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q/글

[쿠로카게] 따뜻한 향기

팥_ 2014. 7. 21. 02:36





  “분명 여기다 놨는데…”


  콧등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기 직전인 안경을 간신히 추켜올려가면서 카게야마는 정신없이 책꽂이의 책들을 뒤집어엎었다. 마감기한이 코앞에 닥친 기획안에 들어갈 아이디어를 잔뜩 메모해두었던 수첩이 사라진 탓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카게야마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이젠 수첩이 있을 리가 없을 옷장의 문까지 열어가며 그야말로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버리긴 아깝지만 잘 입지 않는 옷들을 모아두어 열일이 거의 없는 옷상자까지 열었을 때 카게야마는 수첩을 찾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동작을 멈췄다.


  “…….”


  카게야마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빛이 바랜 붉은색 져지였다. 카게야마보다 한 치수 큰 사이즈의 져지. 분명 카게야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져지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주 잘.


* * *


  “내 져지 못 봤어?”


  웬만해선 카게야마가 일찍 일어나지 않는 휴일 아침, 그런 카게야마를 깨운 것은 쿠로오의 목소리였다. 아침부터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쿵쿵 울려댄다 싶더니. 카게야마는 잠이 덜 깬 눈을 꿈뻑거리며 멍하니 저를 붙잡고 있는 쿠로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져지…. 뭔가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아직 침대에 묻혀있는 뇌는 도통 기억을 끄집어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으며 다시 이불을 끌어안고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일어나 잠탱아.”


  그런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은 쿠로오가 이제 막 일어난지라 평소보다 부어오른 카게야마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숨을 내쉰 카게야마는 제가 졌다는 듯 몸을 돌리곤 제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쿠로오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모양새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쿠로오가 카게야마의 허리에 제 팔을 둘러 받치자 카게야마는 허리를 세워 방금 전 입맞춤에 화답하듯 쿠로오의 입술에 제 입술을 짧게 붙였다 떼었다. 


  “가만히 있던 져지는 왜요?”


  이불을 몸에 두른 후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놓인 슬리퍼에 발을 꿴 카게야마가 눈을 비비며 묻자 쿠로오는 가뜩이나 엉망으로 헝클어진 제 머리를 한 번 더 헝클어트리며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어제 우리 옷 다 버렸잖아. 그래서 빨래부터 하고 밥 하려고 했거든. 티셔츠는 세탁기에 이미 돌렸으니 위에 져지라도 걸치고 밥 하려고 했더니만 져지가 안 보여서. 어제 분명 바닥에 벗어놓지 않았나?”

  “어제 그 난리를 피웠는데 얌전히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한 카게야마의 볼이 살짝 달아올라 있는 것을 발견한 쿠로오는 찡그렸던 인상을 펴곤 웃으며 카게야마의 볼에 제 손을 가져다대었다.


  “너 볼 뜨거워, 카게야마.”

  “아 몰라요. 제가 찾고 있을 테니까 선배가 밥해요.”


  옆에 놓인 베개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쿠로오의 품에 던진 카게야마가 등을 돌려 침대의 매트리스를 들어가며 뒤지기 시작하자 쿠로오는 웃으며 그런 카게야마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곤 방을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선배 탓인데. 어젯밤 정신없이 옷을 벗어 던지며 저를 침대에 눕히던 쿠로오가 생각나 카게야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갑자기 눌린 초인종에 누구세요라 물었고, 택배라는 대답에 저는 시킨 것이 없지만 부모님이 보낸 건가 싶어 문을 열었을 뿐인데. 그 곳엔 떡하니 익숙한 얼굴이 서있었다. 안녕 자기, 부모님 안 들어오신다며? 라는 익살스러운 인사말에 카게야마는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쿠로오의 품에 파묻혔고 입술이 먹히는가 싶더니 그 후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대에 누워 쿠로오의 허리에 제 다리를 두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세 번을 사정하고 나자 그제야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든 카게야마가 낑낑대며 쿠로오를 밀어냈을 땐 이미 침대고, 널브러진 옷들이고 정액범벅이 된 후였다.


  져지를 어디다가 뒀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머릿속에서 조차 빨간 져지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으, 모르겠다. 쿠로오의 져지를 찾는 것을 포기한 카게야마는 새 티셔츠를 꺼내 입고서 이불을 들어 욕조로 옮겨 물을 받았다. 물을 받아놓고 부엌으로 나서자 맨 몸에 드로즈 하나만 입은 쿠로오가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지 바쁘게 프라이팬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밖으로 나온 카게야마가 조용히 쿠로오의 뒤쪽까지 걸어가 조심스럽게 허리에 팔을 둘렀다. 프라이팬을 움직이고 있던 쿠로오의 손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곧 쿠로오가 카게야마에게 안긴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져지 못 찾아서 애교라도 부리는 거야?”

  “그건 아니고, 져지 없는 것도 좋구나 싶어서요.”


  그렇게 말한 카게야마가 쿠로오의 가슴에 살짝 얼굴을 묻었다. 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몸을 타고 제 심장까지 균일하게 전해졌다. 따뜻하면서도 익숙한 향기가 났다. 인위적인 향이 아니라 쿠로오 자체에서 나는 본연의 향이었다. 카게야마는 이 향이 참 좋았다. 따뜻한 사람에게서 날 것 같은 향이라고 생각했다.


  “변태 카게야마.”

  “선배만 하겠어요?”


  고개를 들어 저를 째려보는 카게야마의 얼굴에 쿠로오가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카게야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향이 전해지는 느낌이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집에 여분 져지 있죠? 내가 나중에 찾아서 줄게요.”

  “그렇긴 한데, 귀찮잖아. 멀기도 멀고.”

  “부모님 안 계실 때 말해요. 나도 져지 핑계로 선배네 집이나 쳐들어가보게.”


  그 말에 쿠로오는 잠시 굳어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나 싶더니 빠르게 팔을 뻗어 가스레인지의 손잡이를 잡아 돌려 불을 껐다. 그리곤 미처 카게야마가 말릴 새도 없이 카게야마를 번쩍 안아들어 식탁에 올려놓고 카게야마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부모님 언제 오신대?”

  “…저녁에요.”

  “밥은 이따가 먹자.”


  그대로 카게야마의 배에 머리를 묻은 쿠로오를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고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좋을, 그런 행복한 날이었다.


* * *


  한숨을 쉰 카게야마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놓은 후, 져지를 들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다. 그렇게 찾아도 안 나오더니. 이사 갈 때조차 안 나오길래 버릴 짐들에 섞여 버려진 줄 알았건만 이런 곳에 섞여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후로 결국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집에 가보지 못했다. 가볼 수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돌려 침대 위에 널브러진 붉은색 져지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오후, 도쿄의 한 고등학교 배구부가 버스를 타고 원정을 떠나던 중 전복사고를 당했습니다. 현재까지 추정된 사망자는 세 명으로… 십 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마치 어제 일처럼 아나운서의 음성이 생생하게 귓가에 들려왔다. 환청에 불과한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환청이 잦아들었을 무렵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귀에서 손을 떼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티지 못한 채로 거의 기다시피 침대로 향해 올려진 져지를 그러쥐었다. 동시에 떨리는 손으로 인터넷 뉴스를 찾아 사망자 명단을 클릭해보던 십 년 전의 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쿠로오 테츠로. 정확하게 쓰여 있는 그 이름에 카게야마는 곧장 휴대전화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여성의 안내 멘트만 수도 없이 흘러나왔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그 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한 번도 애써 떠올리려 한 적은 없었지만, 날 때부터 지녔던 것처럼 이미 자연스럽게 기억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는 손이 하얘지도록 쥔 져지를 품에 끌어안았다. 십 년이나 지났으니 잊고 살만도 하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당신을 지웠다. 억지로 그의 흔적을 전부 버렸고, 억지로 배구를 그만뒀고, 억지로 공부를 했고, 억지로 취업을 했고, 억지로 바쁘게 살았다. 몸을 혹사시키고 또 혹사시켜서 생각이란 것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이 시점에 나타난 그의 져지는 마치 카게야마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쿠로오와 찍은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저에게 그렇게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데에는 그런 이유밖에 없을 거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여 져지에 얼굴을 묻었다. 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져지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따뜻한 향기. 그 익숙하고도 아릿한 냄새에 천천히 카게야마의 어깨가 흔들려왔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쿠로오의 져지가 지금 나타난 이유를. 그것은 저를 비웃는 것도, 질책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포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