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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스가] Scent

팥_ 2014. 8. 2. 22:11





  홀로 남아 부실을 정리하던 카게야마는 바닥에 떨어진 주인 모를 티셔츠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 티셔츠는 주인을 찾아주기도 힘들 만큼 아무런 특색이 없는 티셔츠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한 장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민무늬의 흰 티셔츠. 티셔츠를 주운 카게야마가 끙, 하는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허리를 펴고서 살짝 구겨진 티셔츠를 들어 탈탈 털어보았다. 흰 티셔츠는 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약간의 구김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번듯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오늘 실수로 흘리고 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카게야마는 혹시나 누군가 제 것이라는 표시라도 해뒀을까 싶어 티셔츠를 얼굴 가까이 하고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았다. 티셔츠에는 아무런 표식도 남겨져있지 않았지만, 그 대신 카게야마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시감은 어쩐지 위화감까지 함께 불러들여 카게야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익숙하지만,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것. 


  티셔츠에서는 독특한 향기가 났다. 처음은 청량한 페퍼민트의 향기, 그리고 끝은 묘하게 부드러운 백합의 향기가 맴도는 그런 독특한 향이었다. 향기로우면서도 독특한 탓에 한 번 맡으면 꽤 인상적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는 그 향은 카게야마가 이미 맡아본 적이 있는 향이었다. 그건 아마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그…….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떠올렸다. 그 향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적어도 카게야마에게는 비단 그 향이 독특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토록 열렬히 좋아했던 사람의 향기. 항상 그를 맴돌고, 그를 감싸고 있던, 언제나 코 끝에 닿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던 그런 향기. 그런 향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티셔츠가 구겨지도록 손에 힘을 주었다.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 넘실거리듯 흘러들어왔다.


* * *


  답지 않게 땅 위로, 나뭇잎 위로 눈이 살풋 내려앉던 졸업식 날. 어느새 눈이 소복하게 쌓인 소나무 아래에서 초조하게 제 손을 비비던 카게야마는 코 끝에 닿아온 익숙한 향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 오이카와가 기분 좋은 웃음을 얼굴에 달고서 눈밭에 발자국을 내며 카게야마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붉어진 콧등을 손으로 살짝 훔치곤 오이카와를 향해 몇 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나한테 할 말 있다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오이카와였다.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에게서 받은 것인지 오이카와의 한 손에는 쇼핑백이 잔뜩 들려있었다. 쇼핑백 사이로 드문드문 풍성한 꽃다발과 곱게 포장된 선물상자들을 본 카게야마는 애써 오이카와의 손에서 시선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여 발자국들이 남겨진 눈밭을 바라보았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졸업 축하드려요, 오이카와 선배.”


  주머니에서 꺼낸 카게야마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핸드크림이었다. 요즘 들어 자꾸 손끝이 터서 보기가 흉하다고 투덜댔던 오이카와의 말에 졸업선물로 고민하던 카게야마가 고심 끝에 준비한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써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쇼핑백 안에 쌓여있던 휘황찬란한 선물상자들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포장이라도 해올 것을. 이런 방면으로는 섬세함과 거리가 먼 카게야마로서는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별 수 없었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던 오이카와는 웃으며 내밀어진 핸드크림을 집어들었다.


  “뭐야, 토비오쨩? 안 어울리게 섬세하네?”

  “졸업선물은 드려야할 것 같아서요. …일 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흐음.”


  핸드크림을 쇼핑백에 넣은 오이카와가 표정을 바꾸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저 표정이 싫었다. 아니, 싫다기 보다는 부담스러웠다. 그 눈빛은 마치 상대의 모든 것을 읽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상대를 뜯어내고 다시 조립해 낱낱이 그 안에 감춰진 것들을 캐내는 것 같아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그런 식으로 저를 쳐다볼 때면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곤 했다. 오이카와에게만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그를 향한 동경심이나, 그것에 수반되는 유치한 질투심이나,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연애감정 같은 것들. 카게야마는 죽어도 그것들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끝?”

  “……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카게야마는 그 웃음에 불안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웃음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향해 짓궂은 장난을 칠 때나, 혹은 괴롭히려할 때 늘 지어보였던 웃음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결국 카게야마가 먼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해보려는 찰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뒷통수에 손을 얹고는 빠르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카게야마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얼결에 오이카와 쪽을 향해 얼굴이 끌려갔고, 곧 뒤따라 휘청거리던 몸 역시 따라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에 턱을 얹었고, 동시에 진한 그의 향기가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몸을 감쌌다. 카게야마의 귓가로 오이카와의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흘러 들어왔다.


  “좋아한다고 고백하려는 줄 알았는데.”


  카게야마는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그에게만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 감정을, 그는 진작 다 꿰뚫어보고 있었나 싶어 수치스럽고 또 서러워졌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몸을 떼어내려 했지만 다시 제 뒷통수를 지그시 잡아 누르는 오이카와의 손에 결국 꿈쩍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오이카와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역겹다고 거절해주고 그 얼굴 표정 좀 즐겁게 관람하려고 했더니만. 실망스럽네, 토비오쨩.”


  작게 흘러들어온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카게야마의 몸이 크게 티나지 않을 정도로 떨려왔다. 그냥 봐서는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떨림이었지만 아마 지금 붙어있는 오이카와 정도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한 떨림이었다. 그 떨림을 느낀 건지, 혹은 그저 그의 습관인 건지 소리 내어 웃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카게야마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가 늘 달고 사는 그 환한 웃음을 볼 자신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리 세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카게야마의 시야에 유일하게 들어있던 오이카와의 일부인 그의 운동화가 조금 멀어졌다. 


  “핸드크림은 잘 쓸게, 순정 넘치는 우리 토비오쨩.”


  오이카와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지도, 끄덕거리지도, 소리 내어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목석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그가 저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 죽어도 제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저를 싫어하고 있을 그에게 더 저를 싫어할 빌미를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저를 뜯어보고 또 뜯어봐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 마음까지도 전부 알고서 이미, 이미 저를 신랄하게 비웃어줄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카게야마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그저 목석처럼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피하고, 피하면서. 오이카와의 운동화가 멀어져갔다. 시야에 남은 것은 그의 발자국 뿐이었다.


  “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이카와의 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쩍도 하지 않던 카게야마의 몸이 흠칫거렸다.


  “고등학교에서 보자?”


  뽀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향기는 여전히 몸을 감싸고 있었다. 진해서, 너무 진해서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후각이 그것으로 마비되어 다른 향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은은한 눈의 냄새도, 소나무의 냄새도, 다른 사람들의 냄새도, 초봄의 냄새도, 제 눈에 고인 눈물의 냄새도, 카게야마는 전혀 맡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그의 향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날, 카게야마 토비오는 절대로 아오바죠사이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 *


  카게야마가 차마 손에서 티셔츠를 놓지 못하고 있던 찰나 부실 문이 활짝 열렸다. 


  “카게야마, 아직 멀었… 그거 내 옷인 거 같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스가와라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에 들린 티셔츠를 알아본 듯 부실 안으로 들어와 티셔츠를 잡고 살펴보았다. 


  “안 그래도 아까 가방 보는데 티셔츠가 하나 안 보이더라니, 냄새만 맡아도 딱 내 티셔츠네. 이것 때문에 못 가고 있었어?”

  “아, 네, 뭐…….”


  말끝을 흐린 카게야마는 웃으며 제 어깨에 팔을 두르는 스가와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철저하게 그의 향이라고 믿었던 향기가 사실 스가와라의 향기였다니. 좋아했던 남자의 향이라고 믿었던 향기가 사실 제 애인의 향기였다니. 


  “그럼 갈까?”


  웃으며 제가 묻는 스가와라의 말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언컨대 카게야마는 단 한 번도 스가와라에게서 그 향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 기억마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저는 그 향을 무의식중에 지우려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스가와라와 교제를 하면서 자기 방어를 위해 아예 그 향의 이름을 스가와라의 체취로 덮어 씌워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향이 지금 제게 스가와라의 것이 아닌 주인 모를 티셔츠의 것으로 나타났을 때, 결국 그 최종 방어막과도 같았던 벽이 무너지면서 스가와라의 체취가 아닌 ‘그’의 향이라고 생각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카게야마는 불안해졌다. 새롭게 쌓아왔던 제 세상이 전부 다시 흔들려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향 하나로. 제가 스가와라와 교제한 이유가 전부 이 향기 때문이었다면? 스가와라에게 마음을 준 이유가 ‘그’와 같은 향 때문이었다면? 사실은 이 향을 좋아했을 뿐인데 마치 스가와라를 좋아하는 것처럼 제 무의식에 포장한 것이었다면? 카게야마는 멍하니 서서 문으로 향하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안 가?”


  스가와라가 뒤돌아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잠시 동작을 버벅거리다 급하게 스가와라를 쫓아 종종걸음을 걸었다. 스가와라에게서 낯설고도 익숙한 향이 풍겨왔다. 좀 전에 티셔츠에서 맡았던, 그리고 중학시절 맡았던 그 향. 그 청량하고도 부드러워 매혹적인 향.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스가와라의 향을 느낄 수 없었다. 전부 ‘그’, 오이카와의 향뿐이었다. 


  지독히도 향기로운 그 향이 다시 한 번 카게야마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하이큐_글_전력_60분

주제 ; 누군가의 티셔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