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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카게] 재회

팥_ 2014. 9. 23. 02:29



9/23 쿠니미데이 기념.





  “잘 지냈어?”


  그것이 쿠니미가 카게야마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재어보다가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었다. 쿠니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쿠니미는 도쿠리에 담긴 뜨거운 사케를 카게야마의 잔에 적당한 높이로 따르고는 제 잔에 병의 주둥이를 옮겨갔다. 카게야마는 어색한 손짓으로 병을 넘겨받으려 했지만 이미 쿠니미의 잔에 사케가 차오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허공에 뻗어진 손을 서먹하게 거두었다. 쿠니미는 그런 카게야마의 손을 보지 못한 듯했다. 제 잔 역시 적당한 높이로 사케를 채운 쿠니미가 고쿠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카게야마를 마주보았다.


  “몇 년 만이지?”


  쿠니미의 물음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9년?”

  “아니. 이렇게 단 둘이 만난 것만 따져서.”


  그 말에 카게야마는 다시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12년.”


  카게야마와 쿠니미의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어색한 웃음을 띤 카게야마와 달리 쿠니미는 태연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그런 쿠니미의 행동에 카게야마는 부랴부랴 잔을 따라 들고 쿠니미의 잔에 가볍게 제 잔을 가져다대었다. 작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니미는 그대로 잔을 입에 가져가 단번에 털어 넣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손목을 꺾어 잔에 담겨있던 술의 반 정도만을 입안에 흘려보내고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순전히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을 따지자면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아오바죠사이와의 시합이 가장 최근일 것이다. 그로부터 얼굴은커녕 소식조차 듣지 못하게 된 것이 9년이었다. 카게야마는 졸업 이후 대학교로 진학하여 배구를 이어나갔고, 킨다이치 역시 그러했으므로 킨다이치에게 쿠니미는 졸업과 동시에 외국으로 떠났다고 스치듯 들은 것 같기도 했다. 

  12년. 참으로 아득한 시간이었다.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쿠니미와 이렇게 둘이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 딱 12년 전임을 깨닫고는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의 시작점이 중학생 시절이었다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더욱 체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12년 전의 그 독대도 썩 좋지 않은 것이긴 했지만. 카게야마는 쓰게 웃었다.

  12년 전에 저희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쿠니미 역시 자연스레 떠오른 건지, 혹은 그저 뜻 없는 행동인지 쿠니미는 도쿠리로 손을 뻗어 다시 제 잔을 가득 채웠다.


  “그 때 생각해?”


  다시 도쿠리를 바르게 세워 놓은 쿠니미가 카게야마에게 던지듯 물었다. 카게야마는 흠칫 놀라며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쿠니미는 카게야마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생강 절임 하나를 입에 넣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잔에 남아있던 남은 술을 어쩐지 급하게 입으로 털어 넣었다.


  “…약간.”

  “좋은 기억도 아닌데 뭐 하러.”

  “…….”

  “그래도 나쁘다고 칭하고 싶지는 않아.”


  쿠니미는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잔이 비었네. 중얼거린 쿠니미가 도쿠리를 들어 카게야마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는 너는 계속 자작하고 있으면서. 카게야마는 채 뱉어내지 못한 말을 씹어 삼켰다.


  “어찌됐건 너와의 기억이니까.”


  그렇게 말한 쿠니미는 다시 제 잔에 가득 들어차있던 술을 한 번에 삼켜내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런 쿠니미를 바라보다가 서툴게 젓가락을 잡고 싱싱하게 붉은 빛이 도는 사시미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먹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당장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서 한 행동과도 비슷했다. 

  

  12년 전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도록 생생하기만 했다. 

  헤어질래?

  쿠니미의 목소리가 마치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지금보다는 앳된 목소리로, 그러나 지금보다는 여유가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참 쿠니미답다고 생각했다. ‘그만하자.’라든가, ‘헤어지자.’와 같이 흔히 이별을 고할 때 말하는 ‘통보식’ 대사가 아니라는 것이 참으로 그다웠다. 

  상대의 의사를 묻는 것. 딱히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실 상대에게 마지막 발언을 하게 함으로써 그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려는 것이 맞다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묻는 쿠니미의 얼굴은 카게야마가 중학교에 들어와 3년 동안 봐왔던 쿠니미의 얼굴 중 가장 힘들어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카게야마는 쿠니미가 제게 물어오는 이유가 단순한 책임 회피 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쿠니미.”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쿠니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 날.”


  카게야마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나갔다.


  “내가 그러자고 대답해서 기뻤어?”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어린 날의 저는 어떻게 대답했던가?

  그래.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카게야마의 속을 몇 번, 몇 십 번을 휘젓고 나온 고통스런 대답이었다. 그런 얼굴로 그렇게 묻는데 그 누가 싫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어린 카게야마는 어린 쿠니미를 힘겹게 바라보며 목소리를 짜내었다. 그 목소리에 쿠니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살짝 웃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 이후로 카게야마는 언제나 그 웃음을 머릿속에 띄우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수업시간에도, 배구공을 만질 때도,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청하기 직전에도. 쿠니미는 내 대답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실은 내가 거절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웃었던 걸까.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생각의 끝은 결국 언제나 같은 곳에 도달했다.


  우리는 사랑을 한 게 맞을까.


  그 시절의 카게야마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심오한 생각이었을 것이었다. 카게야마와 쿠니미는 아마도 연인이었지만, 다른 연인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서로를 절실히 원한다거나, 좋아서 버티질 못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가끔 손을 잡고 하교길을 걷거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짧게 입을 맞추거나 하는 일들은 있었지만 그 이상의 감정교류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었으니 맞겠지 싶으면서도 이별 후라는 불안정한 상황 탓인지 공연히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비록 그 연인에게서 이별에 대해 제안을 받았고 저 자신도 그 제안을 수락했다지만 그래도 함께 했던 감정들이 서로의 가슴 속에 머문다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자신에게만 머무는 것이라면. 카게야마는 가슴에 깊게 패인 구멍 속으로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우리’가 사랑을 한 게 아닌, ‘혼자’ 한 사랑이었다면.

  그 생각의 종착지는 줄곧 카게야마를 괴롭혀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거의 일상과도 같이 괴롭혀댔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조금 뜸해진 듯했지만 생각보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일이 잦았기에 그 때마다 카게야마는 다시 제 마음을 갉아먹는 그 생각을 힘겹게 죽여내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 쿠니미의 이름이 들려올 때면 다시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것도 같았지만 그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역시 시간이 약이구나.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쿠니미의 얼굴마저 가물가물해졌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가끔씩 떠올리려 애쓰곤 했다. 그러나 잔뜩 일그러진 형체로 녹아내릴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정말이지 뜻밖의 재회였다. 어엿한 프로 배구 선수로서 활동하고 있던 카게야마는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 했던 새로운 시도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느긋하게 걸어가던 카게야마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었던 얼굴이. 제 옛 연인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먼저 카게야마를 발견하고 발을 멈춘 쪽은 쿠니미였던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한 차림새의 남자가 거리 한 가운데서 우두커니 서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쿠니미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서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냈다. 입에 담기만 해도 숨이 막혀왔던, 그,

  …쿠니미.

  카게야마의 부름에 쿠니미는 한참을 가만히 카게야마를 바라보기만 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치 어제도 얼굴을 마주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연한 목소리였다.


  저녁 먹었어?


  카게야마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들려온 쿠니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몸을 움찔하고는 흩어졌던 초점을 다시 쿠니미에게로 맞췄다. 쿠니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물끄러미 제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잔 안에는 뭐가 있을까. 카게야마는 덩달아 제 잔을 내려다보았다. 고요히 잠든 맑은 액체에 제 얼굴이 비쳤다. 12년 전보다는 좀 더 날렵해지고 성숙해진 얼굴이. 쿠니미도 이걸 보고 있는 걸까. 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쿠니미는 아직도 제 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좋았지만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도망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카게야마는 꾹 참았다. 쿠니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더 기다려도 들려올 대답은 없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꾹 물었던 입술을 조심스레 떼어내었다. 

  생각의 종착지. 다시 그곳으로 사념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는 끝낼 때도 됐지.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12년 전의 관계였다. 겉으로 드러난 관계는 끝났지만 속 안의 응어리는 12년 동안 오히려 견고하고 단단해져 제 속에 깊게 박혀 있었다. 오늘로써 뽑아낼 수 있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늘 궁금한 게 있었어, 쿠니미.”


  카게야마는 아까 전 쿠니미가 채워 주었던 잔을 들어 단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쿠니미는 그런 카게야마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빈 잔이 딱딱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바로 섰다. 쿠니미는 다시 잔을 채워주지 않았다.


  “…우리가 한 건 사랑이었어?”


  쿠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가만히, 가만히 카게야마를 쳐다볼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저를 쳐다보는 그 눈동자에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꿔 술기운 탓일 뿐이라고 바로잡았다. 쿠니미는 혀를 내어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초조해지는 기분에 애먼 제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괴롭혀댔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려나 싶기도 했지만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괜한 확신이었다.


  “카게야마.”


  쿠니미는 대답 대신 카게야마의 이름을 불러왔다. 응. 카게야마가 짧게 대답했다.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맞아 들어갔다.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저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도. 카게야마는 다시 눈을 끔뻑였다.


  “우리가 보냈던 시간을 후회한 적 있어?”


  쿠니미의 반문에 카게야마는 생각의 초점을 강제로 돌렸다. 

  의외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빠르게 내려졌다. 

  단 한 번도.

  카게야마는 그렇게 단호한 대답을 내릴 수 있는 제가 신기하면서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어린 날에도,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아팠지만 아픈 만큼 좋은 기억이었다. 아마도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기억.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아니.”


  카게야마의 대답에 쿠니미는 잔의 테두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 시선은 이제 오롯이 카게야마만을 향해있었다. 


  “나도 그래.”


  쿠니미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사랑일 거야.”


  아.

  그 마지막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후끈거리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카게야마는 손에 얼굴을 묻고 습기가 어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손바닥이 천천히 젖어 들어갔다. 쿠니미는 가만히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그와 자신의 빈 잔에 조용히 사케를 채웠다. 카게야마는 자꾸만 삐져나오는 소리를 억지로 꾹꾹 눌러 삼켰다. 12년간의 생각들이 눈물에 녹아 흘러내렸다. 무너져 내린 생각의 종착지, 그 폐허 사이에 서서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생각을 흘려보냈다. 카게야마는 한참동안 다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쿠니미는 그런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제 잔을 부드럽게 쥐었다. 쿠니미는 잔을 쥔 손을 들어 제가 채워 놓은 카게야마의 잔에 가까이 가져갔다. 


  “…고마워.”


  카게야마의 젖은 목소리와 함께 잔과 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나도.

  쿠니미가 작게 대답한 것도 같았다.


  물어봐줘서.

  그 덧붙인 말을 들었는지, 혹은 못 들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