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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카게]

팥_ 2015. 2. 2. 02:27




  - 짜증나요.


  쿠로오는 하마터면 포크로 찍어 든 핫케이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익숙한 연인의 목소리는 확실히 조금 짜증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쿠로오와의 통화에서 이런 식으로 직접적인 불만을 표출한 것은 처음이라 쿠로오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카게야마에게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카게야마는 잠시간 답이 없었다. 또 그 10번 녀석이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쿠로오는 애꿎은 핫케이크 조각을 메이플 시럽에 범벅을 하다시피 문지르며 초조하게 카게야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게야마는 보통 쿠로오에게 직접적으로 제 감정을 표출하는 일이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무슨 일이 있어도 아니라며 숨기는 카게야마의 기색을 쿠로오가 먼저 읽어내고 어르고 달래서 캐물어야만 간신히 카게야마의 진솔한 답을 들을 수 있곤 했다. 그런 카게야마가 오늘은 다짜고짜 통화 초반부터 저런 말을 하니 쿠로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조용히 한숨을 뱉어냈다. 


  - ……별 건 아닌데.

  “별 거 아닌데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

  - …아니에요, 그냥, 음,

  “애태우지 말고 빨리. 싸웠어?”


  그런 게 아니라… 카게야마는 여전히 우물우물 뒷말을 흐릴 뿐이었다. 쿠로오는 슬슬 초조해졌지만 닦달한다고 해서 쉽게 입을 열 카게야마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침착하게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메이플 시럽에 범벅이 된 핫케이크 조각을 입 안에 넣은 쿠로오는 금세 얼굴을 찌푸리며 뱉어냈다. 거의 시럽 덩어리 수준이잖아.


  - ……싫어서요.

  “어, 뭐?”


  쿠로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는 찰나 휴대전화 너머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너무 작아서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라 쿠로오는 급하게 되물었다.


  - ……제가 미야기에 사는 게 싫어서요.


  카게야마는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여전히 작은 목소리에, 망설임과 머뭇거림이 가득해 발음이 뭉개진 말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쿠로오는 입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갑자기 왜? 카게야마는 다시 말이 없었다. 


  - 쿠로오 씨는 도쿄에 살잖아요.


  쿠로오는 잠시 카게야마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살짝 굴려보아야 했다. 카게야마의 화법은 늘 저런 식이었다. 제 딴에는 논리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동문서답과도 같은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쿠로오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특히 카게야마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기에 그런 카게야마의 말들을 대체로 빠르게 알아듣곤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쿠로오는 찌푸렸던 얼굴을 느리게 펴며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렇지만 아직 카게야마에게 자신이 이해한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귀 끝을 붉게 물들인 채로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휴대전화를 꼭 쥐고서 힘겹게 웅얼거리는 말을 뱉어내고 있을 카게야마가 눈앞에 선했다. 쿠로오는 웃으며, 그러나 절대 휴대전화 너머로는 제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도록 연기하며 카게야마에게 대답했다. 그게 뭐? 카게야마의 한숨이 작게 들리는 것도 같았다.


  - 요즘 사와무라 선배가 연애를 해요.

  “뭐? 걔가?”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법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사와무라 다이치의 연애 소식이 갑자기 화두로 올라올 줄은 몰랐다. 쿠로오는 자세를 바로 고치고 휴대전화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 네. 같은 학교 선배인데… 매일 만나요. 아, 당연히 부활에 지장을 준다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시간이 날 때마다 얼굴 보고, 얘기하고, 하교 시간이 맞으면 같이 집에 가고 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사와무라 선배는 봄고 준비하랴, 다른 선배는 입시 준비하랴 잘 못 만나서 아쉬워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쿠로오는 그제야 카게야마가 어째서 사와무라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참 많이도 돌려 말하네.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하곤 카게야마가 짓고 있을 표정을 상상하며 입술을 느리게 매만졌다. 사실 카게야마는 본래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직구로 말하는 성격 탓에 다툼이 잦았다면 잦았을 것이다. 그런 카게야마가 돌려 말하는 경우는 보통 한 가지 경우였다. 부끄러울 때.


  “왜 짜증났는데?”

  - …….

  “응?”

  - ……다 아시면서, 지금,


  카게야마는 그제야 쿠로오가 진작 전부 눈치 채고서 저를 놀리기 위해 대화를 이어나갔다는 걸 깨달았는지 약간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응? 모르겠는데?”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걸 믿을 정도로 카게야마가 단순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국엔 있는 그대로 제 속내를 말해줄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쿠로오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역시나, 곧 카게야마의 뾰루퉁한 목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오기 시작했다.


  - 같은 지역에서 연애하는 다른 사람들은 거의 매일 같이 만나면서도 자주 못 본다고 하는데,


  한 번 터진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쿠로오는 입가에 웃음을 걸고서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차곡차곡 귓가에 담았다. 


  - 저랑 쿠로오 씨는 겨우 일주일에 한 번, 그나마 이건 지금 합동 연습 때문에 만날 수 있는 거고 봄고 예선 시작하면 만나지도 못하겠죠. 그리고 쿠로오 씨가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이제 합동 연습으로도 못 만나게 되잖아요. 그래서 짜증나요.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못 보니까…… 보고 싶은데…… 보고 싶어요…. 


  조금 힘이 실리나 싶던 목소리는 금세 힘을 잃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차마 그 중얼거림에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저런 식으로 투정부리듯 구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끝에서 묻어나오는 애틋함에 쿠로오는 어쩐지 가슴 한 켠이 뜨겁게 응어리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보고 싶어서 투정부리고, 답지 않게 짜증난다는 표현까지 하는 것이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뿐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분들이고 뭐고 당장 미야기 현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시무룩한 얼굴로, 휴대전화 하나를 붙들고서 저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제 연인에게 달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사람 여기 왔다며 말해주고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짜증났어?”


  쿠로오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 ……보고 싶은데 못 보니까요.


  카게야마는 여전히 시무룩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전에는 그저 가볍게, 그리고 뜬금없이 종종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던 카게야마였지만 이렇게 속상하다는 기운을 풀풀 풍기며 보고 싶다고 얘기한 것은 처음이라 쿠로오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이 연애를 하는 것을 보다 보니 괜히 싱숭생숭해졌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사와무라는 공개연애였고, 저와 카게야마는 비밀연애이니 어떻게 주변에 티도 못 내고 마음 구석에만 서러운 마음을 쌓아갔을 터였다. 쿠로오는 작게 혀를 찼다. 


  “내가 대학을 그 쪽으로 갈까?”

  - ……그건 싫어요.

  “왜?”

  - 쿠로오 씨 그 쪽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 들어왔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일부러 카게야마에게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지역의 문제나 장거리 연애의 문제, 그런 것들을 떠나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이기에 그저 확실해지고 난 후에 말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는 슬쩍 카게야마의 눈치를 살피듯 입을 다물었으나 카게야마는 쿠로오가 제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마음이 상했다거나 한 건 전혀 아닌 것처럼 보였다.


  - 히나타한테 들었어요.


  아아. 은근히 켄마랑 연락을 자주 한다 싶더니만 그런 얘기까지 한 건가. 쿠로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 근데 뭐 하러 여기로 와요. 저는 쿠로오 씨가 자기 일 포기하고 그런 건 싫어요. 

  “그래, 그래, 그냥 해본 소리야. 사실 정말로 그러고 싶긴 하지만, 뭐 어쨌든. 그럼 다른 방법으로 가자.”

  - 무슨 방법이요?


  쿠로오는 웃으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전국에서 만나.”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무엇보다도 진심을 담고 있었다. 카게야마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올해부터. 전국으로 와.”

  - 그럼 내년은요?


  내년에는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어쩐지 귓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내년에는 내가 관중석으로 갈테니까 전국으로 와.”

  - …….

  “왜, 전국으로 올 자신 없어?”

  - 그럴리가요!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씩씩대며 대답하는 것이 참 카게야마다웠다. 쿠로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씩씩대는 소리로 가득했던 휴대전화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을 깬 것은 조금 더 차분해진 카게야마의 목소리였다. 카게야마의 목소리엔 이제 침울함이라거나, 시무룩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어딘지 말끔해진 목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쿠로오는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가에 크게 웃음을 걸었다. 약간 뿌듯한 웃음처럼 보이기도 했다.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그런 점이 좋았다. 카게야마는 그 나이대의 아이처럼 사소한 것에 크게 고민하기도 하지만 제가 가야할 방향을 확실히 깨달았을 때는 그 누구보다도 주저 없이 발을 내딛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쉽게 내딛기 어려운 그 첫걸음을 카게야마는 늘 망설임 없이 내딛었다. 쿠로오는 그런 카게야마가 좋았다.


  - 어차피 쿠로오 씨가 아니어도 갈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 그러니까, 


  카게야마가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 쿠로오 씨도 와요. 전국으로.


  이 말에 담긴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가늠할 수 없었다. 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쿠로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당연하지.”


  제 말에 담긴 무게 역시 전부 전해지기를 바라며, 쿠로오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켰다. 저 말이 모든 것들을 대신해줄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다 대신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