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스노 배포전에 배포하였던 글입니다. 가져가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주장, 안 가요?”
“남아서 정리할 게 있다.”
“카게야마 너는?”
“아, 어, 저 체육관에 서포터 놓고 온 것 같아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우시지마와 카게야마의 대답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부원들이 알았다며 대답을 하곤 부실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부원들이 썰물처럼 와르르 부실을 빠져나가자 고등학생의 혈기로 후끈후끈하고 또 시끄러웠던 부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에 라커에 걸려있던 유니폼만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힐끗힐끗 우시지마의 눈치를 보고 있던 카게야마의 시선과, 역시 마찬가지로 최대한 느리게 가방을 챙기며 카게야마를 곁눈질하던 우시지마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나 싶더니, 라커의 문을 닫은 우시지마가 카게야마 쪽으로 향했다.
“…나갈까요?”
카게야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우시지마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슬쩍 손을 뻗었다. 뜨거운 손끝에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스쳤다. 갑작스런 감촉에 반사적으로 손을 웅크렸던 카게야마가 당황하며 재빠르게 손을 펴 제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잡아오는 우시지마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자 우시지마는 기다렸다는 듯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부드럽게 손바닥을 맞대었다. 그 따뜻함과 뜨거움 사이의 감촉에 카게야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우시지마의 다른 손이 제 머리에 얹히는 느낌에 조심스레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멀리들 안 갔을 거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다가 나가자.”
“…네.”
카게야마의 대답에 우시지마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카게야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 아래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동그란 두상이 좋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물끄러미 우시지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그런 카게야마의 시선을 받아내다가, 눈가에 위치한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보았다.
“이러고 있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카게야마의 손을 잡은 우시지마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고, 우시지마는 허리를 낮춰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카게야마와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그에 카게야마 역시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잡고는 조금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눈을 살짝 내려감고 빠르게 입술을 내밀어 우시지마의 입술에 제 것을 붙였다 떼었다.
“저도요.”
우시지마와 카게야마는 비밀 부내연애 중이었다. 애초에 남학생들뿐인 배구부에서 부내연애 금지 항목 조항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밝혔을 때 돌아오는 좋은 점보단 나쁜 점들이 더 컸기에 저들 나름대로 철두철미하게 비밀 연애를 즐기고 있었다. 조금 티를 낸다고 해봤자 부활 중에 가끔 눈을 마주친다거나, 카게야마가 질문이 있다며 우시지마에게 다가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담을 나눈다거나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가끔 우시지마가 도저히 못 참겠다며 카게야마를 따로 불러내 밀회를 갖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비밀연애는 비밀연애였다.
우시지마도, 카게야마도 누구 하나 먼저 절대로 알리지 말자고 말을 꺼내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입장을 생각했고,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입장을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주장으로서의 위치를 생각했다. 우시지마는 시라토리자와의 단순한 배구부원이 아닌, 주장이자 에이스로 제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부원들을 하나로 통솔하는 역할이었다. 그런 우시지마가 1학년 부원과 사귄다는 이야기가 밝혀지면 좋지 못한 소리들을 들을 것이 뻔했다. 더군다나 카게야마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레귤러였다. 물론 그의 실력만으로 정정당당하게 따낸 자리였지만,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건수를 문 이들은 그런 것조차 소문으로 퍼뜨릴 게 뻔했다. 우시지마가 카게야마를 낙하산으로 레귤러 자리에 올려 주었다고.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부 안에서의 낮은 서열을 생각했다. 서열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아무튼 카게야마는 3학년들과 2학년 조금이 득실대는 레귤러 사이에서 유일한 1학년이었다. 안 그래도 카게야마가 처음 레귤러 자리에 설 때 얼마나 말이 많았던가. 비록 똑똑히 보여준 실력 덕분에 일단 대외적인 논란은 수그러들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속으로 카게야마를 아니 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터였다. 우시지마는 레귤러가 되지 못한 수많은 부원들을 떠올렸다. 강한 자는 적이 많기 마련이었다. 이런 세태에 저와 카게야마가 교제하는 사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보나마나 몸을 숨기고 이 상황만을 기다려온 이들이 개떼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게 뻔했다. 저야 주장이고 명실상부한 에이스이니 건들지 못한다고 쳐도, 카게야마는 달랐다. 실력 대신 나이만 찬 이들에게 1학년이란 낮은 계급은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그러나 최근, 슬슬 그 생각들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력도 없을 정도로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진 것이 문제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서 그것들을 표출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우시지마도, 카게야마도, 그랬다.
“카게야마.”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꼭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천천히 좁은 길을 걸어가던 중 문득 우시지마가 카게야마를 불렀다. 추운 날씨에 코끝이 붉어진 카게야마가 고개를 돌려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얼굴로 땅을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우리 사이 말인데,”
망설이던 우시지마가 띄운 첫 마디에 카게야마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를 뒤따라 우시지마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게야마는 불안한 시선으로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그의 눈에 담긴 불안함을 빠르게 읽어 내리곤 그에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 자유로운 다른 손을 들어 급하게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슬슬 알리는 건 어떤가… 해서.”
카게야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요즘 들어 우시지마가 부활 중에도 끊임없이 뜨거운 눈빛을 보내오는 걸 느끼긴 했었다. 전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슬쩍 허리에 팔을 감아 온다거나, 허리를 숙여 함께 차트를 보는 척 볼에 입술을 붙여 온다거나 하는 대담한 스킨십도 늘어났었다. 조금 놀랍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들킬까 싶어 심장이 요동치기도 했고, 그 행동들에 설레어 쿵쿵 뛰기도 했었다.
“아니, 뭐, 네가 불편하면 지금 이 상태도 물론 좋다. 나쁘지 않아.”
“…우시지마 선배가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슬쩍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물어오는 카게야마의 말에 이번에는 우시지마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우시지마의 대답이 이어지기 전에 카게야마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선배는 주장이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선수이기도 하고… 저는 그 정도는 아니니까 선배가 불편하실 거라 생각해서 말 못했는데… 저는, 어, 저는, 그러니까…… 좋거든요. 안 그래도 데이트 할 시간 없는데 부활 때라도 조금 더 남들 눈치 안 보고 붙어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예전부터 생각,”
카게야마는 조근조근 말을 이어나갔으나 갑자기 우시지마가 잡았던 손을 풀고 카게야마를 한껏 끌어안은 탓에 도중에 말이 뚝 멈추고 말았다. 우시지마의 품에 파묻힌 모양이 된 카게야마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슬그머니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우시지마는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카게야마는 단박에 그 변화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벅찬 얼굴이었다.
“좋아한다.”
그 뜬금없는 고백에 카게야마는 팔을 뻗어 우시지마의 등에 손을 얹고, 그의 품으로 더욱 깊게 얼굴을 묻었다. 그의 옷에서 따뜻한 체향과 차가운 겨울 향이 풍겼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한껏 들이마시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좋아해요. 작은 목소리가 옷에 스며들었다. 우시지마는 그것들을 세게 끌어안고 품에 가뒀다.
“우시지마 선배랑 카게야마 말야, 언제쯤 우리한테 얘기 해줄까?”
“나는 그렇게 티 나게 비밀연애 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어.”
“혹시 일부러 그렇게 티내는 거 아냐?”
“아냐, 자기들은 완전 비밀연애 중이라고 생각할 걸.”
나는 언제쯤 연애하려나. 그러게 말이다. 나도.
시라토리자와 배구부원들의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겨울밤 좁은 골목길에 흩어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