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부는 우시지마와 함께 느리게 옮기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갑자기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선 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우시지마는 물끄러미 시라부와 여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고 시라부는 그런 우시지마의 시선에 당황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교복으로 보아 그녀는 3학년이었고, 당연히 우시지마 쪽에 볼 일이 있는 줄로만 알았더니 우시지마의 반응으로 보아 모르는 상대인 듯했다. 하지만 시라부 자신도 모르는 상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라부는 조심스레 우시지마를 바라보았지만 우시지마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똑바로 시라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로 나에게 볼일이 있었던 건가, 시라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여자를 마주보았다. 여자는 시라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전부터 좋아했어, 시라부.”
“……네?”
“좋아해.”
“……따로 둘이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여자가 뱉어낸 말은 생각보다도 훨씬 뜬금없는 말이라 시라부는 괜히 넥타이를 매만지며 우시지마를 힐끗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여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라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여기서 말할까요?”
시라부는 여자와 우시지마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여자의 시선이 잠시동안 우시지마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시라부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내 마음에 당당하니까 상관없어.”
시라부는 목을 죄어 매는 넥타이를 조금 헐렁하게 풀고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로 받은 고백이었다. 시라부는 혀를 내어 가볍게 입술을 축였다.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절을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받아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니 최대한 단호하게 거절을 해야 했지만 그녀들의 눈에서 자신이 보인 탓일까, 흘러 들어오는 마음을 쳐내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시라부가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한참동안 말을 고르는 동안 여자는 흔들림 하나 없이 시라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시라부가 그녀에게 고백한 것처럼 보일 법할 정도였다.
“……미안합니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라부는 간신히 뱉어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동자에 저와 함께 우시지마가 비쳐 보였기 때문일까, 혹은 제 옆에 우시지마가 서있기 때문일까, 시라부의 입술이 제 멋대로 다른 말들을 만들어냈다.
“저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쓸데없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꽁꽁 묶어 저 아래에 감춰두었던 욕구가 아주 미묘한 자극 하나에 반응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고백해오는 여자들을 보며 시라부가 느낀 감정은 딱 두 가지였다. 미안함, 그리고 부러움.
“이미 다른 사람이 정복한 지 오래거든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부러울 수가 있을까. 시라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시라부는 조금 전 자신의 마음에 당당하다 말하던 여자를 떠올렸다. 시라부가 가장 원하는 일이면서도 평생 하지 못할 일이었다. 거리낌 없이 상대에 대한 감정을 표출하고 그 감정에 대해 떳떳해하는 것. 시라부는 자신의 마음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숨고 싶어졌다. 제 마음이 그에게, 그리고 팀에게 오점을 남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고결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에게 제 마음은 찌든 얼룩에 불과했다. 시라부는 언제나 모든 것을 억누르는 게 습관이었다.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도, 그의 단단한 손을 잡고 싶은 마음도, 오만가지 짐이 내려앉은 등을 안아보고 싶은 마음도.
“틈이 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여자는 살짝 눈썹을 들썩였다. 시라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먹을 쥔 손 옆으로 다른 온기가 계속해서 스쳤다.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손이었다. 제가 높게 올린 평범한 공을 총알로 만들어주는 손. 시라부는 우시지마가 손가락에 테이프를 감을 때 옆에서 몰래 훔쳐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척 보기에도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온통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그 손이 지금, 언제든지 마음만 먹는다면 곧장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하지만 시라부는 끝내 주먹을 펴지 못했다.
“……그럴 일이 있다면 정복이란 말을 쓰지도 않았겠죠.”
시라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군.”
여자가 돌아간 후 우시지마와 함께 걷는 길은 마치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머리 위에 뜬 한낮의 태양이 무섭게 내리쬐고 있었고, 침묵은 목에 엉겨 붙어 숨통을 죄어왔다. 그러니 우시지마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을 때 시라부가 소스라치게 놀란 건 그다지 별난 일이 아니었다. 시라부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시지마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시라부는 다시 땅을 바라보았다. 아마 별 의미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늘 그랬으니까.
“……좀 됐어요.”
“언제부터?”
우시지마의 물음에 시라부는 입을 다물었다. 곤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물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시라부는 곰곰이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로 자신을 전부 채운 후였다. 그렇다면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요.”
그의 옆에 서겠다고 결심하게 된 그 날부터. 그건 운명처럼 자신을 찾아왔고, 제게 속삭였다. 너는 저 사람을 따라가야 해.
“그렇게 오래 좋아했으면 고백해보는 것도 좋지 않나.”
“……저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시라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빛을 받은 그의 머리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높은 곳에 뜬 태양처럼.
“정복당했다고 말할 정도라면,”
우시지마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시라부는 우시지마를 따라 걸음을 멈추었지만 우시지마는 시라부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시라부는 그런 사실은 염두에도 없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우시지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 말과 함께 우시지마는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시라부는 발을 내딛지 못했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우시지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하얗게 질린 손만 계속해서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했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던 우시지마는 잠시 후에야 시라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바라보았다. 시라부는 축축하게 젖어오는 손을 급하게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빠르게 발을 움직여 우시지마가 멈춰선 곳으로 걸어갔다. 그 짧은 시간동안 몇 번이나 다리가 꼬이고 발을 헛디뎠는지 시라부는 셀 수조차 없었다.
“보통 그렇게 다른 사람을 ‘정복’까지 해놓고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시라부가 제 옆까지 다가오자 우시지마는 그제야 다시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라부는 계속해서 손을 꿈틀대며 고개를 숙이고 우시지마의 걸음 속도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그런가요.”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제가 답할 수 있는 말은 저런 모호한 문장뿐이었다. 우시지마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작게 바람이 되어 살갗을 간질였다. 시라부는 자꾸만 경련하는 입을 움직여 간신히 침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침이 불길처럼 뜨거웠다.
“보통은 그렇겠지.”
우시지마가 다시 걸음을 멈췄을 때야 시라부는 고개를 들어 교사로 들어가는 문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학년 교실은 1층에 있었기에 우시지마는 이대로 교실로 들어가면 됐고, 저는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늘 헤어지는 갈림길인데도 오늘은 이상하게 제가 선 이곳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갈림길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사람도 네가 정복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시라부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난간을 잡았을 때, 우시지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 차분하게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시라부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가득 주고 힘겹게 고개를 돌려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네게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시지마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흔들어보이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마치 슬로우 액션과도 같은 동작이었다.
“……우시지마 선배!”
시라부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으며 우시지마를 불렀다. 손끝에 닿는 손의 감촉은 몇 십 번을 훔쳐보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단단하고, 뜨겁고, 서럽도록 사랑스러웠다. 그의 손은 그가 걸어온 모든 시간을 담고 있었다. 시라부는 지금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단순히 우시지마의 손이 아님을 알았다. 제가 쥐고 있는 건 우시지마의 전부였다. 이렇게나 쉽게 잡을 수 있는 손이었는데. 시라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가득 메워왔다. 우시지마는 천천히 뒤를 바라보았다. 시라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눈동자에 한 가득 우시지마만을 담고서. 열린 문으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뜨거운 바람이었다. 우시지마는 목덜미를 훑는 눅진한 바람을 느끼며 조심스레 벙긋거리는 시라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건, 고작 목소리 따위로 담을 수 없는 침묵 같은 고백이었다.
#우시른_전력60분
주제 ; 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