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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팥_ 2014. 7. 17. 02:53


  사각사각. 그것은 벌레가 종이를 갉아먹는 소리도, 풀잎을 갉아먹는 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 네가 나를 갉아먹는 소리. 나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작은 네가 내 발밑에서 천천히, 천천히 나를 갉아먹으며 올라오고 있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해본다. 너는 나를 갉아먹고 자랄 것이다. 네가 자라면 자랄수록 나를 갉아먹는 그 속도는 무서운 기세로 빨라질 것이고, 끝내 나를 통째로 삼켜낼 것이다. 나는, 잡아먹히고 싶지 않았다. 네게 먹히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각사각. 열심히 나를 갉아대던 네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뿌리를 뽑아버리면 된다. 저것이 자라 나를 삼켜낼 것이라면, 자라기 전에 내 손으로 해치우면 되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너를 바라보다 처음으로 너를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거기 있는 거 심심하지 않아, 토비오쨩? 윗 세상이 어떤지 궁금할 것 같은데. 나는 네게 두 팔을 벌려보았다. 우물거리며 나를 뜯어먹던 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그대로 작은 너의 여린 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미처 삼켜지지 못한 나의 조각이 네 입에서 튀어나왔다. 손가락 아래에서 생명이 펄떡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손에 힘을 줄수록 그 목덜미는 격렬하게 날뛰어댔다. 네 입에서 죽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윽, 피할 새도 없이 그것은 거의 갉아먹혀 발목 아래로는 남지 않은 내 오른다리로 쏟아져 내렸다.


  역겨운 냄새가 났다. 쏟아져 내린 그것은 저들끼리 뭉쳐 스멀스멀 내 발목을 향하더니 곧 발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아, 역시 너를 죽이는 게 내가 살아나는 길이었나 봐. 나는 웃으며 네게 말했다. 미친 듯이 펄떡이던 생명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약해지는 생명의 울림과 더불어 네 입에서 최후의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 역시 내 오른다리로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손 안에서 힘없이 늘어진 너를 바닥으로 내던지곤 다시 제 모양을 갖춘 내 오른발을 살펴보았다. 


  다시 뛸 수 있을까? 터질듯이 뛰는 심장을 안고 나는 오른발을 세워 발가락을 가볍게 땅에 부딪쳐보았다. 아, 단말마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닥에 늘어진 너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바닥에 늘어져있을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던 오른발이 형체를 잃고 산산 조각나 가루가 된 채로 바닥에 쌓여있었다. 균형을 잃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내팽개친 네 옆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무릎아래의 다리가 전부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흐트러졌다.


  하하. 낯선 웃음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라진 다리 덕에 균형을 잃은 몸뚱어리가 비틀대다 네 옆에 쓰러졌다. 쓰러진 내 눈에 네 얼굴이 온전하게 담겼다. 아래부터 천천히 부서져가는 몸의 감각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들어와 퍼져나갔다. 허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목으로 진행되는 침식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공생관계였다. 네가 내 몸을 뺏어가 갉아먹고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내 몸을 내어준 것이었다. 네가 나를 갉아먹음으로써 내가 살아갈 수 있었다. 네가 자라면서 내뿜는 그 에너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지금, 그 에너지가 사라져 나또한 사라지기 직전에 깨달은 것이다.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너를 죽이길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