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키카게]
키워드 : 운동장, 유리
츠키시마는 낯선 책상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책상은 바꾼지 얼마 안 된 것인 듯 낙서도 흠집도 거의 없이 반질반질한 모습이었다. 츠키시마는 쓰게 웃으며 책상의 오른쪽 아래 구석을 천천히 쓰다듬어보았다. 하긴, 십 년 전의 책상이 여태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도 충분히 낡아있던 책상인데. 츠키시마는 손가락을 세워 느리게 책상 위에 글씨를 적듯 움직였다. 츠키시마의 손가락이 훑고 간 곳에 월(月)자가 흐리게 남았다.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창가 쪽, 앞에서 네 번째 책상. 지금 제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적은 이 책상. 십 년 전 카게야마의 책상이었다.
카게야마와 다른 반이었던 츠키시마는 종종 카게야마를 만나기 위해 그의 반에 찾아오곤 했었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가 만나러 왔던 대부분의 경우 이 책상 위에서 열린 창문 새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잠들어있었고, 츠키시마는 그런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책상 위에 가져온 요구르트를 놔두고 제 반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카게야마에게 메일이 도착했다.
[왔다 갔어? 아 왔으면 깨우라니까]
그러면 츠키시마는 작게 웃으며 답을 보내곤 했다.
[자는 얼굴 웃겨서.]
그렇게 답을 보내면 늘 같은 패턴임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카게야마의 짜증 섞인 답장이 날아왔다. 츠키시마는 그 반복되는 것들이 전부 즐거웠다.
딱 한 번, 츠키시마가 자는 카게야마를 깨운 적이 있었다. 그 날도 역시 카게야마는 곤히 잠들어있었고 츠키시마는 그런 카게야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쉬는 시간을 보내던 와중 문득 낯선 것이 츠키시마의 눈에 들어왔다. 츠키시마는 애먼 안경을 고쳐 쓰고 몸을 숙여 가까이에서 책상을 살펴보았다. 책상의 한 구석에는 연필로 여러 번 그어 적은 듯한 월(月)자가 적혀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삐뚤빼뚤한 것이, 카게야마의 글씨체였다. 안 자고 나를 기다리겠다는 각오로 적기라도 한 건가? 어찌됐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츠키시마는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살살 카게야마를 흔들어 깨웠다. 카게야마는 잠에 취한 표정으로 느리게 눈을 끔뻑이더니, 곧 제 앞에 있는 것이 츠키시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번쩍 들었다.
“뭐야, 드디어 깨울 마음이 들었어?”
카게야마는 눈을 벅벅 비비며 츠키시마에게 말했다. 츠키시마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을 뻗어 방금 전 제가 보았던 그 낙서를 가리켰다. 카게야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츠키시마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게 보이길래 궁금해져서.”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눈을 크게 뜨더니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빠르게 지우개를 들었지만 츠키시마가 손을 들어 카게야마의 손목을 잡는 것이 더 빨랐다. 카게야마는 입을 크게 벌렸다, 닫았다 하는 것을 반복하며 괴이한 소리를 내더니 저를 빤히 쳐다보는 츠키시마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카게야마의 손목을 쥔 츠키시마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왜 적었어?”
“…….”
싱글싱글 웃고 있는 츠키시마와는 다르게 카게야마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우물쭈물 앓는 소리를 내보아도 저를 끈질기게 바라보는 츠키시마의 시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작은 한숨을 뱉었다. 츠키시마는 그런 카게야마에게 눈높이를 맞추듯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밑에서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바닥뿐이 없었던 시야에 갑자기 츠키시마가 들어오자 카게야마는 크게 움찔하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서 우물거리던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벌어질 생각을 못하고 삐죽대던 입술이 곧 천천히 틈을 드러내었다. 작은 틈 사이로 더 작은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싶어서.”
“뭐라고? 안 들리는데?”
“아 진짜!”
“진짜로 안 들리거든?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들어?”
츠키시마의 말에 카게야마는 이번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서 다시 입술을 우물거렸다. 이번엔 아까보다는 커진 목소리가 꾸물꾸물 흘러나왔다. 츠키시마의 한 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보고 싶어서.”
츠키시마는 구부렸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카게야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쉬는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카게야마는 토마토의 색과 비슷한 정도로 붉어진 얼굴을 채 들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들었으니까 얼른 반으로 돌아가. 그 목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츠키시마는 그저 웃으며 카게야마의 책상 위에 놓인 연필을 집어들뿐이었다. 월(月)자가 적힌 곳으로 연필을 옮겨간 츠키시마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카게야마는 츠키시마의 하는 양이 궁금했는지 슬쩍 고개를 들어 츠키시마의 손이 움직이는 곳에 시산을 두었다. 곧, 이 이상 더 붉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카게야마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츠키시마는 올라간 한 쪽 입꼬리를 내리지 못한 채로 연필을 내려놓았다. 야!! 카게야마가 소리치며 급히 지우개를 들었다.
카게야마의 삐뚠 글씨체로 적힌 월(月)자 옆에 단정한 글씨체의 도(島)자가 적혀 있었다.
“기왕 적으려면 츠키시마(月島)라고 전부 적어줘야지.”
츠키시마가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카게야마는 지우개를 들어 벅벅 거칠게 책상을 문지르며 새로이 적힌 도(島)자를 지워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제일 처음 제가 적었던 월(月)자는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츠키시마는 슬쩍 웃으며 천천히 카게야마의 반을 떠나왔다.
그 낙서는 그 후로도 쭈욱, 카게야마의 학년이 바뀌고서도 그 자리, 그 책상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런 때도 있었지.
츠키시마는 창틀에 걸터앉아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제는 제 학교가 아닌, 남의 학교가 되어버린 곳에서 흡연이라니 참 몹쓸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밀려들어오는 생각을 지울 방법이 당장 이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츠키시마는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물어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매캐한 공기가 입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불쾌했다. 불쾌했기에 츠키시마는 담배를 피웠다. 그것은 불쾌함으로만 뒤덮을 수 있는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입술에서 담배를 떼어내고 들이마셨던 숨을 뱉어내었다. 탁한 연기와 짙은 냄새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겨울이 다 된 늦가을인데도 햇살이 뜨겁게 운동장을 내리쬐고 있었다. 빛을 받은 모래알들이 멋대로 반짝거려 눈이 부셔왔다.
저희들이 운동장의 저 모래알이었다면,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 모래알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들로 골라내 만들어진 유리였다.
그 기원은 같을 지라도 철저하게 다른 존재였다. 중학교 시절의 카게야마가 덜 다듬어져 무섭도록 날이 선 유리였다면, 고등학교 시절의 카게야마는 매끄럽게 다듬어져 때로는 빛을 반사시켜 화려하게 반짝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색의 투명함 그 자체로 다른 이의 초라한 빛을 이리저리 통과시켜 멋지게 바꿔내기도 했다. 저와 같은 이들이 평범한 모래알로 살아가며, 무수한 발들에 걷어차이고 흙먼지 속에서 뒹구는 동안 카게야마는 잘 세공된 유리로 성장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가끔 그것이 배가 아팠다. 제 연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혐오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츠키시마는 어렸다. 공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카게야마에게 툴툴대기도, 이유없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그것들에 저도 함께 화를 내면서도 결국엔 전부 받아주었다.
츠키시마는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어린 날의 제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카게야마는 아름답고도 멋지게 세공된 유리였지만, 결국은 유리였다. 작은 충격 하나에도 부서져버리는 것.
그 때는 그저 더 이상 배구를 하지 못하게 됐다는 큰 충격 하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부서져버렸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깨져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렸던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를 달랬다.
지금은 어떨까. 츠키시마는 숨을 뱉었다. 연기가 매웠다. 눈이 저릿해져왔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카게야마는 그 충격 하나에 부서진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부터 이미 작게 금이 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잘하게 금이 간 것들을 억지로 참으며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내리쳐진 강한 충격에 참아왔던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고만 것이다. 그렇다면 자잘한 금들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였을까. 츠키시마는 저릿해진 눈을 감으며 담배를 물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눈을 뜨고,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연기를 뱉었다.
깨진 유리조각들을 생각하며.
부서진 카게야마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