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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쿠로] 얼룩

팥_ 2014. 8. 30. 23:47




동페 서비스에리어에 배포하였던 글입니다.

가져가주신 분들 전부 감사합니다!





   카라스노의 경기는 무난하게 이기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음껏 자신 있게 토스를 쏘아올리고, 각종 화려한 개인기를 구사하는 제 애인을 멀찍이서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을 무렵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쿠로오는 시선을 돌렸다. 흰색과 민트색이 섞인 져지,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 그 등에는 영어로 적힌 학교 이름이… 아오바죠사이. 쿠로오는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제 예상이 맞다면 저 남자는 아마도, 거기까지 생각한 쿠로오는 슬쩍 돌아본 점수판이 24-17인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향해 내려갔다. 갈색머리의 남자가 저를 돌아보는 것도 같았지만 자신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쿠로오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계단을 다 내려가 체육관 바닥을 밟았다. 

  마침 시합이 끝난 건지 쿠로오가 일층에 도착함과 동시에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쿠로오는 벽 쪽에 기대서서 흐뭇한 미소로 카게야마를 지켜보았다. 카게야마는 기쁜 듯한 얼굴로 동료들에게 사랑이 담긴―아마도―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지기도, 둔탁한 소리가 날 정도로 등을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 표정만은 여실히도 기뻐 보여 쿠로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어차피 저와는 곧 만날 터이니 조금 더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기를 바랐다. 

  물병과 수건을 건네받고 수건으로 한차례 얼굴의 땀을 닦고 난 카게야마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눈 마주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쿠로오가 기댔던 몸을 세우고 주머니에 꽂아 넣었던 손을 빼서 가볍게 흔들었다. 확실히 카게야마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던 이유가 저 때문이 맞았는지 카게야마는 곧 흰 수건을 목에 걸고 쿠로오 쪽을 향해 달려왔다.

  “말도 없이 언제 왔어요?”
  “경기하는 거 보고 싶어서 왔지. 이긴 거 축하해.”

  그렇게 말한 쿠로오가 열기로 벌겋게 달아오른 카게야마의 뺨을 살짝 꼬집어 흔들자 카게야마는 인상을 찡그리고 쿠로오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아 내리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런 카게야마의 반응에 쿠로오는 웃으면서 이번에는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쳐내지 않는 모습에 쿠로오는 슬슬 손을 움직여 머리를 문질거리다가, 쓸어넘기기도 하고, 그대로 손을 옆으로 옮겨 말랑한 귀를 만지작거리려는 찰나―

  “토비오쨩? 이 사람이 그 새 애인이야?”

  갑자기 들려온 밝은 목소리에 쿠로오도, 카게야마도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멀리서 환한 얼굴로 걸어오는 그 갈색머리의 남자, 카게야마의 옛 애인이자 아오바죠사이의 주장이며 미야기 현 내 최고의 세터라고 불리는… 쿠로오는 기억을 더듬어 남자의 이름을 찾아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세에 쿠로오는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카게야마의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이카와는 쿠로오와 카게야마의 앞까지 거침없이 걸어와 웃는 얼굴로 카게야마의 머리를 헤집어댈 뿐이었다. 카게야마의 손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결국 제 머리로 올라가진 않았다. 쿠로오는 오이카와를 노려보던 시선을 슬쩍 내려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잘게 떨고 있었다. 그 몸뚱어리를 둘러싼 것은 아마도, 불안감이었다. 뭐가 불안한 건데. 쿠로오는 못마땅해졌다. 이 둘의 끝이 썩 좋지 않았던 걸 알았기 때문에.

  시작은 카게야마의 고백이었고, 이별은 오이카와의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정말 뜬금없게도.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웃으면서 ‘헤어지자.’고 말했더랬다. 그 너무나도 평화로운 모습에 카게야마는 차마 어떤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애초에 먼저 좋아한 것도 자신이었고, 이 관계를 애써 유지시키고 있는 것도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는 가끔씩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카게야마를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 불안해하는 카게야마를 보며 절로 저까지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그토록 가슴 깊이 좋아했던 옛 애인을 보고 아직도 불안해하는 제 애인에게, 저는 어쩌면 좋은가.

  “토비오, 내 얼굴 보고 좋아했던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네?”

  쿠로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었다. 마치 쿠로오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카게야마의 머리를 살살 만지작대면서도 저 들으라고 말하는 꼴이 짜증나기 짝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머리 위의 손을 쳐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제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례잖아요,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가 딱딱하게 말하며 그제야 제 머리 위에서 오이카와의 손을 치워냈다. 순순히 손을 내려놓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오이카와는 얌전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곤 카게야마를 향해있던 오이카와의 시선이 천천히 위를 향해 올라왔다. 쿠로오는 어째서 카게야마가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있었는지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그들의 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의 문제였다. 오이카와의 생글거리는 웃음 속에는 날카롭고 매서운 칼이 숨어있었다. 

  “우리 토비오가 좀 애 같아서 고생이 많겠어요?”

  카게야마가 떨리는 눈으로 연신 오이카와와 쿠로오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쿠로오는 험악하게 구겼던 얼굴을 펴고 웃으며 오이카와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오이카와가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생글거리는 웃음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시선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일이라면 저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곧 오이카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까 전보다도 환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해달라고 아주 온 몸으로 보챌 텐데. 그 쪽은 도쿄 산다면서요? 그럼 장거리 연애라서 더 그러지 않아요? 보고싶다고도, 안아달라고도, 키스해달라고도,”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의 서슬퍼런 낮은 부름에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카게야마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있었지만 오이카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제가 무슨 짓이라도 했냐는 듯 여유로운 얼굴로 카게야마를 돌아볼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주먹을 꾹 쥐고서 오이카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슬쩍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주먹을 덮었다. 순간 오이카와의 시선도, 카게야마의 시선도 쿠로오를 향했다. 쿠로오는 오이카와 못지않게 여유로운 웃음을 얼굴에 올리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졌다.

  “그래서 좋은 거죠. 좋아하는 사람이 더 좋아해달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오이카와는 대답이 없었다.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손을 살짝 잡아 끌었다.

  “그럼 저희는 바빠서 이만. 저 쪽에 그 쪽 팬들 잔뜩 몰려있던데 그 쪽에나 가보세요, 세터양반.”

  쿠로오는 마지막까지 웃으며 말하곤 카게야마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뒤로 돌렸다. 붙들린 손에 가해진 힘이 어느 때보다도 강한 기분에 카게야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쿠로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쿠로오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를 대할 때 지어보였던 웃음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체육관의 구석까지 향하고서야 비로소 카게야마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쿠로오 씨. …저 사람 원래 저런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 속 들쑤셔놓고 반응 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작아져갔다. 쿠로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 정도는 알고 있었다. 척 봐도 상대가 어떤 성향인 지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쿠로오가 신경 쓰이는 것은 다른 점이었다. 오이카와를 보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카게야마나, 그의 주위를 감돌던 불안감이나, 잘게 떨리던 그의 몸뚱어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쿠로오는 단 한 번도 제게 먼저 보고 싶다는 말도, 안아달라는 말도, 키스해달라는 말도 한 적이 없는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오이카와가 만났던 카게야마는 누구였을까. 제가 만나고 있는 카게야마는 누구일까. 둘 중 어느 쪽이 카게야마의 진심일까?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초조한 얼굴을 하고 쿠로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쿠로오는 천천히 카게야마를 보며 웃어주었다.

  “이따 밥이나 먹자. 뭐 먹으러 갈래? 카레?”

  쿠로오의 말에 카게야마는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근처에 돼지고기 카레 진짜 잘하는 집이 있…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말끄러미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야 보이는 듯했다. 



  오이카와가 새기고 간 얼룩.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얼룩. 그것들이 카게야마에게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쿠로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