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친구들이랑 약속 있댔지?
“응? 아…… 응.”
- 설마 총각파티 같은 거라도 해?
“……내가 그런 걸 할 것 같냐.”
세미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대꾸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말대로 주위에서 농담처럼 이제 곧 결혼인데 한 번 실컷 놀아야하지 않겠냐는 말들이 종종 흘러들어왔지만 그런 저속한 문화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 왜, 어차피 좋아서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넌 좀,”
- 우리 둘만 있는데 뭐 어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는데 한 번쯤 그렇게 진탕 놀고 오는 것도 좋지 않아? 나 결혼하고 나서는 용서 안 해줄 거거든.
“그러는 넌. 오늘 그렇게 놀고 오게?”
그녀는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었다. 이 결혼에 쓸데없는 감성을 억지로 끼워 넣지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생의 큰 터닝 포인트들 중 하나다. 묘한 기분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내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연인 행세와, 내일부터 해야 하는 부부 행세는 확실히 다르다. 세미는 그것이 조금 두려웠다.
- 감히 세미 가문에 시집갈 여자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오늘 하루 집에 틀어박혀서 금식할 거야. 내일 드레스 입어야지.
“넌 안 그래도 충분히 말랐어.”
- 오늘 왜 이렇게 서비스가 좋아? 역시 수상하네. 세미 가문 도련님인 거 안 들키게 잘 숨기고나 다녀. 혹시 뭐 하나라도 잘못 흘렸다간 자기나 나나 골치 아파져.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 이제 나갈 거라서 끊는다. 너 괜히 굶다가 내일 쓰러진다. 적당히 밥 챙겨 먹고 푹 쉬다 일찍 자.”
세미는 잔소리와도 비슷한 말을 뱉어낸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세미는 한숨을 내쉬며 액정이 검게 변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원래부터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그녀에게 오늘처럼 감정적으로 대응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세미는 조금 전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평소라면 충분히 대충 넘겼을 말을 오늘은 괜히 예민하게 받아친 것 같았다. 왜일까. 찔려서? 물론 총각파티 같은 천박한 계획은 세우려고 한 적도 없다. 다만……
세미는 입술을 깨물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결혼을 앞둔 새 신랑의 얼굴이라기엔 얼굴 곳곳 어둠이 가득했다. 주변 사람들이 얼굴이 왜 그러냐는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좀 멀쩡해 보였으면 싶어서 나름 신경을 써봤지만 전부 부질없는 일이었다. 세미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두어 번 마른세수를 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눈을 덮은 손바닥 너머로 아른거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세미는 제 아래에서 달뜬 숨을 내뱉는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옛 연인이라 표현하는 게 맞겠지.
“아으…… 아, 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자 싶어서 잡은 약속이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박 앞에선 아무래도 더 이상 만나기는 무리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것이 끝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우리가 멍청했으면 싶었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별다른 대화 없이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자주 가던 디저트 전문점에 가서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마저도 묵직한 내용은 아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시트가 더 부드럽네요.’ ‘응, 그렇네.’와 같은 소소한 대화들일 뿐이었다. 디저트를 먹은 후에는 서점에 갔다. 시라부가 책을 고르는 동안 세미는 가만히 옆에 서서 그가 책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라부는 좀처럼 고르기가 힘든 건지 신간 코너에 진열된 책들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세미는 그런 시라부에게 책 한 권을 집어 건넸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시라부는 세미가 건네준 책을 받아 들고는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그리고는 한 번 훑어보지도 않고서 그대로 계산대로 향했다.
서점을 나와서는 근처에 자리한 호수공원으로 향해 호숫가를 따라 걸었다. 걸을 때마다 스치듯 부딪치는 손에 세미는 자연스럽게 시라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시라부는 세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어왔다. 세미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잠시 제 손에 얽힌 손을 내려다보다가, 힘을 주어 맞잡았다. 그리 따뜻하지 않은 손이 서서히 따뜻해져갔다.
“후으, 으, 아, 세, 미이…… 씨, 으응, 아아……”
저녁을 먹었다. 스테이크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시라부는 그다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깨작대며 천천히 고기를 삼켰다. 세미는 좋아하는 와인을 한 병 시켰다. 시라부는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와인 한 잔 정도는 곧잘 마셨다. 그렇게 시라부는 한 잔을 조금씩 나눠 마셨고 남은 와인은 세미가 전부 비웠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지금 이곳, 자주 오던 호텔이었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 세미는 조금의 이성도 남겨놓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했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오늘은 결혼식 전 날이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신부가 아니었다. 이제는 과거가 될 연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안아보고 싶었지만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자중하려 했는데.
세미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진한 향기가 코끝을 맴 돌았다. 등을 파고드는 짧은 손톱이 오늘따라 아팠다.
“집…… 중, 해요……”
시라부의 속삭임에 세미는 저를 올려다보는 연한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안엔 자신이 가득했다.
“……이니까.”
입술을 달싹이며 내뱉은 목소리는 간신히 뒷부분만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미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그가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오늘 하루 종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았다. 차마 제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준 시라부에게 감사하고 미안했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인데, 짊어지는 건 전부 너구나. 세미는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나만, 보고……”
“응, 알겠어.”
세미는 자신의 등을 긁어내리는 시라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아까 전 호숫가에서 시라부가 자신에게 먼저 해왔던 것처럼 천천히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너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 세미는 시라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의 몸 위로 납작하게 자신을 붙여 끌어안았다. 공기가 새어나갈 틈 하나 없이, 모든 것이 그를 향할 수 있도록.
“세미 씨.”
살짝 구겨진 셔츠에 팔을 끼워 넣던 시라부가 세미를 불렀다. 세미는 시라부에게 답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사람처럼 대답 없이 그의 뒷모습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라부의 움직임에 따라 천이 사락사락 움직이는 것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시라부는 애초에 대답 같은 건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요.”
“…….”
세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시라부가 이렇게 확실하게 못 박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반발심이 들었다. 분명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본인에게서 확실히 거리를 두는 말을 들어버리니 괜한 반항심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무슨 애도 아니고. 우스웠지만 자꾸만 억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라부는 이제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주워 천천히 올려 입고 있었다. 세미는 그 손길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몇 번을 봐도 아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내 이름도, 얼굴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들도, 전부 다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게까지 말 안 해도 알아서 하려고 했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오늘 밤이 지나면 전부 정리했을 텐데. 기왕이면 조금 더 아름답게 마무리를 짓고 싶었던 게 솔직한 마음이자 욕심이었다. 세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바지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던 시라부의 몸이 그대로 멈춰있었다.
“아뇨, 당신은 못 해요.”
다시 느리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시라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러터진 사람이잖아요. 기껏 나 떠나서 다른 사람이랑 결혼까지 하는데 처신 잘 해야죠. 이혼 당하지 않게 잘 해요. 나랑 지냈던 기억들은 전부 잊어버리고 그 사람한테만 충실해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지만 세미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시라부의 말은 전부 옳았다. 시라부는 한 걸음 뒤에 서서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리는 판단들은 전부 냉철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옳은 것들뿐이었다. 시라부는 세미를 훤히 꿰고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세미는 주먹을 꾹 쥐었다. 내가 이렇게나 한심한 사람이었나 싶었다. 한심하고, 애처로웠다. 불쌍한 사람. 그 말이 딱이었다.
“이제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
대충 옷가지를 갖춰 입은 시라부가 정사 후에 처음으로 뒤를 돌아 세미를 바라보았다. 세미는 흠칫 몸을 떨었지만 시라부는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올곧게 세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게 식어버린 눈동자 안엔 여전히 제가 가득했다.
“내가 당신 몫까지 사랑할게요.”
“…….”
“나는 집에서 결혼하라고 재촉하지도 않으니까 평생 이렇게 살아도 문제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평생 대신, 당신이 내게 주었을 몫까지 전부 사랑할게요. 나는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굳이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애타게 나를 그리워하고, 떠올리고, 추억할 필요 없어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잘 해요. 나한테 했던 것보다 더. 그러면 되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으니까.”
세미는 더 이상 꼿꼿하게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발을 잘못 내딛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시라부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시라부는 여전히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미는 제가 담긴 눈동자 위로 차오르는 눈물을 보았다.
“내일 식은 못 가요.”
짊어지는 건 전부 너였다. 너는 언제나 강했다. 내가 흔들릴 때에도 너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나는 무심코 너에게 또 모든 걸 떠넘기고, 그래서,
“축의금은 카와니시 편에 보낼 거예요.”
나는 그래서 이번에도 네가 괜찮을 거라고, 무심결에 생각해버린 거다. 모질게 구는 너를 원망하고, 조금만 더 이상적이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철없이 생각해버린 거다.
사실 너는 나보다도 여린 사람이었는데.
“그것까진 이해해 줘요. 나도 사람이,”
시라부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실패한 듯한 표정으로 세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미는 시라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서 그대로 뛰어들어 그를 품에 안았다. 세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라부 역시 끊긴 말을 이으려들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몸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미는 천천히 자신보다 조금 작은 등 위로 제 팔을 올렸다. 그러자 그제야 굳어있던 몸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방울방울 눈물로 흩어져갔다. 흩어져버린 것들이 한 방울이라도 흘러나가 사라져버릴까 세미는 그를 가득 끌어안고 단단하게 버텼다. 흐느낌 속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만 고요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