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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카게아카] 치킨게임

팥_ 2014. 12. 14. 22:37


퍄님 ; 꼭 그럴 필요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덱님 ; 웃음 속에는 날카롭고 매서운 칼이 숨어있었다.

열님 ; 어둠 속 당신 누구야?


위의 세 문장을 이용해서 쓴 조각글입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 앞에 쓰러져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고 있는, 나보다 조금 작은 형체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앞에 다리를 구부리고 앉았다. 내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그는 몸을 더욱 말아 웅크리며 나를 피했다.


  “카게야마.”


  그래. 꼭 때릴 필요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대답이 없는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잡아 올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내 손에 잡혀 들춰지자 일그러진 얼굴이 고스란히 나를 향해 드러났다. 퉁퉁 부어오른 한쪽 뺨과, 눈물이 고인 눈, 갈라지고 터져 피딱지가 얹힌 입술. 나는 머리카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들어 올렸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 지금 눈에 뵈는 거 없으니까.”

  “쿠니, 미…”

  “다시 한 번 물을 게. 그 사람 누구야?”


  오랜만에 일찍 퇴근하게 되어 카게야마의 체육관에 들러 함께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에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발을 돌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본 것은, 불이 다 꺼진 체육관에서 다른 부원들이라곤 한 명도 없이 어떤 남자와 함께 나오는 카게야마였다. 그 남자는 카게야마보다는 조금 더 큰 키로 저와 비슷한 정도이지 싶었다. 나는 핸들에 얼굴을 기대고 빤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속에 들어찬 것이 고스란히 내게 보이는 듯했다. 아마 카게야마만 몰랐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신나게, 남자를 따라 늦게까지 자율 연습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하고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남자의 손이 스멀스멀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기어 올라가는 것을. 나는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나와 둘의 앞에 섰다. 카게야마는 놀란 눈초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쿠니미? 카게야마의 어깨에 자리 잡았던 남자의 손이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자, 카게야마. 나는 남자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고 그대로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아 차로 끌었다. 카게야마는 당황한 얼굴로 뒤에 선 남자에게 ‘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며 나를 따라올 뿐이었다.

  이성은 말한다. 그 남자가 카게야마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던 카게야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역시 체육관 안에서 또한 아무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본능은 다르다.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카게야마를 얻었는데. 그 틈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 어떤 누구라도. 작은 틈조차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악착같이 꽁꽁 닫아 밀봉한 틈을 억지로 벌리는 것은 결국 카게야마였다. 카게야마는 자꾸만 신선한 바깥을 그리워했다. 나를 사랑하면서도 바깥을 그리워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며? 그렇다면 나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 사실 나는 카게야마에게서 배구를 뺏을 생각이었다. 맨 처음 카게야마는,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그러나 배구를 뺏긴 카게야마는 나날이 시들어갔다. 내 품안에서, 내 옷깃을 그러잡고 바깥의 것을 갈망했다. 결국 나는 그에게 약간의 틈을 선사했다. 사람이 들어오진 못할 정도의 작은 틈을.


  “아, 아카아시 선밴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전에 내가 부탁한 걸 가르쳐주신다고 하셔서 연습 조금 더 했을 뿐이야, 응?”


  아카아시. 아, 나는 명백히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 아마도 그는,


  “그 사람 세터잖아?”

  “으, 응, 맞아… 그래서 같이 연습을,”

  “넌 옛날부터 세터라면 사족을 못 썼지.”

  “…….”

  “오이카와 선배한테도 그랬고.”


  아, 아니, 아니야, 쿠니미, 그런 거 아니야… 

  필사적으로 더듬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그 절박한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과거를 떠올렸다. 카게야마의 옛 연인을 떠올렸다. 내가 그에게서 어떻게 카게야마를 가져왔는지 카게야마는 모를 것이다. 모르니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살아가겠지. 그리고 앞으로도 몰라야만 한다. 

  나는 내 손아귀에서 펄떡이던 생명력을 떠올렸다. 손에 힘을 주면 줄수록 요동치는 그 생명력은 잠들어있던 다른 나를 일깨워 꽤 거대한 쾌감을 불러 일으켰었다. 나는 그 쾌감을 떠올렸다. 그의 장례식장에서 가만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던 카게야마도 떠올렸다. 잘게 떨리던 그의 등을, 떠올렸다.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카게야마가 흠칫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높이 들어 올렸던 손을 조심스레 낮추고 카게야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바르르 떨리던 카게야마의 눈꺼풀이 살며시 열렸다. 드러난 검고 푸른 눈동자에 나는 내 눈을 맞추고 천천히 웃음을 지어보였다. 카게야마는 초점이 희미해진 눈으로 나를 마주했다. 나는 그것에 보답하듯 부드럽고 느리게, 한가득 사랑을 담아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카게야마.”

  “…….”

  “전화 해.”

  “…….”

  “아카아시 케이지한테.”


* * *


  아카아시 케이지는 굉장히 태연한 얼굴로 나와 카게야마의 앞에 앉아있었다. 카게야마는 마스크를 쓰고서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나는 천천히 아카아시 케이지를 머리부터 훑어 내렸다. 이 상황에 저렇게 태연한 얼굴을 할 수 있다니. 덤덤하고 한편으로는 서늘함까지 풍기는 얼굴에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아까 전 제 앞에서 후배를 끌고 간 남자와, 그 후배는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이 늦은 시간에 저를 불러낸 이 기묘하고 요상한 상황에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슨 일이야, 카게야마?”


  그가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눈에 띄게 몸을 떨며 고개를 들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그런 카게야마를 보며 설핏 웃어 보였다. 나는 그 웃음에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저, 그, 그게…”

  “카게야마는 제 애인입니다.”


  카게야마가 더듬거리며 이상한 말을 해대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카게야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맹금류의 눈을 가진 눈앞의 이 남자였다. 남자는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짜다. 나는 단번에 그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전혀 놀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란 척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저의 거짓을 간파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요?”

  “함부로 열고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꽁꽁 닫아놓은 그 틈을. 아카아시 케이지는 내 말에도 태연하게 물을 들이키나 싶더니 곧, 똑똑히 내 눈을 쳐다보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난폭한 새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었다. 웃음 속에는 날카롭고 매서운 칼이 숨어있었다. 나는 저 미소를 알고 있다. 거울 속의 미소와 같았다. 위험해. 머릿속의 사이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차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정신없이 울려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것은, 동족을 발견했을 때 울리는 사이렌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사람을 불러내서 하고 싶었던 말이 그게 다예요?”


  아카아시는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물었다. 카게야마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떨고 있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카게야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는가 싶더니 곧 내 손에 제 손가락을 천천히 얽어왔다. 그래, 이 느낌. 익숙한 안정감이 나를 지배했다. 너는 이렇게 나를 안고 나를 지배하며 내가 알려준 세계에서 살면 된다. 그러면 된다. 나는 손 안에 들어 찬 카게야마를 세게 쥐었다.

  아카아시는 여전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카게야마의 손을 놓고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게 다라면,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말한 아카아시는 정말로 돌아가려는 듯 카페의 복도로 나섰다. 나는 그를 잡아 돌려세울 생각으로 따라 나섰다. 뒤에서 카게야마가 불안한 목소리로 작게 내 이름을 속삭이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너는 몰라, 카게야마. 이건 그러니까 사냥꾼만이, 포식자만이 아는 직감이다. 포식자가 그 아랫단계의 생물을 만난다면 그저 시간을 두어 사냥해 잡아먹으면 되지만, 같은 포식자를 만났을 때는 다르다. 누구 한 쪽이 죽을 때까지 물어뜯고 살아남아야 한다. 저기요, 나는 입을 열어 그를 부르려 했지만 그 전에 그가 먼저 돌아보았다. 사냥꾼의 직감이었을 테다.


  “함부로 열고 들어오는 게 싫었으면,”

  “…….”

  “한 치의 틈도 없이 닫아놨어야지.”

  “…….”

  “나였으면 밀랍으로 죄다 봉해놨을 텐데.”


  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유유히 등을 돌려 사라지는 그 맹금류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 뒷모습으로,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짙은 어둠이 깔렸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낭떠러지가. 구역질이 나는 어둠이 바닥을 뒤덮었다. 그것은 내가 조금 전까지 봐왔단 아카아시 케이지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어둠 속의 당신, 대체 누구야?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으며 한없이 파고드는 어둠의 끝을 응시했다. 나는 저것을 알고 있다. 저 어둠을, 알고 있다. 머릿속의 사이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차게 울렸다. 내가 오이카와 선배의 목을 졸라맬 때 나를 지배하던 어둠이 바로 저런 냄새를 띠고 있었다. 그 어둠의 향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래. 이건 그거다. 동족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포식자들 간의 신호. 나는 비틀어진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천천히 이를 세우고 내 영역을 침범해 온 사냥꾼을 물어뜯을 준비를 한다. 둘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죽어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게임을 준비한다. 

  나는 손끝에 느껴지는 환각 같은 생명력을 느끼며 정신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뜨거운 피가 빠르게 몸을 돌고, 기묘한 쾌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카게야마, 게임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