러나 돌아본 네 얼굴이 곧장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굉장히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아직도 오이카와의 세상 속에 갇혀있는 거야?

  …저는, 그게…

  이젠 좀 빠져나올 때도 됐잖아!

  ……쿠로오 씨.


  한 번 터진 물꼬는 틀어막을 수가 없었다.


  너한테서 오이카와의 잔상을 보는 게 지겨워 나는! 이럴 때면 꼭 더 이상 네가 네가 아닌 것 같아. 껍데기만 남아있는 것 같으니까!

  …….


  너는 한참동안 그렇게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져 서서, 흔들리는 눈으로, 그렇게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갈곳을 찾지 못하고 정처없이 배회하며 떨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침묵만 이어지는 시간이 계속되자 스멀스멀 후회와도 같은 것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저는, 저는….

  …….

  …죄송합니다.


  네가 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너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단어들을 더듬더듬 입 밖으로 내뱉다가 결국은 내게 등을 돌리고 달려 도망쳤다. 나는 허탈해졌다. 네가 내게 등을 지고 도망쳤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 역시 너와 그의 세상에 나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걸까. 나는 한참을 멍하니 그곳에 그대로 서있다가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한 것은, 내가 너무 성급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 너에게 단 한 번도 이런 류의 언질을 준 적이 없었다. 명백하게 내 잘못이었다. 네게 따스한 말로 조심스레 언질을 주는 것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소리를 질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와 그가 어떤 연애를 했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전부 알고있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도 안다. 그랬기에 네가 그로부터 회복되는 기간이 길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으며, 나는 너보다 어른이었다. 전부 내가 이해해야할 부분들이었다. 그런데도 무작정 소리부터 질렀다니. 몇 시간 전의 내가 급격하게 한심해졌고, 상처받은 것처럼 보였던 너의 눈과 달려가던 등이 생각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너와 처음 사귈 무렵에 내가 뭐라고 했던가. 과거는 괜찮다고, 네가 아파하면 안아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으면서 그렇게 성급하게, 바보같이.

  너의 그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제는 원망의 빛이 담겨있던 것으로 바뀌어보였다. 나를 안아준다고 했으면서 왜 나를 탓하는 거예요. 그렇게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으윽, 나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 같은 것을 내며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작정 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를 보고, 안고, 미안하다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벌써 세 시가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늦을 것 같다고, 우리 사이가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급하게 벽에 걸린 옷을 꿰어입었다.


  정신없이 달렸다. 빨리, 빨리 너를 안고 싶어서. 사랑스러운 너를 안고 싶어서. 새벽의 공기는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지만 계속해서 달린 탓인지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15분 가량을 달렸을까, 익숙한 너의 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문 앞에 서서 허리를 숙여 무릎을 잡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코끝에 힘겹게 달려 있다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휴대전화를 꺼내들어 네 번호를 톡톡 두드려나갔다.

  깊은 새벽이라 받는데 오래 걸릴거라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신호음이 울린지 정확히 세 번 만에 네가 전화를 받았다. 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도, 어쩐지 두근거리기도 했다.


  - …쿠로오 씨?

  “……카게야마.”

  - …네.

  “집 앞이야. 잠깐만 나와줘. 할 말이 있어.”


  내 말에 너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창문 쪽에서 커튼이 펄럭인 것도 같았고, 들려오던 숨소리가 뚝 멈춘 것이 놀란 것도 같았다.


  - 내려갈게요.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고, 조금 기다리자 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왔다. 너는 내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쭈뼛거리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네가 멈춰선 곳은 나와 몇 발자국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이었다. 몇 시간 만에 너와 나 사이에 이 정도의 거리가 생겼나 싶어 입안이 씁쓸해졌다. 


  “…뛰어오셨어요?”


  너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조심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아직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응.”

  “……왜요?”


  네 물음에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미안했어.”

  “…….”

  “천천히 말해왔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 생각을 잘 말했어야 했는데 대뜸 소리부터 지른 거 미안해. 네가 아파하면 안아주겠다고 해놓고 그렇게 굴어서도 미안하고, 어른답게 굴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그렇게 도망치게 해서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너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뇨. 쿠로오 씨가 잘못하신 거 없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생각없이 굴어서…”

  “아니. 네가 내게서 도망치게 만들어서 미안해. 나는 네게 안식처같은 곳이 되고 싶었어. 네가 그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그래서 이제는 그를 떠올리지 않고, 웃으면서 내게서 쉬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모자랐기에 네가 회복되는 속도가 더딘 거겠지. 그러니까 내 잘못이야. 그래놓고도 결국 네 탓을 하고, 너를 다시 잠도 못 자게 만들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아냐, 그런 거 맞아. 그러니까 카게야마, 내가 노력할게. 너는 노력하지 마. 네가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안을 수 있게 할게. 네가 내게 기댈 수 있게 할게. 네가 네 안에서 그를 전부 지울 수 있도록 할게. 의도하지 않아도 지워지게 만들 수 있도록 할게. 억지로 잊고 묻으려고 한 아픔은 결국 다시 어설프게 덮인 흙을 뚫고 튀어나오게 마련이야. 나는 그러니까, 네게 억지로 묻으라고 하지 않을 거야. 곱고 단단한 흙을 천천히, 천천히 네게 부어줄게. 네가 자각하지 못하는 새에 그를 잊을 수 있도록.”


  네 눈동자는 낮의 그것처럼 심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크게 숨을 머금었다 뱉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카게야마,”


  네 이름의 울림이 오늘따라 먹먹했다.


  “가까이 와. 내게 거리를 두지 마. 안을 수 있게 해줘.”


  내게서 떨어지지 마. 너와 나 사이에 벽을 두지 마. 거리라는 것을 두지 마. 

  네게 묻은 그의 냄새를 지우고 내가 너를 안을 수 있게 해줘. 그를 닦아낼 수 있게 해줘. 네게 너를 묻힐 수 있게 해줘. 네가 나로 범벅될 수 있게 해줘. 네가 나인지, 내가 너인지 구분할 수 없게 해줘. 내 사랑스러운…

  너는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몇 발자국. 그 짧지만 깊은 거리를 네가 점점 좁히고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너의 동그란 머리가 바로 내 앞에 섰다. 너는 살짝 손을 들어 내 옷자락을 쥐었다.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어요.”


  네 갈라진 목소리가 새벽의 틈을 메웠다.


  “그 사람의 흔적은 내게 새겨진 문신과도 같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고통 같은 것.”

  “…….”

  “지금은 아니에요.”

  “…….”

  “만약 그 사람이 문신이라면, 나는 새로운 문신을 덮을 각오가 되어있어요.”


  카게야마는 쥐었던 옷자락을 놓고 천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순간 네 눈동자를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보석처럼 차가울까 생각했지만 역시 따뜻할 것 같다고 생각을 고쳤다. 너는 참으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사랑스럽다.

  너는 말이 없었다. 너는 원래 대화에 서툴렀으니 아마 할말이 많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열심히 표현을 고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믿어요.”


  그리고 네 입에서 흘러나온건 짧은 세 음절이었다. 

  그 짧지만 감히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의미가 담긴 말에 나는 결국 그대로 너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네가 따뜻했다. 

  잠시 내가 차가웠었지. 이제 괜찮아. 나는 정했어.

  이제 결빙을 풀고 나 너를 안을게. 너로 따뜻해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