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같은 거예요.”
시라부는 종종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낫잖아요.”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언젠간 나아요.”
시라부는 늘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시라부의 가치관을 존중했지만 언제나 한 곳만을 바라보는 그가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감히 시라부에게 무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아이가 품은 감정은 내가 가벼이 입에 올릴 것이 아니었다.
시라부가 팀원들 중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나’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기에 관한 대화라면 단연 와카토시겠지만, 시라부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언제나 벽을 하나 두르고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라부는 이상하게도 내게는 스스럼없이 저에 대한 말들을 꺼내왔다. 얼마나 스스럼이 없었냐면, 팀의 주장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얘기 까지도 식사 중에 툭하고 뱉어낼 정도였다. 나는 그날 시라부의 얼굴에 그대로 라멘 국물을 뱉어낼 뻔한 것을 간신히 밀어 삼키다 호되게 사레에 들리고 말았었다. 우시지마 선배를 좋아하고 있어요.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30초쯤이었던 것 같다. 시라부는 마치 ‘오늘 저녁엔 규동을 먹을 거예요.’라는 말을 하는 얼굴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시라부의 시선은 언제나 와카토시를 향해있었다. 그야말로 언제나, 와카토시와 한 공간에 있을 때면 항상.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강절임을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왜요, 이상한가요?’ 하고 말하는 시라부에게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고백은 안 해요.’ 이어진 시라부의 말에 나는 그제야 이 아이가 품은 감정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슴 깊은 곳부터 뜨거운 응어리가 차올랐다. 나는 어쩐지 ‘상담하기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종종 짝사랑에 관련된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어떻게 고백해야 좋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지만 시라부가 내게 고백한 것은, 거대한 마음에서 비롯된 체념이었다.
“감기는 약이라도 있지.”
내가 작게 중얼거리기라도 하면 시라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안다는 듯 살짝 웃어보였다. 확실히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낸 와카토시와 다르게 시라부는 모든 방면에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머쓱해진 내가 괜히 고개를 숙이고 먹지도 않을 락교를 뒤적거리자 곧 시라부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러다 내성이라도 생기면 희망고문밖에 더 되나요.”
나는 락교를 뒤적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시라부는 어느 새 젓가락을 내려놓고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엔 언제부터 내리고 있었을지 모를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오네.”
시라부의 우동 그릇엔 면이 반 이상 남아 있었지만 시라부는 더 이상 손을 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는 혹시나 하고 아침에 챙겼던 작은 우산을 떠올리며 시라부에게 물었다.
“우산 가져 왔어?”
“……아니요.”
시라부는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그럼 같이 쓰고 가자, 라고 내가 입을 떼려는 찰나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던 시라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시지마 선배, 분명 공원에서 연습한다고 했었죠.”
“어, 아마도?”
“집에 다녀와야겠어요.”
“집? 왜? 나 우산 있,”
하지만 시라부의 귀에는 이미 내 목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는지 붙잡을 새도 없이 출입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곧, 문 옆의 창문들로 빗줄기를 헤치고 뛰어가는 시라부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후에야 정신을 차린 나는 급하게 가방을 들고 뒤따라나갔지만 이미 시라부는 점처럼 보일 정도로 멀어진 상태였다. 빗줄기는 조금 사이에 더 굵어져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방 속에 들어있던 우산을 펼쳤다. 묵직한 빗줄기가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그 후로 나는 시라부에게 집에 잘 들어갔냐는 내용의 라인을 보냈지만 시라부에게선 답이 오지 않았다. 읽었다는 확인 표시조차 뜨지 않았지만 원래 휴대폰을 잘 확인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다며 후회하게 된 건 주말이 지난 후의 월요일이었다.
시라부가 감기에 걸려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는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멍하니 그 날의 시라부를 떠올렸다. 그저 ‘우시지마 선배’의 이야기를 하며 무작정 그 거친 빗속을 뛰어가던 작은 뒷모습을 떠올렸다. 시라부는 전에도 꽤 심한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모두에게 감추고 부활동에 나올 정도로 악착같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는 건 독감 수준의 감기인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와카토시를 바라보았다. 와카토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그 특유의 얼굴로 감독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병 뒤에 얼마나 큰 마음이 담겨있는지 너는 알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라부의 집이 어디지?”
나보다 한 걸음 빨리 옷을 갈아입은 와카토시가 내게 물어온 것은 시라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놀라 잠시 동안 모든 행동을 멈추고 있다가 뒤늦게 마저 티셔츠를 꿰어 입었다.
“왜?”
“아무래도 나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 같다.”
와카토시의 얼굴은 미묘하게 심각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오늘 연습 내내 어딘가 불편해보이던 와카토시를 떠올렸다. 그저 늘 호흡을 맞추던 시라부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공원에서 연습을 하다 비가 쏟아져서 정자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시라부가 우산을 들고 달려왔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온통 젖은 차림으로 헐떡대면서 왔어. 아무래도 그 날 비에 맞은 것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싶어서 사과라도 할 겸 집에 가보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집 주소를 모르더군.”
너는 시라부와 자주 만나는 것 같으니 왠지 알 것 같아서… 나는 멍하니 이어지는 와카토시의 말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끊고서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와카토시는 무슨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나도 걱정 되던 참이었거든.”
“…….”
“……같이 갈래?”
마치 내가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와카토시는 한 동안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그 덕에 괜히 마른 입술을 축여야만 했다. 그리고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짧은 순간이 지난 뒤 와카토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라부?”
시라부의 어머님을 만나 나와 와카토시는 시라부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내 목소리에 시라부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나는 급하게 달려가 그런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시라부의 흰 얼굴은 온통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가에서 흩어지는 숨결마저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선배, 어떻게…”
그리고 나는 천천히 커지는 시라부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옅은 눈동자에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와카토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라부. 나 때문에 감기에 걸린 건가?”
“아… 아니… 아니에요……”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상황이건 돌려 말할 줄을 모른다니까. 나는 손을 뻗어 시라부의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었다. 머리카락까지 열이 오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언제부터 아팠어?”
“…그 날 바로요.”
멍하니 와카토시를 바라보고 있던 시라부가 어떻게 내 목소리는 들은 건지 내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와카토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사흘이나 지났네.”
“…….”
“감기 참 안 낫지?”
내 말에 시라부는 와카토시에게서 눈동자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옅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시라부의 머리를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와카토시를 향해 살짝 손짓하자 그는 그제야 아,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시라부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시라부의 목젖이 느리게 꿈틀대는 것을 보며 둘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나 때문에 괜한 짓을 했군.”
“……그런 거 아닙니다. 팀의 에이스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저는 감기에 걸려도 세미 선배가 대신해줄 수 있지만 선배는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건 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는 와카토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살짝 열린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저 말이 시라부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주는 지 와카토시는 알까. 아니, 몰라도 됐다.
“나는 마실 것 좀 사올게.”
헛기침 후에 내가 뱉어낸 목소리에 시라부가 황급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나는 웃으며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역시 감기는 낫는 게 아니라 정복하는 거지. 나는 차마 시라부에게 해주지 못했던 말을 떠올렸다. 손에 맴돌던 시라부의 뜨거운 열기가 어느새 따뜻하게 변해있었다. 나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 살짝 주먹을 쥐었다. 다음 시라부와의 식사에선 ‘어떻게 고백하면 좋을까요?’라는 질문이 들려오기를 바라며,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우시른_전력60분
주제 ; 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