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부 이름이 나오기 전에 적었던 글입니다.. 그래서 글에 이름이 없어요 ^^;
세터라는 포지션은 특별하다. 다른 포지션들과는 다르게 한 팀에 딱 하나 뿐이며, 세터의 특성에 따라 팀의 플레이 스타일이 완벽하게 뒤집힌다. 나는 늘 내 포지션을 사랑했다. 팀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는 에이스에게 멋진 토스를 올리는 것, 언제나 최적의 토스를 올려줄 거라고 동료들에게 신뢰받는 것, 내가 올려준 토스를 통해 강력한 1점을 따내는 것.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내게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나는 이 팀에서 신뢰받는 세터였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언제부턴가 우시지마 선배가 내게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이름을 꺼내기 시작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 카게야마에게 패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주 독선적인 세터였다. 그의 팀은 딱딱했고, 팀이라기보다는 능력 좋은 폭군과 그를 억지로 따르는 신하들이라는 느낌이었다. 후에 그의 별명이 '코트 위의 왕'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딱 내가 받았던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패배의 충격은 더더욱 큰 것이었다. 키타카와 제 1 중학교는 굳이 카게야마가 아니더라도 명문팀이었지만 그가 이끄는 팀의 분위기를 보았을 때 당연히 와해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졌다. 25-10, 25-13. 처참한 패배였다.
우시지마 선배가 카게야마의 이름을 꺼내기 시작하면서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경기를 관람하러 가는 길이 잦아졌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점 주위로부터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을 듣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는 점점 궁금해졌다. 사실은 오래 전부터 궁금했지만 그 치졸한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억지로 눌러놓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시지마 선배가 나 이외의 다른 세터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그리고 하필이면 그 세터가 '카게야마 토비오'라는 것이 조금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결국 배구 선수로서의 원초적 호기심을 누르지는 못 했다.
정말이지 궁금했다. 내가 아는 카게야마는 우시지마 선배가 좋아하는 플레이 스타일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세터였다. 우시지마 선배는 세터에게 항상 다른 동료들을, 특히 에이스를 중점에 두고서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것을 따랐다. 그랬기에 이 시라토리자와의 레귤러를 따낼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카게야마는 그 '신뢰'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우시지마 선배가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결국 내 치졸한 감정을 누르고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었다. 우시지마 선배는 이렇게 말했었다.
카게야마 토비오, 그 녀석이 중학생이던 시절의 경기를 본 적이 있었다. 천재적이긴 했지만 신뢰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이었어.
그런데 최근에 그 녀석이 진학한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변했던데.
그리고 나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경기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기억하는 카게야마 토비오는 없었다. 새로운 사람이 하나 서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뜻모를 감정이 마구잡이로 범람하는 것을 느꼈다. 우시지마 선배는 집중해서 카게야마가 지휘하는 카라스노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우시지마 선배는 어쩐지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 자리를 뺏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겨우 쌓아올린 내 자리를 카게야마 토비오에게 다시 뺏기는 기분. 카게야마 토비오는 내 존재조차 모를테지만 그랬다. 그 절망감이 차오름과 동시에 나는 점점 내가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기묘한 엑스터시였다. 나는 지금 그에게 나를 투영하고 있는가? 천재적인 세터를 보는 것은 고통이자, 쾌감이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을 보는 데에 대한 고통, 그리고 내가 결코 해낼 수 없을 능력을 보는 데에 대한 쾌감. 그리고 궁금해졌다. 신뢰의 '신'자도 모를 것 같았던 녀석이 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배울 수 있게 된 걸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고작 몇 개월, 그 짧은 기간동안 무엇을 어떻게 배운 걸까. 어린 폭군 정도로만 봤던 카게야마 토비오에 대한 생각이 완벽하게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우시지마 선배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도 채 하지 못한 채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과 동시에 코트로 뛰어 내려갔다. 이건, 이 흥분은, 도저히,
“카게야마 토비오.”
나를 알 리가 없었지만 나는 무작정 그의 이름을 불러 제꼈다. 카게야마는 땀을 닦던 수건을 목에 걸고서 제 이름이 불린 쪽을,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담긴 것은 순수한 열정이었다. 나는 왜 저걸 알지 못 했나? 패배감에 가려져 알지 못 했나, 혹은 그가 이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나.
“아, 시라토리자와의 세터…”
나를 알고 있어. 그런 생각이 들자 가슴이 요동쳤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까? 이 마음속에 꽁꽁 들어찬 혼잡하고 못난 것들을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까?
나는 물끄러미 카게야마 토비오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