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109 츠키카게 데이 기념 츠키카게 교류회에 배포하였던 글입니다.
카게야마는 곁눈질로 츠키시마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 무심한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같게만 보였다. 아마 누구라도 츠키시마에게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달랐다. 단적인 예로, 오늘 부활동 동안 츠키시마는 단 한 번도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좋은 소리는 물론이고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습관처럼 꼭 내뱉던 그 ‘왕님’이라는 단어마저도 츠키시마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치…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삐딱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츠키시마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한 손에 물병을 들고 다가온 히나타가 ‘츠키시마한테 할 말 있어?’라고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이 츠키시마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히나타의 손에 들린 물병을 뺏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아 뭐야, 물병 저기도 많잖아!”
“귀찮아.”
비어버린 물병을 도로 히나타에게 내밀자 히나타는 소리를 지르며 방방 날뛰기 시작했다. 그 소란에 츠키시마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낀 카게야마는 의도적으로 츠키시마에게서 눈을 돌렸다. 시끄러워, 히나타. 오늘따라 낯설게만 들리는 츠키시마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슬아슬한 시야의 끝에서 츠키시마가 제 쪽을 바라보는 게 언뜻 보여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우연히 시선이 스친 것뿐이었는지, 혹은 아직도 제게 입을 여는 게 싫은 건지 츠키시마는 그대로 다시 야마구치에게로 고개를 돌려 수건을 건넬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츠키시마에게서 완벽하게 등을 돌려 섰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이유를 몰랐다면 당당하게 얼굴을 맞대고 나한테 뭐 쌓인 거라도 있냐며 따지기라도 할 텐데. 그렇게 뻔뻔하게 굴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나도 명백했고, 그 이유를 만든 것이 바로 본인이었기에 카게야마는 그저 츠키시마를 우두커니 쳐다보거나 혹은 그 시선을 피하거나 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나? 나를 완전히 무시해버릴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쩐지 카게야마는 조금 억울해졌다. 그저 느낀 것을 있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또 한편으로는 평소에 눈치가 없다고 핀잔을 주던 주위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이번에도 뭔가 눈치 없게 군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연인사이에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봐도 명쾌하게 내려지는 결론은 없었다. 연애를 해봤어야 알지. 여자와 해본 적도 없는 연애를 남자와 하고 있는데 제가 뭘 어떻게 알겠나 싶었다.
카게야마는 옆에서 땀을 훔치던 스가와라가 돌아볼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바로 오늘, 점심시간의 일이었다.
요즘 들어 부쩍 카게야마는 생각에 잠겨있는 시간이 많았다. 다른 게 아니라, 저와 츠키시마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었다. 카게야마와 츠키시마는 분명히 연인 사이가 맞았다. 설마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도 들곤 했지만 그럴 리는 없으니 어찌됐건 비록 비밀 연애일지라도 연인사이인 것은 틀림없었다.
먼저 고백한 것은 츠키시마였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은 사실이었다. 이미 그 전부터 어렴풋이 서로의 마음을 알고 기꺼이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던 둘이었기에 그들에게 고백의 의미는 그저 관계의 확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문제는 관계의 확립, 그 다음이었다. 카게야마는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이도 저도 아닌 관계로 쭉 지내는 편이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 연인인데. 연인인데, 연인이라면 응당 수반되어야 할 것들이 츠키시마와 카게야마 사이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연애의 연자도 모르는 카게야마일지라도 연인 사이에 어떤 것들이 오고가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손을 잡는다든가, 포옹을 한다든가, 키스를 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딱히 그런 것들을 츠키시마와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없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래도 츠키시마가 저를 전혀 그런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조금 미묘한 감정이었다. 어딘가 섭섭하면서도, 왜 제가 섭섭함을 느끼고 있는 지에 대한 화도 나고, 급기야는 우리가 정말 사귀고 있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의문까지 들곤 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땅한 해답은 없었고, 상상에서 비롯된 오해만 커져갔다. 이러면 안 돼. 카게야마는 결국 굳은 결심을 하고서 오늘 점심시간, 겨우 츠키시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사귀는 거 맞지?
카게야마의 말에 츠키시마는 하던 행동을 우뚝 멈추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츠키시마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쩐지 그 뭐가 문제냐는 듯한 기세에 나름대로 당당하게 물었던 카게야마는 한풀 꺾인 기운으로 말을 꺼냈다. 아니… 사귀면 뭐 손도 잡고 그러는 거 아냐? 우리는 그런 것도 없고… 너는 고백까지 해놓고 맨날 재수 없게 굴기 바쁘니까 원래 연애라는 게 이런 식인건가 싶어서. 사귀는 사이라기엔 어딘지 좀, 부족한… 느낌이 들어. 카게야마의 대답에 둘 사이에는 짧은 적막이 흘렀다. 츠키시마의 표정은 여전히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지만, 괜히 더 딱딱하게 굳어진 것처럼 보여 카게야마는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초조하게 츠키시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러다 우리 사귄 적 없다는 식으로 나오는 거 아냐? 그런 생각들을 하며 언제 츠키시마의 입술이 열리나만 기다리고 있는데, 참 타이밍 좋게도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츠키시마는 자연스럽게 카게야마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기만 했다. 수업 종 쳤는데, 안 가? 어쩐지 얄미운 말도 함께.
그 이후로 이어진 부활동 내내 이 모양 이 꼴이다. 결국 부활동이 끝날 때 까지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답답함에 미칠 것 같은 쪽은 카게야마였다. 제가 정말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한 건가 싶었다. 마음 같아선 3학년 선배들이라도 붙잡고서 묻고 싶었다. 제가 애인한테 이런 말을 했는데 제가 말실수 한 건가요? 카게야마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몇 번이고 삼켜내야만 했다.
그래.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그리고 이게 지금의 상태였다. 부활동이 끝나고 다함께 배고픔을 달래줄 간식거리를 사 먹은 뒤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는 때 까지도 츠키시마는 기어코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히나타와 야마구치까지 함께 넷이 걷던 길에도, 제일 먼저 히나타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 후에도, 뒤이어 야마구치까지 갈라지고 나서도 츠키시마는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이를 악물고 괜히 고개를 젖혀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달이 크고 둥그니 참 밝았다. 카게야마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흘낏 제 옆을 걷고 있는 츠키시마를 바라보았다. 저 달은 참 환하고 예쁜데 이 달은 아주, 진짜, 정말. 제 욕을 하는 것이 들리기라도 한 건지 카게야마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츠키시마 탓에 카게야마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는 제 손에 닿는 낯선 감촉을 느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카게야마가 급하게 눈을 돌려 제 손에 닿은 것을 확인했을 때,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츠키시마를 바라보았다.
제 손의 끝에 츠키시마의 차가운 손끝이 닿아있었다.
츠키시마는 걸음을 멈춘 카게야마를 따라 저 역시 발을 멈추고 저를 바라보는 카게야마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다시,
이번에는 손끝이 아닌 손 전체가 카게야마의 손에 닿아왔다. 처음에는 손바닥이 닿아오더니 그 다음에는 긴 손가락들이 스멀스멀 카게야마의 손가락들을 감아왔고, 끝으로는 결국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고 세게 쥐는 것으로 완성이었다. 카게야마는 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새하얘진 머릿속으로 츠키시마를 향해 할 말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미 하얘진 머리로는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츠키시마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너, 너, 너어…”
결국 카게야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게 전부였다. 츠키시마는 버벅대며 이상한 소리를 뱉어내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 대신 살짝 눈썹을 들썩일 뿐이었다. 끝까지 카게야마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츠키시마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깍지를 껴잡은 손에 더 힘을 주더니 살짝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카게야마는 어떻게 버틸 새도 없이 그대로 츠키시마에게로 끌려왔고, 츠키시마는 조금 더 가까워진 카게야마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나 싶더니 이번에는 다른 한쪽 손까지 마저 붙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깍지 끼는 것을 잊지 않고서.
“너, 너… 뭐야?”
한참의 버벅거림 끝에 카게야마가 내뱉은 말은 저게 전부였다. 츠키시마 역시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 비스무리한 것을 뱉어냈지만 카게야마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이가 없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그러나 츠키시마가 깍지 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살짝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하는 탓에 카게야마는 소리는커녕 그 어떤 말도 차마 꺼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그렇게 불만이었어?”
“…….”
“손도 안 잡아주고, 안아주지도 않고, 키스해주지도 않는 게?”
“아, 그런 뜻이 아니라…!”
카게야마가 억울한 듯 뭐라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츠키시마가 잡은 두 손을 갑자기 세게 끌어당기는 탓에 카게야마는 비틀대며 츠키시마의 품으로 끌려오느라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좋아해서 그랬지.”
“…….”
“손 잡으면 안고 싶어질 거고, 안으면 키스하고 싶어질 거고, 키스하면 다른 짓도 하고 싶어질 텐데. 연애라곤 한 번도 안 해봤을 게 뻔하니까 배려해서 기껏 열심히 참아줬더니만 이런 식으로 나오고 말야, 왕님.”
“…어?”
“그래서 오늘 내내 생각 좀 해봤는데.”
카게야마의 손가락들을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츠키시마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이에 덩달아 괜히 당황한 카게야마는 황급히 침을 꿀꺽 삼키고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지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츠키시마의 눈을 힘겹게 마주보았다. 타버릴 것 같아. 아니다, 얼어버릴 것 같다. 저 하늘에 뜬 보름달보다도 강렬하고, 차갑다 못해 뜨거운 빛이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
“네 탓이야.”
“…뭐, 가…!”
대뜸 제 탓을 해오는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빠르게 반문하려 했으나 결국 그 말은 카게야마의 입술을 덮어온 츠키시마의 입술 안쪽으로 흩어져 먹히고 말았다. 양손은 전부 츠키시마에게 붙잡혀있던 터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 눈만 동그랗게 뜨고서 붉어진 얼굴로 코앞에 맞닿은 츠키시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그런 생각까지 하니 이미 붉어진 얼굴이 더더욱 주체할 수 없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소한 느낌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라 검은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도록도록 굴려대다 결국 천천히 눈을 감고, 굳어진 몸에 힘을 푸는 것을 택했다. 츠키시마의 입술은 상상 이상으로 따뜻했고, 아까부터 붙들고 있던 손 역시 처음의 차가웠던 기운은 사라지고 따스함만 가득한지 오래였다. 따뜻해.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더 편안히 츠키시마에게 몸을 맡겼다.
“어때. 이제 진짜 사귀는 것 같아?”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낸 츠키시마가 가장 먼저 카게야마에게 물은 말이었다. 카게야마는 상기된 얼굴을 채 가라앉히지 못하고 달뜬 숨과 함께 대답했다.
“…우리 날짜 오늘부터 1일로 다시 세면 안 돼?”
잠깐의 정적 끝에 츠키시마의 공허한 웃음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시든가. 대답을 뱉은 츠키시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의 깍지를 풀고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멍해져있던 정신을 간신히 추스르고 츠키시마의 손을 잡은 손에 괜히 힘을 더 꽉 주어 잡은 채 급히 츠키시마를 따라 걸었다. 왜 웃어, 임마, 웃기냐? 하고 공연히 툴툴대는 것도 잊지 않은 채.
근데 왕님, 날짜도 세고 있었어?
…아니, 뭐, 아니, 그, 다 애인 있으면 다 세는 거지!
오늘 며칠 짼데?
……42일.
날짜 챙겨서 뭐하려고. 기념일 챙기려고 했어?
…시끄러워, 멍청아.
이벤트 해주려고?
시끄럽다고!
1일로 해.
어?
오늘부터 다시 1일로 하자며. 그러자고.
…….
너 지금 얼굴 진짜 빨간 거 알아?
츠키시마의 놀림 섞인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입술을 비죽거리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이내 츠키시마와 손을 잡고 있어 혼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시 맞잡은 손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다시 츠키시마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런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던 츠키시마는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작게 쿡쿡대며 웃었다. 웃지 마. 이제 맘대로 웃지도 못하게 하네, 무서워서 말 꺼내겠어? 츠키시마와 카게야마의 투닥거림이 고요한 길을 계속해서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 쓸데없는 다툼 속에서 카게야마가 놓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빨갛게 잘 익은 얼굴이 비단 카게야마의 얼굴인 것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환한 달빛이 붉게 물든 츠키시마의 얼굴을 ―카게야마가 미처 보지 못한―, 카게야마의 귀 끝을, 맞잡은 손을, 둘의 앞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오늘따라 참 둥글고 환한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