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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ts카게보쿠] D-5

팥_ 2015. 2. 7. 23:54



150207 카게른 교류회에 배포하였던 글입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부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휴대전화를 열어보았다. 공식적인 휴식시간이니 자유롭게 휴대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괜히 히나타나 니시노야 같은 이들에게 들키면 누구랑 그렇게 메일을 주고 받냐며 난처하게 굴 것이 뻔했기에 카게야마는 최대한 휴대전화를 숨겨 몰래 그간 확인하지 못한 메일을 열어보았다. 발신인은 전부 같은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자꾸만 들썩이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조심스럽게 은근슬쩍 비품창고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창고의 구석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서서 작게 한숨을 내쉰 카게야마가 숨겼던 미소를 맘껏 얼굴에 드러내며 버튼을 조작해 메일함으로 들어가 천천히 받은 메일들을 읽어 내려갔다.

  

  점심 먹었어? 합숙이면 정말 힘들 테니까 꼭 든든하게 챙겨먹어라.

  아직도 쉬는 시간 안줘? 너무 스파르타네. 시간 나면 전화해.

  다른 학교 사내자식들 피해서 다녀. 너희 3학년 매니저랑 꼭 붙어 있고. 여자 매니저에 눈 먼 놈들 많을 거다. 네코마? 거기 주장 특히 조심해. 안 그래도 음흉하게 생겼는데 거기 매니저도 없다며. 분명 수작부릴 게 뻔해. 

  

  최대한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처럼 보였지만 메일 하나하나에 수많은 걱정이 담겨있다는 걸 카게야마는 읽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언제쯤 답장이 올까 초조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꼭 붙들고 있을 연인의 모습이 선했다. 카게야마는 받은 메일들을 잠시간 더 읽어 내리다가 얼굴 위로 몽실몽실 피어나는 웃음들을 감추지 못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쩐지 조금 길게 느껴지는 듯한 시간 속에서 여러 번의 신호음들이 울리고, 마침내 끊어진 신호음에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한껏 들뜬 목소리로 상대의 말이 들리기도 전에 이름을 소리쳤다.


  - 카게,

  “이와이즈미 선배!”


  좀처럼 듣기 힘든, 꽤나 들뜬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당황한 듯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곧 걱정과 안도, 그리고 쑥스러움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 이제 쉬는 시간이야?

  “네, 죄송해요. 조금 바빴어요. 저희 학교가 계속 지는 바람에 페널티를 하도 많이 받아서 부원들 챙기느라…”

  - 바쁜 거 다 아는데 죄송할 게 뭐 있어. 힘들 진 않고? 별일 없었어?

  “그럼요. 쿠로오 씨 근처에도 안 갔고요.”


  쿠로오? 하고 되물으려던 이와이즈미는 곧 말을 멈췄다. 아마 제가 말했던 네코마의 주장이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흠흠, 이와이즈미의 괜한 헛기침 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크게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소리를 죽여 웃었다. 


  - …그만 웃어. 근데 왜 이렇게 속삭여? 

  “아, 비품창고에서 전화 받는 중이긴 한데 혹시 몰라서요. 이와이즈미 선배는 근처에 오이카와 선배 안 계신가봐요?”

  - 어엉, 일부러 바깥에 벤치까지 나와서 받았지. 교실은 위험해.


  그제야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가 제 전화를 받는 데에 제법 시간이 걸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휴대전화 액정에 뜬 제 이름을 보고서 부랴부랴 교실 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고 1층쯤에 와서야 겨우 전화를 받았을 이와이즈미를 슬쩍 상상해보니 다시 웃음이 날 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휴대전화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잘 하셨어요. 그 사람, 아니, 그 선배가 알면 많이 골치 아프잖아요.”

  - 당연하지. 세상 모두가 알아도 걔는 안 돼.


  진심이 가득 담긴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웃으려다 말고 슬쩍 고개를 빼어 문 쪽을 쳐다보았다. 뭔가 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카게야마는 조금 더 고개를 길게 빼어 문가를 살폈지만 인기척은 없는 듯했다. 어쩐지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저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카게야마는 다시 이와이즈미와의 통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 왜 그래?

  “네? 왜요?”

  - 아니, 대답을 안 하길래.

  “아. 죄송해요. 뭔가 소리가 난 거 같아서 잠깐 살펴봤어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선배는 무슨 말씀 하셨는데요?”


  카게야마의 질문에 이와이즈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카게야마는 이번엔 휴대전화를 귀에 꼭 붙이고 몸을 돌려보았다. 자꾸만 왠지 모르게 꿈꿈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본다 하더라도 불을 켜지 않은 창고는 어두워 제대로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와이즈미 선배? 거기에 이와이즈미까지 대답이 없으니 괜히 고개를 드는 불안감에 카게야마는 살짝 초조한 목소리로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 …별 말은 아니고.

  이와이즈미는 한 번 크게 숨을 몰아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 보고 싶다고.


  카게야마는 초조한 듯 꼼질거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괜히 마음속에 켜켜이 끼던 음습한 불안감이 순식간에 맑게 걷혀진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와이즈미는 그런 남자였다.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안도감과 편안함을 주는 남자. 지금은 그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그 강직한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절대적인 진심으로 잘게 물결치던 마음의 얄팍한 껍질을 굳건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 …….

  “사실 평소에도 매일 같이 만나지는 못하는데 왠지 정말로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하니 훨씬 더 보고 싶고 그래요. 막 괜히 다시는 못 만날 것 같고…”

  “우와,”


  그리고 그 굳건해진 마음은 갑자기 들려온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에 크게 구겨져 다시 요동치고 마는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자기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와이즈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왔지만 카게야마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 뒤에 바짝 붙어 서서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얼굴도 아닌, 제대로 된 말을 나눠본 적은 없었지만 그 압도적인 존재감 덕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후쿠로우다니의 주장 보쿠토 코타로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카게야마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보쿠토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갔나 한참 찾았는데, 이런 데에 숨어서 연애 중?”


  보쿠토는 웃는 얼굴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카게야마의 얼굴 앞에 바싹 가져다대며 말했다. 그 숨 막히는 거리에 카게야마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뒤로 빼려 했으나 차가운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뒤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천진난만한 표정의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 카게야마?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휴대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방금 전보다 훨씬 딱딱해진 목소리로 조용히 카게야마를 불렀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려 했으나, 보쿠토가 한 발 더 빨랐다.


  “애인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런 거 아닌데요. 넘겨짚지 마세요.”

  “그래? 카라스노 애들한테 너희 1학년 매니저 어디 갔냐고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길래 내가 열심히 혼자 찾아서 온 건데? 아무도 모르게 이런 창고 구석에 숨어서 남자한테 보고 싶다는 소리 하고 있으면서 애인이 아니야? 응? 진짜 아니야? 정말?”


  보쿠토는 정신없이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갸웃거리며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었다. 단순히 짓궂은 성격의 3학년이 1학년 여자 후배를 괴롭히려 장난치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카게야마는 이 상황이 그런 단순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한가득 시뻘건 사이렌이 빙글빙글 돌며 울려 퍼졌다. 위험해.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웃고 있는 보쿠토에게서 그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험이 신호로 바뀌어 저릿하게 카게야마의 전신을 휘감았다.

 

  “…만약에 그렇다고 쳐도 제가 보쿠토 씨한테 대답해줄 이유는 없죠. 그래서, 절 왜 찾으셨는데요?”

  “으음, 카게야마는 매정하네.”

  “왜 찾으셨냐니까요.”

  - 무슨 일인데 그래, 어?


  한참동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 조용히 카게야마와 보쿠토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보쿠토의 제멋대로인 화술 덕분에 잊고 있던 이와이즈미와의 통화를 그의 목소리로 뒤늦게 떠올리곤 화들짝 놀라며 해명과도 비슷한 대답을 꺼내려 했다. 아마 생각보다 걱정이 많은 편인 제 연인은 지금쯤 심각하게 얼굴을 구기고서 주먹을 꾹 쥐고 정신없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걸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카게야마는 서둘러서 이와이즈미를 안심시키기 위한 해명을 하고 이 비품창고와 보쿠토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다. 


  “잠깐, 무슨…!”


  보쿠토가 카게야마의 양쪽 손목을 붙들고 순식간에 얼굴을 가까이 붙여오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한 휴대전화를 꼭 쥐고서 보쿠토의 손을 떨쳐내려 애를 썼지만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파이커의 힘을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이겨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버둥댈 수도 없는 게, 정말이지 보쿠토의 얼굴이 제 얼굴에 너무나도 가깝게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붙어있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조금만 움직였다간 그대로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카게야마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지만 보쿠토는 집요하게 그런 카게야마를 따라 다시 제 얼굴을 돌렸다. 


  “왜 찾았냐니,”


  카게야마! 휴대전화에서 이와이즈미가 소리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보쿠토는 그 소리를 듣고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그 특유의 웃음소리로 호탕하게 웃더니 휴대전화를 든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아 그의 귀에서 떨어뜨려 놓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멀리 뻗게 만들었다.


  “그야 마음에 드니까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그랬지!”


  그 당당한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뭐라 할 말도 잊은 얼굴로 멍하니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 말을 하고 있긴 한 거야?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음, 물론 애인이 있을 거란 건 생각하지 못한 변수지만,”


  보쿠토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지만 또 금세 얼굴 가득 자신만만한 웃음을 환히 띠며 말을 이었다.


  “상관없지 역시.”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고,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울려대던 사이렌이 미친 듯이 돌며 악을 쓰듯 경고음을 울려대고, 카게야마가 점점 하얗게 비어가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어떻게 해서든 보쿠토의 손에서 도망쳐보려고 애를 쓰던 찰나, 비품창고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보쿠토 선배, 여기 있어요?”


  카게야마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와중에 보쿠토가 아쉬운 듯 혀를 차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손목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던 힘이 순식간에 떨어져나간 것 역시 느꼈다. 온몸의 힘이 빠져 나가는 듯했다. 그 탓에 간신히 붙들고 있던 휴대전화마저 바닥으로 떨어지며 폴더가 닫혔지만 그것을 주울 정신조차 없었다.


  “이런데서 혼자 뭘……”

  “뭐 좀 찾고 나가려고 했어, 아카아시! 진짜야!”

  “…카라스노 1학년 매니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보쿠토와 같은 학교의 세터로 보쿠토보다 한 학년 아래인 아카아시 케이지였다.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지만 그 뒤에 있던 카게야마는 발견하지 못했던 건지 함께 있던 카게야마를 발견하고는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쿠토 선배. 다른 학교 1학년 괴롭히고 있었습니까? 그것도 여자 매니저?”

  “아카아시 지금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주장이 폐를 많이 끼쳤네요, 미안합니다. 제가 처리할 테니 카라스노 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보세요. 아까 그 쪽 주장이 찾는 것 같더군요. 이제 그만 나와요, 보쿠토 선배. 감독님한테 또 혼납니다.”


  아카아시는 카게야마에게 꾸벅 인사를 해보이곤 보쿠토의 팔을 잡아 거의 질질 끌고 가다시피 보쿠토를 데리고 나갔다. 카게야마는 간신히 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마지막 힘마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벽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떨어지던 찰나의 충격으로 배터리가 분리되어 땅에 나동그라진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무릎을 세워 모아 앉으며 힘없이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아카아시에게 손목을 잡혀 나가던 보쿠토가 마지막으로 제게 스치듯 속삭이던 입모양이 마치 동영상을 반복재생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눈앞에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아직 합숙 5일 남았어.

  

  이와이즈미 선배… 카게야마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이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며 세워 모은 무릎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