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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카게] 한여름 밤의 꿈

팥_ 2014. 8. 9. 22:43





  “카게야마!”


  낯선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카게야마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제 3 체육관의 문틈 사이로 빼쭉 솟은 검은 인영이 카게야마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제법 환해진 얼굴로 그 인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빛이 체육관의 입구를 비춰 그제야 검은 인영의 제대로 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카게야마는 그 실루엣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제멋대로 솟은 머리에 충분히 장신인 카게야마보다도 훨씬 큰 키. 카게야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네코마 고등학교 배구부 주장, 쿠로오 테츠로였다.


  “어디 체육관인지도 말 안 하고 그냥 체육관이라고만 하면 제가 어떻게 알아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쿠로오의 앞에 다가선 카게야마는 주먹을 뻗어 가볍게 쿠로오의 명치를 가격했다. 주먹이 조금 세게 들어간 건지, 혹은 엄살을 부리는 건지 허리를 숙여 배를 움켜쥐던 쿠로오가 곧 웃으며 허리를 세우곤 카게야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서 쿠로오가 걸어가는 대로 이끌려 체육관의 안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체육관은 천장 부근에 창문이 많이 뚫려있어서인지 생각보다는 밝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낮에 봤을 때와는 또 새롭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체육관을 살피던 카게야마가 곧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구석으로 발을 돌렸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연습을 하고서 뒷정리를 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지 배구공 하나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카게야마는 허리를 숙여 배구공을 주워들었다.


  “직전까지도 연습해놓고는 또 배구공이야?”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쿠로오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건 말건 카게야마는 개의치 않고 공을 들어 가볍게 오버토스로 공을 던졌다 잡았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공이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몇 번 반복됐을까, 슬슬 지겨워진 쿠로오가 삐딱하게 서서는 입가에 손을 가져가 크게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데이트 좀 합시다, 카게야마 군.’ 이라는 말을 뱉기 위해 다시 카게야마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쿠로오는 저를 향해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배구공을 볼 수 있었다. 어쭈? 짧게 혀를 찬 쿠로오는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으며 짧은 도움닫기와 함께 높게 뛰어올랐다. 휘두른 손바닥이 제대로 공에 맞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공은 저 멀리 체육관의 반대편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크게 튀었다가 빠르게 굴러 다른 쪽 구석에 박혔다.


  “안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조건반사지 뭐. 왜, 안 봐줘서 삐졌어요?”

  “시끄러워요.”


  그렇게 툴툴댄 카게야마는 몇 걸음 걸어가 달빛이 훤히 드리워진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열대야가 지속되는 후덥지근한 여름밤이었지만 체육관의 바닥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만 했다. 차가운 기운이 천천히 등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느낌에 카게야마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곧 제 옆에 인기척이 느껴져 한 쪽 눈을 슬쩍 떠보았을 땐 카게야마의 옆에 따라 누운 쿠로오가 몸을 옆으로 돌려 한 쪽 팔을 세워 머리를 받치곤 카게야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있던 카게야마는 그런 쿠로오를 따라서 쿠로오의 얼굴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쿠로오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살짝 고개를 들어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카게야마를 내려다보고 있던 쿠로오가 머리를 받치지 않은 반대쪽 손을 가져와 카게야마의 머리를 느리게 쓸어 넘겼다. 


  “다른 애들은?”

  “다 자요. 그러니까 나왔지. 히나타가 알았으면 아마 ‘지금 혼자 연습하러 가는 거야 카게야마?! 나도 데려가!’ 하면서 길길이 날뛰고 난리도 아니었을 테고요. 네코마 사람들은요?”

  “켄마가 깨어있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 안 써도 되는 녀석이니까. 며칠 전에 새 게임을 산 모양이야. 그거 하느라 정신이 없더라고.”


  말을 마친 쿠로오가 제가 쓸어 넘긴 탓에 훤히 드러난 카게야마의 동그란 이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동그란 모양샌데 달빛까지 받으니 정말로 하늘에 뜬 달이 지상으로 내려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 쿠로오가 킥킥 웃자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려 잡고 있는 쿠로오의 손을 내리려고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쉬며 쿠로오의 손에서 제 손을 떼어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는 여름방학을 맞아 네코마 고등학교에서 초청을 받아 특별 합동 합숙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카게야마가 처음 합숙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우카이를 통해서도, 타케다를 통해서도 아닌 바로 쿠로오를 통해서였다. 갑자기 쿠로오에게서 느낌표가 잔뜩 찍힌 메시지가 도착해 이게 뭔가 싶어서 뭐하는 짓이냐고 답장을 보내려는데 곧이어 흥분에 가득한 메시지가 한 통 더 도착해 카게야마는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우리학교랑 너네학교 합숙한대 대박’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던 쿠로오와 카게야마로서는 희대의 희소식이 아닐 수 없는 소식이었다. 그 만만치 않은 교통비에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메시지와 영상 통화만으로 애틋한 연애를 하며 실제로 만나서 보고 싶다는 마음은 꾹꾹 눌러담아 감추고만 있었는데, 공식적인 행사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물론 네코마 고등학교와 일주일 동안 함께 연습을 하며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들뜰만한 일이었지만, 거기에 몇 달째 만나지 못한 연인까지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카게야마는 그날 부로 제 달력의 날짜를 합숙일까지 하나 하나 지워나갔다.


  그러나 생각만큼 둘이 붙어있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얼굴을 보고나니 어떻게 붙어서 손이라도 잡고 싶고, 포옹이라도 하고 싶어진 게 문제였다. 거기에 쿠로오는 팀의 주장인지라 개인 시간을 낼 틈이 더더욱 없었고, 카게야마 역시 칭얼대는 히나타를 받아주며 끝없는 연습 상대를 해주고 있었기에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합숙 마지막 날의 전날 밤, 이대로 가다간 기껏 만나서 끝까지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 초조해진 쿠로오가 카게야마에게 먼저 뜬금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 지금 체육관인데. 올래?’


  평소의 카게야마였다면 밤엔 푹 자고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며 거절했을 메시지였지만 카게야마 역시 쿠로오를 제대로 만나고 싶기도 했고, 또 다음 날은 마지막 날이니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카게야마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갈게요. 옆에서 대자로 뻗어 잠든 히나타의 얼굴 위로 몇 번 휙휙 손짓을 해보아도 깰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카게야마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렇게 향한 곳이 지금 이곳이었다.


  “합숙 어땠어? 힘들었지?”

  “확실히… 강도가 세긴 셌어요. 하지만 이런 것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면서 최고가 되겠다는 말을 입에 올릴 수는 없잖아요.”

  “역시 카게야마.”

  “힘들었지만 꽤 많은 걸 얻기도 했고, 나름 재미도 있었고… 무엇보다 쿠로오 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 마지막 말에 쿠로오는 잠시 몸을 멈칫하더니 곧 카게야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던 카게야마는 천천히 팔을 뻗어 쿠로오의 등에 얹고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이를 재우는 어머니와도 같은 행동에 킥킥 웃던 쿠로오가 몸은 여전히 카게야마를 끌어안은 상태 그대로 얼굴만 슬쩍 빼내어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네?”


  웃던 얼굴을 금세 굳히고 제 이름을 불러오는 탓에 카게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도 없이 쿠로오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입술에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달빛 아래로 드러난 카게야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쿠로오는 다시 장난스레 웃으며 카게야마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전학 와라. 응?”

  “…실없는 소리 하지 마요.”


  낮게 속삭이는 쿠로오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대며 대답했다. 어울리지 않게 눈꼬리를 늘어뜨린 쿠로오가 투정을 부리듯 카게야마의 이마에 맞댄 제 이마를 부비적거렸다. 


  “너 보고 싶어서 연습도 못하겠고.”

  “그건 집중력의 문제예요.”

  “배구공만 봐도 꼭 네 얼굴 같고.”

  “요즘 헛 걸 보시나 봐요.”

  “이렇게 미운 말만 하고.”

  “제가 언제 그랬…!”


  카게야마는 결국 마지막 말을 마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파고든 쿠로오의 입술이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집어 삼켰기 때문이었다. 짧게 훔치듯 스쳤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쿠로오가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혀를 내어 카게야마의 입술을 핥고, 또 아프지 않을 정도로 이를 세워 물어댔다. 도록도록 눈동자를 굴리던 카게야마는 쿠로오를 안은 팔에 조금 힘을 주면서 천천히 눈을 감고 입술을 열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열리자마자 쿠로오의 혀가 조금 거칠다 싶을 정도로 입안을 휘저으며 파고들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쿠로오의 혀를 찾아 서툴게 혀를 움직였다. 쿠로오는 꼭 카게야마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정신없이 혀를 옭아맸고, 뜨거운 숨까지도 전부 들이쉬었다. 채 맞물리지 못한 틈새로 카게야마의 신음소리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슬슬 벅차다고 생각할 무렵 카게야마가 쿠로오의 등을 두드리자 쿠로오는 결코 입술을 떼어내고 싶지는 않은지 속도를 줄여 아까보다는 느린 속도로 카게야마의 혀를 간질였다. 결국 정말로 숨이 차오르는 지경이 돼서야 카게야마가 다급하게 쿠로오를 밀어냈고 그제야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끝까지 아쉬움을 표출하려는지 카게야마의 입술을 핥아대긴 했지만. 


  겨우 공기를 맛볼 수 있게 된 카게야마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차갑다고 느껴진 체육관의 바닥이 어느새 뜨겁게 달아올랐다. 체육관의 바닥이 뜨거운 것인지 제 몸이 뜨거운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됐건 뜨겁고, 눅눅하며, 끕끕한 공기가 카게야마를 둘러싸고 있었다. 평상시의 밤과 비슷한 기후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은 불쾌하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묻은 번질번질한 타액을 본능적으로 혀를 내밀어 핥았다.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야 계속해서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시선에 응해줄 여력이 생긴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시합 때만큼, 혹은 시합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쿠로오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얼굴에서 풍겨지는 위압감에 꿀꺽 침을 삼켰다. 


  “카게야마.”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진동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쿠로오를 바라보기만 했다. 


  “좋아해.”


  그 목소리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진지했고, 또 뜨거웠다. 쿠로오를 올려다보던 카게야마가 슬쩍 고개를 숙이더니 제 눈앞에 바로 보이는 쿠로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쿠로오의 몸이 움찔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뜨거웠다. 그 뜨거움에 얼굴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쿵쿵. 크고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이 가뜩이나 뜨거운 이 몸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쿠로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심장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묘한 향이 났다. 여름 밤의 냄새. 그리고 아마도 이건… 쿠로오의 향. 제가 맡고 있는 그 냄새가 쿠로오 본연의 체취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자 카게야마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혹여나 잔뜩 붉어진 제 얼굴이 보일까 쿠로오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준 카게야마가 더욱 깊게 얼굴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요.”

  “…….”

  “저도 좋아해요.”


  동시에 카게야마의 동그란 머리에 크고 따뜻한 손이 얹어졌다. 규칙적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그것은 순식간에 카게야마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체육관의 바닥, 따스한 손길, 심장 고동, 좋아하는 것들의 냄새,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카게야마를 감싸안았다. 이것은 아마도… 


  아마도 한여름 밤의 꿈, 꿈과도 같은 그런 연애.









#하이큐_글_전력_60분

주제 ; 합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