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
솜님이 적어주신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초에 시작이 잘못됐던 거였다.' 문장 인용.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초에 시작이 잘못됐던 거였다.
카게야마는 땀이 식어 한기가 맴도는 알몸 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웅크리며 생각했다. 방 안에 담배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는 언제나 섹스 후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뒤에서 한숨과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관계는 무엇보다 뜨거웠지만 항상 그 후는,
카게야마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그 후는 늘 차갑고도 시시껄렁했다. 그래. 시작이 잘못됐던 거였다. 애초에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관계였다. 그런 관계로 시작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경기 후에 차오르는 흥분감, 묘한 성적 욕구들을 급히 해소하기 위한 관계로 만났을 뿐이었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다면 잘못됐다는 표현은 쓸 필요가 없었을 텐데.
먼저 입을 뗀 것은 오이카와였다. 언제였더라.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아마도 제가 성인이 됐던 생일날이었을 것이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오이카와의 자취방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몸을 섞은 직후에.
나는 언제나 비어있는 기분이 들어.
카게야마는 그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잠자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채워줄래?
카게야마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이, 그 표정이 너무나도 절실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어 도저히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고백과도 같은 말이었음을 깨닫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도 카게야마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늘 카게야마에게 입버릇처럼 ‘좋아해서 하는 건 아니야.’라는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럼 카게야마는 ‘알아요.’ 하며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 쓰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랬던 사람이 어째서 제게 그런 고백을 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그가 제게 고백과도 같은 말을 했을 때부터, 그리고 그것을 제가 받아들였을 때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섹스파트너라고도, 그렇다고 연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생일 이후로 '좋아해서 하는 건 아니야.'라는 말을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더 어려워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딱히 생각할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던 관계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섹스가 특별해진 것도 아니다. 늘 그렇듯 적당한 애무와 격정적인 관계를 가졌다. 여전히 입술은 맞추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카게야마에게 입술을 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전에는 전혀 들지 않았던 생각들이 이제는 줄줄이 물고 쏟아졌다. 어려워져 버렸다.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섹스 중에는 차라리 나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저를 죄어오는 쾌감에 몸을 맡기면 됐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차가운 시간이었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던 관계와, 좋아했지만 이제는 식어버린 관계는 확연히 다르다. 카게야마는 그것이 무서웠다.
오이카와는 제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보기 힘든 등이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오이카와의 등을 눈으로 훑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등을 볼 일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거나,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이불을 보거나, 혹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이카와의 등에는 자잘한 근육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억지로 만들고자 한 몸은 아니다. 순전히 운동을 하다 보니 생긴 몸이었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궁금해졌다.
요즘 들어 오이카와는 후배위로 카게야마를 몰아세우는 경우가 잦았다. 아마 제 등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내 등을 볼 때 무슨 생각을 할까. 내 등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나를 돌려 세우고, 또 돌려 세울까. 허공으로 뿌연 담배연기가 흩어졌다. 어쩐지 그 등을 더 마주할 수가 없어 카게야마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시작이 잘못된 관계.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본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시작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이 사람과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래도 그는 내게 고백을 했을까?
그래도 우리는 몸을 섞었을까?
연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됐을까?
혹은 그냥 그렇게 같은 중학교 선후배 관계로 끝이 났을까?
카게야마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시간을 돌려 그의 첫 프로 데뷔 경기장으로 향하는 생각. 첫 시합에서 승리한 그가 달뜬 눈을 하고서 텅 빈 남자 화장실에 저를 몰아넣을 때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생각. 그를 내치는 생각. 거절하는 생각. 혹은 제 생일 날로 시간을 돌려 그의 고백에 고개를 젓는 생각. 나는 당신을 채워줄 수 있을 만큼 벅찬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그를 거절하는 생각.
그러나 카게야마는 잘 알고 있었다. 몇 십 번, 몇 백 번 시간을 돌려도 자신은 그를 거절할 수 없을 것임을.
옅어졌던 담배냄새가 다시 자욱하게 이불 속으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