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밙님 ; 소매에 노을이 졌다.
샤리에스님 ; 그건 내가 아니야.
덱님 ; 끝없이 이어지는 구름을 눈으로 쫓으며 생각에 빠져.
이나스님 ; 숨 쉬는 것이 괴로워졌다.
위의 네 문장을 이용해서 쓴 조각글입니다.
카게야마는 최근 들어 제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카게야마는 이런 것에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고,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정말이지 문득이었다. 카게야마는 그저 ‘주말에 뭘 하고 지냈나요?’라고 상냥하게 물어오는 여선생에 말에 혼자서 조용히 주말에 제가 한 일들을 정리하려 했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주말에 뭘 했더라.
그러나 기억은 듬성듬성 비어있었다. 이상하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저 딱히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넘길 뿐이었다.
그 후로도 기억이 사라지는 일은 잦았다. 저는 보낸 적도 없는 메일이 휴대전화에 남아있다거나, 정신을 차려보니 야심한 밤에 낯선 길을 걷고 있다거나 하는 일까지 벌어지기 시작했다. 몽유병이라도 생겼나? 카게야마는 슬슬 진지하게 제 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니미가 카게야마를 피하기 시작한 것 역시 카게야마의 몸이 이상해진 시점과 비슷한 시기였다.
카게야마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쿠니미는 카게야마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한 번 흘낏 쳐다보고는 못 들은 척 서둘러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아무리 메일을 보내 봐도 답은 오지 않았고, 전화를 걸어도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자동 안내음만 계속해서 들려올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기억나는 마지막 기억까지도 그저 여느 때처럼 쿠니미와 통화를 하고, 손을 잡고, 늦은 저녁 시간의 한적한 공원을 걸으며 평화롭게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답은 하나였다. 아마도 기억이 없는 사이에 제가 무언가 또 저지른 것이 뻔했다. 결국 카게야마는 직접 부딪치는 길을 택했다. 그것 말고는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평소처럼 저를 피해 지나치려는 쿠니미의 손목을 붙잡은 것은 카게야마였다. 쿠니미는 그대로 멈춰서서 돌아보지도, 손을 내빼지도 않았다. 깊은 한숨을 뱉어낼 뿐이었다.
먼저들 가.
쿠니미는 저와 함께 하교하던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만히 제게 손목을 잡힌 채로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그런 쿠니미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제가 생각해온 말들을 밖으로 뱉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서 멍하니 제가 붙든 쿠니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흰 와이셔츠 소매에 붉고 뜨거운 노을이 져있었다. 마치 물감이 묻어 얼룩이라도 진 것처럼.
뭐 해.
정신이 든 건 쿠니미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카게야마는 번쩍 고개를 들며 저도 모르게 쿠니미의 손목을 놓았다. 쿠니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쿠니미의 얼굴에는 피곤함, 짜증과 같은 것들만이 서려있었다. 카게야마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것들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심해보여도 나름대로 저를 따스하게 보던 눈길, 미미하게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 그런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할 말도 없으면서 왜 붙들었어?
…….
먼저 헤어지자고 해놓고서 왜 이러는 건데.
……어?
오이카와 선배나 만나러 가. 괜히 오해 사게 이러지 말고.
카게야마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리를 뜨려는 쿠니미의 손목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다시 붙들었다.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다. 쿠니미는 아까 전보다도 더 노골적인 불쾌함을 얼굴에 가득 드러내고 카게야마를 쳐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악의가 잔뜩 어린 그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혀 카게야마의 손을 쳐내지 않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손에서 제 손목을 강하게 비틀어 빼내었다. 그 덕에 카게야마는 균형을 잃어 넘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바로 세우고 떨리는 목소리를 입 밖으로 횡설수설 뱉어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는, 나는, 전혀…
너는 몰라도 나는 진심이었어, 카게야마.
……쿠니미.
오이카와 선배랑 잘 안되기라도 했어? 다시 나한테 얼쩡거리게.
…….
기억 안나? 네가 했던 말들 다시 해줘?
쿠니미는 일그러진 얼굴로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새하얬다. 내게는 너와 행복했던 기억밖에 없는데, 너는 대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걸까. 나는 모르는 기억을 너는 어떤 식으로 가지고 있을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슬프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좋다고. 나랑 사귄 건 그냥 그 사람 관심 좀 끌어보려는 수작이었는데 슬슬 잘될 것 같으니까 헤어져달라고.
…….
내 입으로 말하게 만드니까 속이 시원해?
그건,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말을 뱉었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건 내가 아니야.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게 정말 자신일 리가 없다. 그런 말을 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건 내가 아니야, 절대로.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라는 것이 카게야마를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쿠니미는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니야. 카게야마는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다. 쿠니미에게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다시는,
…….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마.
…….
…아직도 좋아하니까.
쿠니미는 마지막 말과 동시에 입술을 꾹 깨물고 급하게 뒤를 돌았다. 카게야마는 그런 쿠니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손을 뻗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아니야.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이곳에 온전히 저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카게야마는 쓰러지듯 땅에 주저앉았다. 거의 다 저물어가는 햇빛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땅을 비추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자줏빛에 가까운 석양에 잔뜩 펼쳐진 구름들이 빠르게 하늘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끝없이 이어지는 구름을 눈으로 쫓으며 생각에 빠졌다.
나는 종종 기억이 없다. 그리고 기억이 없는 동안의 나는 원래의 나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인다. 마치 나를 망가뜨리려는 것처럼. 내 진짜 인생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그 무언가는 나를 이 인생에서 밀어내고 싶어 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래. 나를 밀어내고 제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처럼.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차갑고도 따가운 공기가 가득 들어와 폐를 부풀렸다. 카게야마는 그 상태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갑작스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그것은 날카롭고도 단단한 뼈가 박힌 생각이었다.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을 겨우 들어 간신히 모아 쥐고 그대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멈추었던 숨을 다시 뱉어내었다.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아마도, 아마, 아마도 나는, 내 안엔…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내가. 나를 끌어 내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싶어 하는 내가. 기회를 노려 점점 제가 활동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내가. 카게야마는 몸을 움츠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들켰네.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아.
숨 쉬는 것이 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