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른] 조각글 모음 (140806~1401026)
트위터, 트윗숏으로 짧게 적어내려간 단문들 백업입니다.
140806 #멘션으로_키워드세개주시면_140썰로_돌려드립니다
1. 오이카게 / 새벽, 담배, 숨소리
담배를 문 오이카와는 침대에 엎드려있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새벽의 달빛이 고스란히 침대를 비추어 가뜩이나 하얀 알몸이 새하얗게 도드라졌다. 딱 하나,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방울들만 빼고는. 새벽의 적막 사이로 그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흘렀다.
2. 오이카게 / 풍선, 불안함, 라이터
카게야마에게서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애꿎은 라이터를 딸깍거렸다. 고장이 난 라이터는 더 이상 불을 내뿜지 않았다. 멀리서 풍선을 쥐고 달려오던 아이가 넘어지면서 굉음과 함께 풍선이 터졌다. 아, 동시에 감춰왔던 불안감이 터져 흩어졌다.
3. 쿠로카게 / 아이스크림, 옷, 도쿄
낯선 도쿄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걷던 카게야마는 누군가와 부딪쳤음을 깨달았다. 검은 까치집머리를 한 남자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카게야마는 아이스크림이 범벅된 제 옷을 볼 수 있었다. 저희 집이 이 앞인데, 가서 빨래해드릴까요?
4. 츠키카게 / 소름, 땀, 소리
쾅! 문이 덜컹대는 소리에 카게야마의 손에 흥건하게 땀이 배어나왔다. 쾅쾅! 아까전보다 더 거칠게 문이 덜컹거렸다. 카게야마는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만해, 츠키시마. 너는 죽었단 말이야.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5. 츠키카게 / 쿠니미, 날씨예보, 휴대폰
분명 날씨예보에서 종일 맑을 거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카게야마도, 츠키시마도 둘다 피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휴대폰이 계속해서 울려댔다. 쿠니미. 세글자가 떠있는 휴대폰을 굳게 쥔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우리 헤어지자.
140809 오이카와 토오루의 진술서
나는 가끔 가만히 생각한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히 나를 무섭도록 갉아대는 너의 그 천재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를 향해 보내는 너의 순수한 애정, 거기서 비롯되는 무서움일 거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는 너의 시선이 무섭다. 세상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무섭다. 너의 시선이 변했을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알기에 그것이 무섭다.
만물은 변한다. 그런 당연지사한 명제에도 불구하고 너의 시선이 주는 그 불변성과도 비슷한 것이 나를 옭아맬 것이 무섭다. 내 멋대로 너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정하고, 내 멋대로 기대하고, 내 멋대로 실망하고, 분노할 것이 무섭다.
그래서 나는 너를 싫어한다. 내게 헛된 기대를 심어주는 너를 싫어한다. 그 기대의 뿌리가 자라날 수조차 없게 만들고 싶은 나의 자기방어. 치졸하고, 수치스러운 자기방어.
140813
오이카와 토오루는 천재가 아니다.
누군가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고 말한다. 참 좋은 세터지. 서브도 굉장하고. 그런 누군가에게 또다른 누군가가 묻는다. 천재적인 선수인가봐요? 누군가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천재는 아니고 전형적인 노력파야. 그리고 그 말에 꼭 뒤따르는 한 마디. 천재 세터라면 따로 있어. 오이카와는 이 때부터 슬슬 속에서 짜증이 끓기 시작한다. 누군데요? 당장이라도 달려가 굳이 반문을 하는 저 치의 목을 조르고 싶어진다. 카게야마 토비오. 키타가와 제1 중학교 출신인데, 코트 위의 왕이라고 들어봤을 텐데? 오이카와는 걸음을 멈춘다. 아아, 알아요. 그 이상한 속공을 쓴다던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세터죠? 플레이 봤는데 대단했어요. 확실히 천재라고 불릴만 하네요. 멈췄던 오이카와의 걸음이 천천히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빠르게, 더 빠르게, 오이카와는 결국 뛰는 것을 택한다. 무언가에게서 도망이라도 치는 사람처럼. 빠르게 달리고, 또 달린다.
어디를 가도 제 이름 옆에는 꼭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이 따라온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역겨웠다. 자라나는 천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역겨움은 날로 자라났다. 오이카와는 생각한다. 저것이 언젠가 저를 뒤덮을 날을 생각한다. 토사물을 잔뜩 뒤집어 쓰고서 혐오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 저를, 생각한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천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천재가 되기를 갈망하진 않는다. 다만 천재를 짓밟고, 부수고, 죽여버리고 싶어할 뿐이다.
그것이 천재가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140814 (오이카게 2 의 카게야마 ver 같은 느낌)
당신이 졸업하던 날, 더 이상 당신에게 얽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 당신은 참 뛰어난 선수였고, 이 바닥은 너무 좁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그 이름은 어디서든 들려왔고 심지어 아예 내게 물어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럴때면 나는 늘 얼버무리듯 대답하곤 했다. 그 사람을 보고 서브를 배웠어요. 그 속에 담겨진 뜻을 묻는 이들은 모른다.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었다. 당신처럼 우수한 선수가, 팀 전체를 아우르는 선수가, 믿음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의 마지막 시합에서 내가 올린 토스가 비참하게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봤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당신을 떠올렸다. 당신은 나를 빌어먹을 천재라고 불렀다. 나는 단 한 번도 천재이길 원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 같은 선수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당신이 될 수 없다면 당신을 밟고 넘어서리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요즘 가끔 당신을 떠올린다. 하지만 떠오르는 모습은 전부 뒷모습 뿐이다. 어린 내게 높게만 보였던 당신의 등. 1번이라는 등번호를 달고 열심히 날아올랐던 당신의 뒷모습. 언제나 당신의 뒤, 그 한 걸음 뒤에서 항상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 시절을 잊어버린 고등학생의 나는 알 수가 없다.
140919
다녀왔어. 우시지마의 목소리에 두툼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카게야마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눈만 빼꼼 내밀고 현관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는지 우시지마의 머리카락과 어깨에 눈송이가 제법 많이 쌓여있었다. 우시지마는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대충 툭툭 털어내고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멀리까지 한기가 훅 끼쳐 들어오는 느낌에 카게야마는 충분히 몸을 꽁꽁 둘러싸고 있던 이불을 한층 더 빈틈없게 둘렀다. 거의 누에고치와 비슷한 형상을 한 카게야마의 앞까지 걸어온 우시지마는 몸을 숙여 이불을 슬쩍 걷어내렸다. 불퉁한 표정을 한 카게야마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추우니까 안 돼요."
"추우니까 돼."
우시지마가 억지로 카게야마의 몸에 돌돌 말린 이불을 풀려고 들자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렸다. 누에고치에서 굼벵이로 변한 모양새에 기가 찬 웃음을 지은 우시지마가 별 거 아니라는 얼굴로 가볍게 카게야마의 몸을 펼치고는 기어코 그 이불을 들춰 몸을 밀어넣었다. 아 진짜! 카게야마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우시지마는 앞으로 들려올 시끄러운 소리를 미리 막아내려는 듯 카게야마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러 붙였다. 한 순간에 들이 닥친 차갑다 못해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은 냉기에 카게야마는 뻣뻣하게 굳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시지마는 차가운 한숨을 내쉬며 한 팔로는 카게야마를 끌어 안고, 한 팔로는 허술해진 이불을 좀 더 꽁꽁 싸매었다.
"오늘따라 너무 추워서 집에 빨리 들어오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그냥 추워서만요?"
우시지마가 카게야마의 어깨에 대고 머리를 살살 부비자 축축한 물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카게야마는 슬쩍 얼굴을 뒤로 빼며 우시지마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반문했다. 카게야마의 물음에 우시지마는 고개를 들고 빤히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조금 쑥쓰러워진 카게야마는 괜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느껴지는 우시지마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 들었다.
"보고 싶어서."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오는 탓에 카게야마는 결국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와락 우시지마를 끌어 안고 품에 얼굴을 부볐다. 우시지마는 그런 카게야마의 동그란 뒤통수에 큼직한 손을 올려 천천히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추웠다는 얘기가 과장은 아닌 듯 우시지마의 품은 굉장히 차가웠다. 카게야마는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 차가운 품에 묻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차갑고도 포근한 겨울 냄새가 그의 품에 묻어 있었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 카게야마는 후각을 지배해버린 그 겨울 냄새 속에서 우시지마의 냄새를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숨을 들이 마시며 생각했다. 우시지마 씨 몸이 조금 따뜻해지면 같이 눈 보러 가자고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들킬까봐 카게야마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고 여전히 차가운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우시지마를 한껏 더 세게 끌어 안았다.
140926 언젠가는 이을지도 모르는
타오르는 갈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것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것으로 해결될 만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온몸을 뒤덮는 뜨거움에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가고, 우뚝 멈춰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갈증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갈증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 갈증의 원인은 아마도… 오이카와의 시선이 천천히 체육관의 구석을 향했다. 좀 더 넓은 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른 후배들과는 다르게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물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일학년 둘이 보였다. 정확히는 물을 마시고 있는 카게야마의 앞머리를 자연스레 정리해주고 있는 쿠니미가 보였다. 아. 목이 타올랐다. 오이카와는 급하게 손에 있던 물병을 들어 입안에 물을 뿌리다시피 했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끈적끈적한 것들이 몸을 죄어왔다. 아마도 죄의 덩어리일 것이다. 오이카와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물을 삼켰다.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앞머리를 정리하는 쿠니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는 카게야마의 눈, 목덜미, 아직은 어린 근육이 붙은 팔, 무방비하게 앉은 자세로 훤히 드러난 짧은 바지 속의 안쪽 허벅지, 제법 탄탄한 근육이 붙은 종아리와는 대조적으로 얇은 발목까지. 불길이 치솟았다. 타오르는 열기에 숨이 막혔다. 저를 죄어오는 그 덩어리들의 힘이 더 강하게 목을 졸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다. 오이카와가 주먹을 한 번 강하게 쥐자 그제야 시선이 그 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141002
쿠니미 아키라는 참 어려운 사람이었다.
카게야마는 종종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하였으나, 혹 가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늘 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얼굴 속을 꿰뚫어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 얄미운 사실은 카게야마가 제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쿠니미는 절대로 찰나의 틈조차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쿠니미는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달콤한 말을 건네는 표정 역시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카게야마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쳐다보기 시작했다. 보고,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쿠니미는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대체 왜? 카게야마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카게야마는 오늘도 쿠니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온도가 낮은 눈동자, 고집스럽게 다문 입매. 오늘도 변함없는 얼굴이었다. 쿠니미의 눈동자가 슬쩍 카게야마를 향했다가 다시 떨어졌다. 쿠니미의 입술이 머뭇거렸다.
"카게야마."
쿠니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눈을 급하게 몇 번 깜빡이며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좋아하는 거 맞으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
그런 눈? 카게야마는 인상을 찌푸리고 제가 무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는지 곰곰히 기억을 더듬었다.
"참기 힘들어져."
쿠니미의 말에 카게야마는 기억을 더듬던 것을 멈추고 다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대담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려워. 카게야마는 이미 골이 깊게 패인 미간에 더 힘을 주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왜,"
"……."
"왜, 진짜 너를 안 보여줘?"
카게야마의 말에 쿠니미는 조금 고개를 숙여 카게야마의 얼굴 쪽으로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 공기가 다르다. 그 표정만은 여전히 같았지만 그를 에워싼 공기의 냄새는 절대로 평소의 것이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처음 느끼는 쿠니미의 공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서 잔뜩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참기 힘드니까."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남자.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참았던 숨을 한숨처럼 깊게 내뱉었다.
141009
카게야마, 자?
아니,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언제부터 좋아했어?
…….
언제부터 좋아했냐니까.
아, 좀.
왜. 혹시 첫만남부터?
……아니.
그럼 언제부터?
꼭 말해야 해?
궁금해서 그래.
그…….
…….
중학교 1학년 때 네가 공부 가르쳐줬었잖아.
그랬지.
그 때부터….
정말?
그렇다니까.
공부하면서 흑심이나 품고. 변태네.
야, 좋아한다고 해서 다 그런 생각 하는 건 아니거든?
어쨌든. 적어도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했겠지. 최소한 뽀뽀.
…….
맞지?
몰라. 잠이나 자.
정말로 그런 생각 했어?
잠이나 자라고.
나랑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 진짜!
빨리 대답해.
…….
대답 안 하면 오늘 안 재운다.
……어.
잘 안 들려.
……했어, 했다고.
내가 키스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 그래. 됐지? 이제 자ㅈ, 읍,
…….
…….
…….
……푸하, 아, 아 진짜!
이렇게 키스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 그러니까 이제 진짜 자자.
…….
…….
카게야마.
…….
자?
…….
내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안 궁금해?
…….
처음으로 배구부에 들어와서 실력 테스트 했던 날.
…….
우리들 중에 제일 작은 애가 그런 토스를 날리는데,
…….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해야 할 지.
…….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너 하나만으로 가득 찼다고 해야 할 지.
…….
다른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그런 느낌 받아본 적 있어?
…….
나는 딱 세 번 있어.
…….
방금 말했던 그 순간, 그리고 너와 처음 키스했을 때, 처음 섹스했을 때.
…….
카게야마.
…….
카게야마.
…….
카게야마 토비오.
…….
좋아해.
…….
잘 자.
…….
안 자는 거 다 알지만.
141012 과제하기 싫었다
"다 했어?"
괴이한 소리와 함께 한껏 몸을 젖혀 크게 기지개를 켜는 카게야마를 보며 우시지마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읽고 있던 책과 함께 탁자 위에 내려놓고 물었다.
"아뇨… 도저히 모르겠어요."
울상인 얼굴로 슬금슬금 침대 위로 올라오려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덥썩 붙잡은 우시지마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과제 제출 자정까지라며? 카게야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우시지마에게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고 노력했지만 워낙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던 터라 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시지마 씨랑 조금만 놀다가 하면 안 돼요? 나름대로 필사적인 애교랍시고 평소에는 잘 안 하는 말을 덧붙여가며 다시 한 번 손목을 비틀어보았지만 여전히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손목을 놓아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조금만 놀면 안 돼요? 네?"
다시 한 번 덧붙인 카게야마의 말에 결국 우시지마는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고는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노트북 가지고 올라와."
한숨 섞인 우시지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순식간에 밝아진 얼굴을 하고선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책상으로 달려가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노트북을 들었다. 카게야마가 노트북과 전원장치가 연결된 선을 빼고서 침대로 쪼르르 올라오자 우시지마는 자연스럽게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카게야마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우시지마의 허벅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자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턱을 괸 자세로 방금 전까지 카게야마가 작업하고 있던 노트북 화면을 마우스의 스크롤을 움직여 위로 올려 보았다. 자세가 불편한지 카게야마가 몇 번 엉덩이를 들썩였다.
"놀자고 유혹하는 건가?"
"아니거든요!"
"왜, 나랑 놀고 싶다며?"
어쩐지 우시지마의 손이 느릿느릿 카게야마의 티셔츠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느낌에 카게야마가 몸을 비틀며 고개를 돌려 우시지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뭐가 문제냐는 듯 카게야마를 마주보며 손끝에 닿아오는 카게야마의 살결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은 무슨 일이 있냐는 듯 마우스를 조작하고 있는 게 마음에 안들어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이제는 제 가슴께까지 올라온 우시지마의 두터운 손을 붙잡았다. 잠깐만…! 카게야마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귓불을 몇 번 물었다 놓으며 대답했다. 왜?
"……과제 다 하고 놀아요."
차마 우시지마의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입을 여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우시지마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힘내볼까. 달싹이는 카게야마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우시지마가 살결을 쓰다듬던 손을 빼내어 노트북의 키보드에 얹었다.
141020 바이러스란 단어를 보고
바이러스라는 것들은 숙주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것들은 숙주의 생명력을 야금야금 앗아가지만 결국 숙주가 죽고 나면 저들 역시 죽어버리는 아이러니한 것들이다.
나는 바이러스와 숙주의 관계가 우리의 관계가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어느 쪽이 바이러스이고 어느 쪽이 숙주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서로를 갉아먹으며, 함께 할수록 부스러지지만 그런 이유로 서로를 피할 수는 없다. 그 순간 야금야금 줄어가던 생명력이 바닥으로 곤두칠 것을 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하겠지. 그러나 그들은 몰라. 우리는 살기 위해 서로를 죽여 나간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정말로 우리는 미친 걸까? 그런 의문을 품어보기도 한다. 그것에 대한 답은 알 수 없다.
내가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는 사랑하는 너와 내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뿐이다.
141021 졸업식이란 단어를 보고
졸업식, 와줘.
연락이 끊긴 뒤로 근 반 년만에 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나는 한참동안 액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답장 버튼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혼란스러웠다. 왜? 왜, 이제와서? 먼저 연락을 끊은 것은 그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 시절의 우리는 보통의 선후배 사이도 아닌, 그러나 연인 관계도 아닌 그 중간즈음에 위치한 애매모호한 사이였다. 누가 먼저 고백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늘 우리 사이를 맴돌았던 묘한 긴장감과는 다른 의미의 긴장감이 그 시절의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 더 따뜻하고, 달콤한 공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즈음 아오바죠사이와의 경기가 있었고, 그 경기에서 우리는 아오바죠사이를, 나는 그를 이겼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와 함께 돌아본 그의 얼굴엔 폐허와 같은 절망감이 퍼져있었다.
그 날 나는 결국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이 될 줄이야. 그 날 이후로 그는 내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못했다. 그의 번호를 누르고 나면 그 위로 그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끔찍했다. 나는 그렇게 번호를 누르고, 플립을 닫아버리는 것을 지금껏 몇십 번씩 반복해왔다. 그가 입시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만 소문으로 겨우 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이미 여러 대학에서 러브콜을 잔뜩 받고 있었기에 입시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는 차마 뒷말을 생각할 수 없었다. 배구가 사라진 그의 세상을 생각할 만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을 내가 만들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나는 그렇게 우연히 길에서 만난 킨다이치에게 우연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반 년만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여전히 버튼을 만지작 거릴뿐 아무런 것도 입력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세상에선 내가 사라졌을텐데 어째서 이제와 나를 불러낸단 말인가. 나는 한참동안 그렇게 휴대전화를 꼭 쥐고 액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 아아…
나는 가끔 그에게 '보고싶어요.'라는 메시지를 전해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럴 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다른 의중이 있었던가? 그저 그가 '보고싶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을 그리워하고, 다시 부르는 데에 의중같은 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순식간에 메말랐던 마음 안에 거대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벅차오른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을 채우고 넘실댄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적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러나 굳이 적을 필요는 없었다.
갈게요.
나는 그 세 글자를 적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부디 당신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기를 바라며.
전송 버튼을 누르며 나는 동시에 허물어져내렸다.
141021 #멘션으로_키워드세개주시면_140썰로_돌려드립니다
1. 오이카게 / 피아노, 음악실, 여름
어느 여름의 한낮, 오이카와는 음악실에 우두커니 서서 쏟아지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피아노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카게야마는 결국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렇게 또 그의 가슴엔 구멍이 자리잡았고, 결코 나는 그것을 메우지 못한다.
2. 쿠니카게 / 새벽, 담요, 무릎
낙제만은 안된다며 답지 않게 새벽까지 눈을 부릅뜨고 공부를 하나 싶더니 그새 졸고있다. 쿠니미는 쯧, 하고 작게 혀를 차고는 카게야마의 옆으로 가 꾸벅꾸벅 흔들리는 동그란 머리를 제 무릎에 눕힌 후 얄팍한 담요를 덮어주었다. 조금 자, 깨워줄게.
3. 우시카게 / 절대, 진리, 복종
내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우시지마의 차가운 목소리가 무릎을 꿇고 앉은 카게야마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내가 뭐라고 했었지? 카게야마는 꿀꺽 침을 삼켰다. …당신이 절대이고, 진리예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힘없이 퍼덕였다.
4. 쿠니카게 / 여름, 신발, 이불
여름 햇살에 잘 마른 이불을 빨랫줄에서 들어낸 쿠니미가 카게야마의 침대에 곱게 펼쳤다. 다녀왔습니다! 카게야마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쿠니미는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점심 카레예요? 카게야마는 신이 난듯 신발을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5. 츠키카게 / 야구잠바, 우산, 눈동자
추워. 그 말과 함께 카게야마가 순식간에 츠키시마의 야구잠바 사이로 파고들었다. 츠키시마는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는 터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싫어? 카게야마가 품 안에서 올려다보며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로 물었다.
6. 츠키카게 / 낮, 카메라, 바다
카게야마. 츠키시마의 목소리에 백사장을 폴짝폴짝 달리고 있던 카게야마가 우뚝 멈췄다. 찰칵. 한낮의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멍하니 츠키시마를 바라보고 있는 카게야마가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아름다워. 츠키시마가 생각했다.
141023 창의적인 여행 계획 세우기 싫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었다. 딱히 연애를 하고싶었던 건 아니지만 내게 제 마음을 말해오는 여자들을 거절할 수가 없어 일단 받고 보니 결국 전부 끝은 최악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실망'을 이야기하며 이별을 선언했다. 나는 억울해졌다. 좋아한다기에 마음을 받아주었고, 마음껏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두었을 뿐인데 왜 내가 미움을 사야하는가? 그러나 이런 말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하면 다들 '나쁜 남자'를 운운하며 나를 타박하곤 했다. 사실 나는 연애나 타인의 감정에 대해 둔했고 서투르긴 했다. 나를 알고있는 이들이라면 믿지 않을 테였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잘 모르고 서툴렀기에 잘 아는 척 포장했을 뿐이었다. 나는 특히나 일방적으로 나를 좋아해놓고 일방적으로 나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대체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조금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작정 이 땅을 떠났다. 모든 것들을 다 접어두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떠난 여행이었다.
피렌체의 하늘은 푸르렀고 또 햇살은 강렬했다. 나는 지도를 들어 살피다 도로 접어 다시 배낭에 넣었다. 그냥 발 닿는 대로 걷자. 그렇게 생각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 속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휴가철이 아니라 그런지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무수한 이탈리아어들을 들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별 뜻 없는 일상적인 대화들이겠지만 어쩐지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하게 들렸다. 이곳의 소음은 특별했다. 나는 마주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머릿속을 지워나갔다. 생각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생각하지 않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좁은 길목에서 나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사람 덕분에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내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저들 볼일을 보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딱히 재촉할 만큼 바쁘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저 두고 보았다. 한 사람은 이탈리아인이었고 한 사람은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었다. 관광객인 건지 커다란 지도를 펼쳐 서투른 영어와 함께 괴상한 손짓을 하며 이탈리아인에게 이것 저것을 묻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결국 이탈리아인은 그 동양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남은 동양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중얼거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지…
나는 문득 내가 방금 이 남자의 말을 이해했음을 깨달았다. 일본을 떠나 처음으로 들은 모국어였다. 이곳에서의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는데, 그저 모국어 몇 마디를 들은 것만으로 갑자기 혼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참 신기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침범받은 기분이기도 했고, 또 그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편으론 결국 여기도 내가 살던 곳과 다를 바없이 사람들의 삶이 모인 곳에 불과한데 내가 확대해 생각했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다. 남자는 지도를 꼬깃꼬깃 접어 배낭에 넣고는 내가 왔던 길로 돌아가려는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길을 비켜주기 위해 슬쩍 옆으로 섰다. 그러나 남자는 발을 떼지 않았다.
저…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일본인이세요?
발음이 불분명한 영어였다. 남자는 난처함과 간절함이 섞인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쩔까. 이대로 남자에게 응한다면 모든것을 내버리고 도망치듯 일본을 떠난 것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도 같았고, 응하지 않기에는 남자가 참으로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네, 맞는데요.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오랜만에 일본어를 입밖으로 뱉어냈다. 어색한 듯했지만 곧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와 얽혀 남자에게 전해졌다.
어쩌면 이것이 또 다른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합리화하며 나는 남자에게 웃어보였다. 곧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141026
라는 가사를 보고
괜찮아, 울지마. 그는 힘이 없는 손을 들어 내 볼에 가져다대었다. 나는 끝내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내 볼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떨리는 그의 손을 양손으로 잡아 그저 좋을대로 볼을 부벼댔다. 아마 눈물같은 것들이 묻어 축축했을테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으니까 울지마.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꺼풀 역시 힘을 잃어 계속해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짜디 짠 눈물을 꿀꺽꿀꺽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며 그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눈이 자꾸만 감겨댔다. 아프지 않은데 왜 자꾸 잠들려 해요. 그렇게 뱉어내고 싶은 말을 나는 눈물과 함께 꾸역꾸역 삼켜내었다. 나는 크게 공기를 머금고서 몸을 숙였다. 그의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미안, 눈에 힘이 안 들어가. 그가 손끝으로 살짝 내 손을 긁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는 먹먹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의 숨소리가 점점 더 불규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안 괜찮아. 거친 숨소리 사이로 그가 말했다. 끝까지 널 보다 잠들고 싶단 말야. 잠들지 않으면 되잖아요. 나를 먹어오는 울음 사이로 더듬더듬 뱉어낸 말이 그에게 닿았는지 그는 내게 잡히지 않은 손을 내게로 뻗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침대 위로 떨어질 것 같은 손에 나는 서둘러 그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그는 힘없이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았다기 보다는 떨어뜨렸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자꾸 잠이 와, 토비오. 늙어서 그런걸까? 그는 눈을 감고도 잘도 농담을 던졌다.
달리 생각하지마, 토비오. 그는 더 이상 눈을 끔뻑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손을 더 세게 붙들었다. 나는 그냥 잠들 뿐이야. 세상은 흘러갈 거고, 너는 평소처럼 살아가면 돼. 나는 그냥 좀 쉬고 있을 뿐이니까. 솔직히 다행이야, 정말 아플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미간은 잔뜩 골이 패여있었다. 아마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그의 거짓말에 모른척하기로 결심하며 붙든 손에 내 얼굴을 묻었다. 한 번만 눈 떠주면 안돼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차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닫힌 눈꺼풀 아래에서 이미 생기를 잃어버렸을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그 자리를 대체할 뿐이었다. 손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그의 손은 곧장 침대 위로 떨어지려 들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그의 손을 붙잡았다. 토비오. 그는 이제 정말 힘겨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선배. 나는 최대한 멀쩡한 목소리로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튀어나온 것은 결국 끅끅대는 한심한 울음소리였다.
그만 놔줘도 괜찮아. 그는 손을 조금 떨었다. 아마 그가 의도한 것은 그저 손을 조금 떠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서 벗어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조차도 하지 못했다. 거칠어졌던 숨소리가 다시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더 세게 손을 붙들었다. 나는 더 필사적으로 손을 붙들고, 그의 얼굴 께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옅어지는 숨소리가 무서웠다. 차라리 거칠어지던 때가 나았다. 토비오. 이제는 혼잣말보다 못한 크기로 그가 나를 불렀다. …놔줘도 괜찮아.
그것은 그의 마지막 당부와도 같은 말이었다. 나는 차마 그것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느리게 그의 손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었다. 시트 위로 앙상해진 손이 툭하고 떨어졌다. 늘 하던대로 굿나잇 키스 해주고 싶은데, 미안해. 괜찮아요. 나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연신 눈두덩이를 비비며 대답했다. 내가 하면 되니까. 내 말에 그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만히 포개었다. 그의 입술은 버석거렸고, 내 입술은 축축했다. 잘 자요. 끝내 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말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흘러나왔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지막 잠을 내가 축복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
좋은 꿈 꿔요. 그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도 더 희미해진 움직임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에 내 것을 맞대었다. 입술 끝에 닿아오는 그의 숨결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인생에서 한 번뿐인, 가장 아름답고도 평화로우며 고독한 마지막 잠. 그는 그것에 젖어들고 있었다.
141026 에픽하이 - 스포일러 가사 이용
“무슨 생각해?”
답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슬프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너를 향해 물었다. 그제야 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다 입을 열었다. 내일 비가 오려나 봐. 대답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이었다. 너는 금세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옆모습이 언제부터 이렇게 익숙했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기억을 더듬는 것을 관두고 네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하늘은 짙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어쩐지 그것이 나와 겹쳐 보여 나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러지 않았는데. 어긋남의 시작은 서로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면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창밖을 바라볼 수도, 그렇다고 네 옆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볼 수도 없어 나는 애꿎은 커피를 빨대로 휘휘 젓는 것을 택했다. 너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체육학과에 입학을 하며 배구부에 들어갔고 나는 배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회과학 쪽 학부에 입학했다. 다행스럽게도 둘 다 도쿄로 진학했지만 우리 둘의 학교는 제법 거리가 있는 편이었고, 거기에 각자의 삶에 치여 바쁘기까지 했다. 너는 끝내 국가 대표가 되었고, 나는 나름대로 과제에 시험에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점점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의미 없는 습관이 되어갔다. 결국 이렇게 되리란 것을 어쩌면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백할 때부터, 혹은 너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달랐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관계를 지속하기엔 인내심이 없었고, 쉽게 지쳤으며, 결국 최후의 보루인 사랑마저 그 피로에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젓던 빨대를 내려놓고 다시 네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슬슬 우리들의 구질구질하고 재미없는 영화에도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지. 이 정도면 단편영화도 아니고 나름대로 러닝타임은 뽑아낸 것 같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그 과정 속에 행복함이 있었으니 상관없을 거라고, 그렇게도 생각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랬다.
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네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바라보고 너는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바라보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듯했다.
“카게야마.”
“…왜.”
너는 우물쭈물한 표정을 짓더니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는 또다시 고민에 잠긴다. 우리의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식어버린 너의 얼굴과, 너의 말투와, 우리들의 행동이 전부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반전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어찌 생각하면 이기적이기도 하다. 내가 엔딩을 내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다른 이가, 카게야마 네가 엔딩을 내주길 바라고 그 엔딩의 끝에 반전이 있기를 바란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질없는 것들을 꿈꾼다.
너는 어서 말을 이어보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의 끝이 얼음으로 만든 칼날처럼 차갑고도 따끔거렸다.
“…오늘 가자마자 우산 챙겨 놓으라고.”
결국 뱉어낸 말은 참으로 의미 없는 말이었다. 너는 어쩐지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한숨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궁금해진다. 혹시 너도 반전을 기대하고 있는지, 너도 내가 엔딩을 내주길 바라는지.
나는 찻잔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두 손을 모두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나의 약해진 감정과 생각들이 손끝을 타고 흘러나갈까 두려웠다. 정확히는 그것들이 네게 전해질까 두려웠다.
너와 연인이라는 관계가 되면서 나는 막연하게 기뻐했고 막연하게 행복해했다. 너와 함께 어울리지 않게도 로맨스 영화를 보며 그들과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그 시절의 나는 몰랐다. 모든 로맨스 영화의 끝이 해피엔딩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아까 전보다도 어두컴컴했고, 아까 전보다도 더 볼 것이 없었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지금의 너와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