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게우시] 오이카와 토오루의 우울 下
* 오이카게 교류회에 가져갔던 원고입니다.
* 카게야마 in 시라토리자와 설정.
* BGM 有
* 上 - http://eternal-recurrence.tistory.com/127
꿈을 꾸었다. 카게야마가 나왔다. 작은 몸집, 짧은 앞머리. 중학교 1학년 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라토리자와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 몸에 걸쳐진 것은 남색의 유니폼이었다. 키타가와 제1 중학교의 유니폼. 오이카와는 손을 뻗어 유니폼 중앙에 크게 프린팅 된 숫자 1을 만지작거렸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토비오쨩, 그 옷 왜 입고 있어?’
오이카와는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물음에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로 뻗으려던 손을 채 뻗지 못했다. 앳된 얼굴에 너무나도 강한 경계심이 묻어있었다. 카게야마는 몇 걸음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오이카와는 차마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작은 손으로 자주색 옷자락을 꾹 쥐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검은 색의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있을 뿐이었다. 마치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오이카와는 머리를 긁적이다 최대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카게야마에게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곧장 오이카와가 다가온 만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카게야마의 작은 입술이 옴찔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 오이카와는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자 카게야마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구세요?’
오이카와는 할 말을 잃고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든가 농담이 아니다. 어린 얼굴에 담긴 표정은 진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잖아, 토비오쨩. 오이카와 씨라구. 아무리 머리가 나쁘다지만 그새 주장 얼굴도 까먹은 거야?’
오이카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감추고 물었다. 하지만 카게야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이제 눈에 띄게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주먹을 꾹 쥐었다. 카게야마가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무서워 카게야마가 말을 꺼내기 전에 제가 먼저 재빠르게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은 특별히 서브 가르쳐줄테니까! 빨리 이 오이카와 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해 봐, 토비오쨩.’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최선의 말이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손에 흥건히 묻어난 땀을 옷자락에 닦아내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얼굴로, 크게 뜬 동그란 눈으로 오이카와를 이상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곧 카게야마의 작은 입이 열렸다. 오이카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잘라낼 구실이 없었다.
‘서브라면 우시지마 선배가 가르쳐주셨는데요?’
떨림이 멈추었다. 오이카와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뒤로 어느새 무언가가 서서 그를 받치고 있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는데, 나와 카게야마밖에 없는 공간이었는데.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게야마는 갑작스레 제 등에 닿아오는 감촉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의문과 경계심으로 얼룩져있던 앳된 얼굴이 순식간에 안심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주색 유니폼. 오이카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니야. 그 중심에 새겨진 숫자 1. 우시지마 선배! 반가운 듯 그를 부르는 어린 목소리. 저를 내려다보는 짙은 암녹색의 눈동자. 오이카와는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오이카와는 뒤를 내려다보았다. 무한했던 공간은 어느새 아찔한 절벽으로 바뀌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오이카와?’
우시지마는 카게야마를 제 뒤로 감추며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마치 저와 카게야마의 사이에 거대한 벽을 세운 것처럼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발작처럼 도리질을 쳤다.
‘내 후배에게 볼일이라도 있나?’
오이카와는 크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시지마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시지마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카게야마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야! 오이카와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네 후배가 아니라 내 후배라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후배야, 키타가와 제1 중학교, 카게야마 토비오, 내, 후배, 야,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입을 벙끗거렸다. 하지만 입밖으로 나오는 것은 뱀이 쉭쉭대는 듯한 듣기 싫은 소음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제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검은 뱀을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움켜쥐었다. 우시지마도, 카게야마도, 저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곳이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우시지마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코트 바닥에 넘어진 저를 내려다보던 그 때의 얼굴로, 추락하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낙하의 종착지는 아귀를 쩌억 벌리고 출렁이는 어둠이었다. 지옥의 입구였다.
잠에서 깬 오이카와는 벌떡 몸을 일으켜 멍한 얼굴로 꿈을 떠올렸다. 그리곤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단단한 주먹으로 제 가슴을 몇 차례 강하게 가격했다. 나와, 나와, 나오라고! 하지만 여전히 목구멍과 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함은 사라질 생각을 않고 마치 오이카와를 놀리듯 작게 꿈틀대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목까지 흘러내린 이불의 끝을 쥐고 거칠게 머리까지 뒤집어쓰며 다시 이불에 몸을 뉘었다. 오이카와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꿈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사실 중학생 때부터 우시지마와 함께 경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오이카와의 머릿속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파고들었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 말은, 내가 그 애에게 어떠한 큰 존재라도 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내가 보잘 것 없이 우시지마에게 패배하는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에 내게선 별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는 뜻이 아닐까. 별 거 아닌 범인 선배와 저를 따라주지 않는 동료들이 있던 학교를 벗어나 압도적인 힘을 가진 천재가 있는 강한 학교로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뒤에 숨어 저를 쳐다보던 꿈속의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뒤척였다. 빨리 모든 걸 잊고 다시 잠들어야만 했다. 오늘은 예선 결승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시라토리자와였다.
◈
오이카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잠겼다. 머릿속을 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잡생각이 많아져선 안 돼. 오이카와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사람의 뇌는 용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기존에 뇌를 가득 메우고 있던 생각에서 일부를 떼어내 제공한다는 것과 같았다. 오이카와는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다. 뇌의 전부를 경기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어도 모자랐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 대신 팀원들을 독려하는 역할에 치중했다. 평소의 오이카와보다도 더 초조해 보이는 상태가 아직 경험이 적은 1학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시라토리자와와, 카게야마와 결승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에 다른 때보다도 긴장한 건 오이카와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킨다이치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만히 제 손가락을 꼬물대며 땅만 내려다보고 있던 킨다이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강해서 긴장하는 거야?”
킨다이치는 말없이 미묘한 표정만을 지어보였다.
“그렇다면 괜찮지만, 상대가 카게야마라서 긴장하는 거라면 얼른 너도 저 녀석처럼 명상이라도 해라. 네가 어떤 기분인지는 알겠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방해야. 지금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건 시라토리자와와의 시합이지 껄끄러운 옛 동료와의 대결이 아니니까.”
이와이즈미의 말에 킨다이치는 입술을 잘근 거리더니 곧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며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아직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실 지금 가장 저런 말이 필요한 사람은 오이카와였지만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저 제 스스로 정리를 끝낼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망할 오이카와, 아무튼 안 그런 척 해도 손 많이 가는 놈이라니까. 이와이즈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다른 팀원들을 살폈다.
“이와쨩.”
얼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오이카와가 웃으며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짜증이 나 한 대 때려줄까 했지만 아마 지금 저 속까지 태평한 상황은 아닐 거라 생각해 이와이즈미는 얼굴을 찌푸리는 걸로 주먹을 드는 것을 대신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얼추 속이 가라앉은 듯했다. 꿈은 꿈이고, 경기는 경기였다. 잡다한 것들을 비워내는 데 평소보다 더 에너지를 쏟아서인지 후끈거리는 얼굴에 찬물이라도 끼얹을 겸 오이카와는 화장실로 향했다. 지금 당장 저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였다. 승리, 그것을 거머쥐면 자연스레 모든 것들이 뒤따라 올 것이다.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이라 그런지 화장실까지 가는 복도는 고요했다. 다행이었다. 이런 곳에서 제 팬을 자처하는 여학생이라도 만나면 피곤한 상황이 도래할 게 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화장실을 찾아 온 것은 얼굴의 열을 식히기 위함도 있었지만, 혼자 있고 싶었던 이유가 더 컸다. 물론 경기를 앞두고 있는 제 상태를 잘 아는 팀원들은 조용히 오이카와를 홀로 내버려두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그래도 계속해서 저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엔 이와이즈미도 사람이라 지금 그도 마음을 비울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고, 오이카와는 그에게서 생각을 뺏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자리를 비켜준다 해도 이와이즈미의 성격 상 제 자신을 추스르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독려하기 바쁠 테지만 그래도 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제가 비켜준다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었다. 오이카와는 뜨거운 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화장실로 향하는 마지막 모퉁이를 돌려고 했다.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곧장 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복도 바닥에 시끄럽게 끌리는 여러 개의 운동화 소리와, 이리저리 사람이 부딪치고, 옷이 쓸리는 소리들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한 발짝 발을 내딛고 얼굴을 내밀어 모퉁이 너머를 살폈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모퉁이 너머엔 익숙한 두 명이 있었다. 자주색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이었다.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곳엔 벽에 등을 기댄 카게야마와, 그의 손목을 붙잡아 위로 올려붙이고 정신없이 그의 얼굴에 제 입술을 묻고 있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꾸만 벽을 타고 미끄러지는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로 바닥을 차며 이리 저리로 몸을 비틀었다. 그 때마다 운동화의 밑창이 바닥에 마찰되어 끼긱대는 기괴한 소음이 복도 전체를 울렸다. 기묘한 소음은 끊이질 않았고, 우시지마의 거친 행동도 끝나질 않았다.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고서 우시지마의 손에 잡혀 꿈쩍도 하지 못하는 제 손을 계속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카게야마의 앓는 소리가 삐져나와 비명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로 얼마 가질 못하고 우시지마의 입에 먹혀 뚝뚝 끊어지기 일쑤였다.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기괴한 마찰음과, 흐느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들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카게야마의 몸짓은 약해져갔고, 어쩐지 우시지마는 점점 더 거칠게 카게야마를 탐해갔다. 금방이라도 입술을 물어뜯을 듯한 몸짓이었다. 우시지마의 손에 잡힌 카게야마의 손은 이제 옴짝대는 것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시끄럽게 복도를 울리던 마찰음도 어느새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손에 몸을 다 맡긴 것처럼 벽에 기대어 축 늘어져 그가 입술을 깨물면 깨무는 대로,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입안을 헤집으면 헤집는 대로 우두커니 흔들리고 있었다. 점점 벽에서 미끄러지는 카게야마의 몸을 우시지마는 그의 다리 사이에 제 다리 한 쪽을 끼워놓고 받쳐 올려가며 끝없이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쉽게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본능적인 탐욕이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느리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려던 생각도, 혼자 있고 싶다던 생각도, 오늘 꾸었던 꿈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벽을 붙잡고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어 주춤주춤 복도 가운데 까지 뒷걸음질을 치다가 간신히 벽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두 발로 섰다. 조금 전의 광경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시끄러운 무리 속에 들어가 소음 속에 자신을 맡기고 부유하는 것이었다. 홀로 있는 것은 최악이었다. 저를 노리고 넘실대는 생각의 해일 속에 잡아먹힌다. 그렇게 되면 영영 그 물보라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다. 오이카와는 젖어가는 옷자락을 느끼며 정신없이 경기장을 향해 달려갔다.
마주 선 곳엔 우시지마가 있었다. 거대한 함성이 체육관 전체를 뒤흔들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늘 그랬듯 무뚝뚝한 얼굴로 서있었다. 조금 전에 오이카와가 본 것은 헛것이었다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너를 꺾고 전국으로 갈 거라고 어깃장을 놓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질 않았다. 조금 전에 봤던 장면이 자꾸만 그의 얼굴 위로 겹쳐보였다. 양 팀 주장, 인사하세요. 심판의 목소리에 우시지마가 손을 내밀었다. 분명 저 손으로 카게야마의 손목을 쥐어 잡고 키스했었지. 오이카와는 우두커니 그 손을 노려보았다.
“오이카와, 뭐 하나.”
우시지마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깨를 흠칫 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의 손을 노려보고 있던 시선을 그의 얼굴로 돌렸다.
“우시와카쨩이 나한테 지고 엉엉 우는 걸 상상하고 있었지.”
이제야 조금 평소처럼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향해 삐딱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시지마는 눈썹을 꿈틀거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의 손이 우시지마의 손에 닿았다. 우시지마의 손이 오늘따라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이 뜨거운 손으로 카게야마의 손목을 쥐고, 아니, 어쩌면 카게야마의 손목을 내내 쥐고 있느라 뜨거워졌으려나. 오이카와는 또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기억에 있는 힘껏 우시지마의 손을 잡고 흔들어 악수했다. 빨리 그 손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피우며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당장 시합이 시작될 이 상황에서 이들에게 불안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 저는 언제나 당당하고 여유로운 캡틴이어야만 했다. 오이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모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온몸의 근육들이 경련했다. 극도의 초긴장상태였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저를 보고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와이즈미도, 마츠카와도, 하나마키도, 와타리도, 킨다이치도, 쿠니미도, 모두가 같았다. 오이카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믿는다, 얘들아.”
그리고 휘슬이 울렸다.
◈
오이카와는 저를 따라다니는 집요한 시선을 경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면, 그곳엔 카게야마가 있었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볼 때면 카게야마는 늘 크게 움찔거리며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카게야마는 표정을 감추는 데에 예나 지금이나 미숙했다. 제가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표정으로 전부 내보인다. 오이카와는 그것이 신경 쓰여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릴 수가 없었다. 먼저 쳐다본 게 누군데. 제가 먼저 집요하게 저를 좇아놓고는 제가 따라 쳐다보기라도 하면 저렇게 불편한 얼굴을 해대는 것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결국 오이카와는 코트 선 바깥으로 서브를 내리꽂는 실수를 몇 번 하고 말았다. 오이카와는 분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또다시 불편한 얼굴을 했다.
시합 전에 목격했던 그 일 직후라기엔 카게야마의 플레이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카게야마가 서브할 차례였다.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것마저 오이카와의 모습을 똑 닮아있었다. 오이카와는 저를 고스란히 따라하는 카게야마를 보며 조금 전의 그 광경을 떠올렸다. 시합을 하기 전까진 분명 우시지마가 강제로 밀어붙였던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침착할 수가 있나. 카게야마의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오이카와가 저를 쳐다보는 순간을 빼고는 한없이 고요했고, 잔잔했으며,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냉정하게 경기를 펼쳐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강제로 당했던 거라면 저렇게 침착하게 경기를 할 수가 없겠지. 그것도 그 상대에게 열심히 토스를 올리고 또 올려가며 말이다. 그 생각을 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대체 무슨 사이야, 너네?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안에서 거칠게 꿈틀댔다. 어쩐지 단기간에 쌓아올린 신뢰 치고는 제법 굳건하다 싶었다. 어쩐지 카게야마가 그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잘 듣는다 싶었다. 어쩐지 우시지마가 답지 않게 부드러운 칭찬을 건넨다 싶었다.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려 애썼던 꿈속의 저를 떠올렸다. 내 후배야, 내 후배라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침이 쓰게 느껴졌다. 꿈은 꿈일 뿐인데 자꾸만 지금 일어나는 상황들에 겹쳐 보이는 것이 짜증이 났다.
서브할 준비를 마친 카게야마가 공을 높이 띄우고 뒤에서부터 뛰어와 날아올랐다. 미숙하지만 어찌됐건 같은 자세. 누가 봐도 저를 따라 연습한 자세로 카게야마는 날아올랐다. 작년까지만 해도 실제 경기에서 카게야마가 저 서브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서브를 처음으로 봤던 뒤로 딱 삼년 만이었다. 삼년 내내 나를 따라 연습을 했을까. 그리고 그걸 내 앞에서 나를 향해 선보이는 지금,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오이카와는 가라앉은 눈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손바닥에 세차게 닿은 공이 그대로 저를 향하는 줄도 모른 채. 오이카와는 서둘러 자세를 낮추고 공을 받아낼 준비를 했지만 이미 날아온 공은 큰 소리를 내며 오이카와의 팔에 부딪치고 코트 바깥으로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카게야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번갈아가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선배들에게 멋쩍은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며 다시 공을 받아들고 있었다.
나를 노린 거였을까, 혹은 미숙한 컨트롤로 인한 실수였을까. 오이카와는 아직도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 카게야마를 노려보았다. 오이카와는 점수판을 바라보았다. 1세트를 이미 내준 상황에서 2세트, 28대 27. 방금 제가 한 실수 때문에 한 점 한 점이 소중한 듀스 상황에서 결국 1점을 뒤지고 말았다. 오이카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이 얼얼했다. 오이카와는 팔에 남은 벌건 자국을 바라보았다.
“잊어, 멍청아.”
이와이즈미가 뒤에서 오이카와의 등을 주먹으로 가격해왔다. 오이카와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이와이즈미는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이와이즈미 역시 평소보다 초조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굳이 집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어 보일뿐이었다. 오이카와는 숨을 고르고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집요한 시선이 저를 좇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떴다. 공을 든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또 다시 불편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보란 듯이 웃어주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비죽거리다 그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오이카와는 몸을 낮추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카게야마의 공이 떨어진 곳은 와타리의 바로 앞이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와타리는 손쉽게 카게야마의 서브를 받아내었고 그가 띄운 공은 정확하게 오이카와에게로 전달되었다.
오이카와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이번엔 시선 두 개가 저를 좇았다. 하나는 카게야마인 것이 뻔했고, 다른 하나는, 오이카와는 힐끗 네트 너머를 바라보았다. 네트 앞에 선 우시지마가 오이카와의 행동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머릿속이 정신없이 굴러갔다. 수식을 입력받은 계산기처럼 오이카와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과 그에 따른 성공률, 실패율, 치명적인 단점, 위험도 등을 생각했다. 오이카와는 슬쩍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가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뛰어 올랐다. 오이카와의 긴 손가락이 섬세하게 공을 건드렸다. 공은 소음 하나 없이 오이카와의 손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다시 떠오른 공은 그 누구도 향하지 않았다. 무섭게 뻗은 팔들 사이로 빠져나가 가볍게 네트 너머의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카게야마가 당황한 눈으로 공을 좇는 것이 생생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머리가 흥분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어느새 사이를 파고들어 달려온 리베로가 떨어지는 공을 간신히 받아내었고 공은 다시 높게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고 빠르게 수비 태세를 갖추었다. 빨리! 오이카와의 다급한 목소리에 네트 앞으로 모여든 이들이 순식간에 블로킹 준비를 마쳤다. 어느새 크게 포물선을 그린 공은 카게야마를 향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느 쪽이야, 어느 쪽이지, 어디로 올릴까, 생각해 오이카와, 생각해. 오이카와는 주문을 외듯 낮고 빠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시합 전에 본 광경을 떠올렸다. 우시지마의 거칠고 뜨거운 탐욕을 온몸으로 간신히 받아내고 있던 카게야마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우시지마와 호흡을 맞추며 저를 상대하고 있는 카게야마를, 떠올렸다. 중학교 때의 카게야마라면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처럼 남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 분하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는 급하게 손을 뻗어 이와이즈미의 옷을 잡아당겼다. 우시지마가 서있는 쪽을 향해서. 그가 바로 신뢰라는 것을 배운 카게야마가 지금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카게야마가 뛰어올랐다. 모든 것이 슬로우 화면처럼 느리게 눈앞을 스쳐갔다. 마지막 1점. 오이카와는 눈을 번뜩이며 카게야마를 좇았다. 그리고 공중에 뜬 카게야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카게야마는 또렷하게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그 순간 낯선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더 이상 카게야마는 오이카와를 향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저 올곧게 오이카와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시에 오이카와는 제 생각이 어긋났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미 공은 카게야마의 손에 닿았다 떨어져 확실하게 방향을 잡은 상태였다. 오이카와는 차마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어 동료들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떨어지는 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누구도 향하지 않고, 네트 너머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을. 오이카와는 공을 향해 달려드는 동료들을 보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의 함성이 쏟아졌다. 카게야마의 손에서 곧장 바닥을 향해 떨어진 공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았다. 허탈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쳤다 튀어 올라 다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굴러가는 공을 바라보았다. 점수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29대 27. 점수판을 거친 오이카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네트 건너편의 풍경이었다. 그곳엔 모두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카게야마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다시 제가 서있는 코트로 시선을 돌렸다. 떨어지는 공을 받아내기 위해 슬라이딩을 한 자세 그대로 엎드려 헐떡이고 있는 동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가, 빨간색으로 물들었다가, 파란색으로 물들었다가, 종국엔 흉물스럽게 비틀렸다.
◈
어떻게 정렬을 하고, 어떻게 인사를 하고, 어떻게 동료들과 말을 나누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울렁대던 속이 절정에 이르렀는지 계속해서 구역질이 쏟아졌다. 하지만 실제로 목구멍을 비집고 쏟아지는 것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고 명치께를 강하게 몇 번 두드렸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오이카와는 크게 숨을 고르고 비틀대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벽을 짚고 일어서 몇 번 휘청거린 오이카와는 간신히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온 몸으로 문을 밀었다. 낡은 화장실 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뻑뻑하게 열렸다. 오이카와는 찬물로 세수를 할 생각으로 비척비척 세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멈추고 말았다. 세면대 앞에는 지금 이 순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서있었다.
“축하해.”
멈춰 섰던 오이카와가 날이 선 목소리를 뱉어내며 다시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 거울을 보고 섰다.
“왕이랑 어린 왕이라,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어.”
이 순간 제가 뱉어내는 모든 말이 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뱃속에 똬리를 튼 뱀이 아가리를 벌리고 뱉어내는 독기를 어디론가 토해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그 독에 취해 죽을 것이었다. 비참한 자살은 싫었다.
“이제는 카게야마를 가지고도 열등감을 느끼는 건가?”
오이카와는 거울 너머로 우시지마를 바라보며 물을 틀기 위해 수도꼭지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거울 속의 제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우시지마 역시 차가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오이카와는 단번에 얼굴로 열이 끼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우시지마의 얼굴은 평소처럼 덤덤했지만 그 속에는 경멸과 연민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이카와는 열이 올라 뜨거워진 얼굴과는 정반대로, 얼음을 무더기로 삼킨 것처럼 명치 아랫부분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나? 너는 내게 늘 패배했고, 이젠 카게야마까지 내게 빼앗겼으니 거기에 마저 열등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비틀어 잡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오이카와는 제 얼굴에 삐딱한 웃음이 걸려 있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거의 반사적인 미소였다. 아니, 사실 그건 미소라고 부르기도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말도 안 되잖아, 우시와카쨩. 나는 애초에 토비오를 좋아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왜 내가 그딴 이유로 너한테 열등감을 느끼겠어?”
오이카와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구토라도 하듯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당연하게도 거짓말이 섞인 말이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에게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도 덤덤한 얼굴을 하고 제게 으르렁대는 오이카와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그 얼굴이 뜻하는 바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우시지마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멱살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우시지마는 말이 없었다. 그 태도가 오이카와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이 저보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빈곤에 지쳐 날뛰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가만히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카게야마는 네 재능을 탐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오이카와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 이상 비틀린 미소조차도 지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양 말하는 우시지마의 목소리에 짜증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 뿐이었다. 그저 이 얼토당토않은 대화를 어서 관두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네 실력을 높게 쳐주고 인정해준 사람들은 많았지. 상까지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나 역시도 네 재능을 높게 사고 있다. 너는 훌륭한 선수야, 오이카와.”
오이카와는 그가 제가 방금 전 자신과의 경기에서 진 상대라는 건 알고서 말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놀리려는 수작인가? 오이카와는 험악한 얼굴로 대답하려 입을 벌렸지만 우시지마가 먼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재능을 갖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었나?”
오이카와는 벌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으로 네 능력을 탐냈던 사람이 바로 카게야마였겠지. 그러니 너는 이미 재능이 차고 넘치는 천재가 자신의 능력까지 탐낸다는 데에 시기하면서도 결국은 카게야마를 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그 녀석이 너를 욕심내어 줄 거라 생각했겠지.”
우시지마가 다시 말을 잠깐 멈추었다. 오이카와는 그 틈을 파고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퍼런 살기를 가득 띤 눈으로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카게야마가 선택한 건 네가 아니라 나, 그것도 늘 너를 이겨오던 나라는 점에서 다시 네 열등감이 폭발한 게 아닌가? 언제까지고 네 능력을 탐내고, 너를 넘고 싶어 할 줄 알았던 그 녀석이 순식간에 내 곁으로 와 철저하게 내 사람이 되어가는 걸 보고 왜 너의 모든 걸 내가 다 뺏어가는 걸까 싶어 이렇게 부질없이 화풀이와 같은 화를 내는 게 아닌가? 그 분노는 대체 어디를 향한 거지? 나? 카게야마? 아니면 네 자신?”
우시지마는 보기 드물게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하고서 끝까지 오이카와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오이카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그를 노려보던 눈동자는 어느새 그 시퍼런 살기를 잃고 멍한 기운만 띠고 있었다. 마치 저를 속속들이 뜯어 해부라도 해본 것처럼 얘기하는 우시지마의 말에 오이카와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반박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어디까지 나를 들여다봤어? 내 바닥을 전부 봤어? 내 안에 뭐가 들었는지, 그것도 전부 봤어? 오이카와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꺼내진 않았다. 우시지마의 멱살을 비틀어 잡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우시지마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차가운 눈으로 마주 바라보다가 오이카와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곤 가볍게 몸을 비틀었다. 오이카와는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오이카와의 손에서 빠져나온 우시지마는 작게 한숨을 쉬며 구겨진 티셔츠를 정리했다. 우시지마는 잔뜩 굳어 꼼짝도 하지 않는 오이카와를 흘낏 바라보곤 화장실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몸을 뒤로 틀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리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는지 우시지마는 고개만 살짝 돌려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카게야마가 항상 쳐다보고 있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너니까.”
오이카와의 눈에 희미한 초점이 되살아났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를 우시지마 쪽을 향해 굴렸다. 돌아가는 눈동자에서 끽끽대는 소리가 날 것처럼 눈이 뻑뻑했다.
“그 녀석은 내 사람이 될 수 없어.”
우시지마는 말을 마치고도 잠시 동안 발을 떼지 않았다. 섬뜩하게 얼어붙어있던 눈동자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우시지마는 다시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오이카와는 우두커니 서서 우시지마가 빠져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눈에 잃었던 초점이 서서히 온전하게 돌아왔다. 오이카와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느리게 걸음을 떼어 화장실 바깥으로 향했다. 묻고 싶었다. 순수한 욕구가 저를 정복했다. 네게서 듣고 싶어, 토비오. 네 입으로 듣게 해줘. 내가 원하는 답을 네 입으로 직접 들려줘. 느리게 바닥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떨어지던 오이카와의 발이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이카와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복도를 내질러 달려갔다.
“토비오!”
검고 둥근 뒤통수가 저 멀리서부터 보였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고 카게야마가 서있는 곳까지 단박에 달음박질해 그를 붙들었다. 카게야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몸을 돌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 선배?”
저를 붙든 상대를 확인한 카게야마의 표정이 놀람으로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카게야마를 붙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카게야마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런 오이카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는 허리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다가 서서히 그 숨소리가 차분해졌다고 생각될 무렵 느리게 굽혔던 허리를 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카게야마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오이카와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흔들리는 밤하늘색 눈동자가 오이카와를 향했다. 카게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부터 물어보면 좋을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오이카와는 뒤엉킨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했다.
“시라토리자와에 가고 싶었어?”
그 물음에 카게야마는 크게 얼굴을 구겼다.
“지금 그걸 묻겠다고,”
“고등학교 말고.”
“…….”
“중학교 말이야.”
삐딱하게 변한 카게야마의 얼굴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서서히 카게야마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변해갔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 잊어두고 있었던 꿈이 다시 머릿속을 파고들어왔다. 카게야마는 대답대신 물끄러미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이카와는 슬슬 초조해졌다. 대답을 재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입을 열지 않는 걸까. 빨리 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줘, 토비오.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그럼 고등학교는?”
카게야마의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오이카와가 바로 다음 질문을 했다. 카게야마는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카게야마는 몇 번이나 입술을 옴짝거렸지만 곧바로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정확하게 말해줘. 시라토리자와에 가고 싶었던 거야, 아니면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학교에 가고 싶었던 거야? 오이카와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구체적인 질문이 역으로 저를 난도질하여 처참하게 만들까 두려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카게야마는 두어 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고 싶었어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을 피했다. 오이카와의 얼굴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오이카와는 손을 뻗어 카게야마의 양쪽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카게야마는 어깨를 크게 들썩이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오이카와의 눈을 마주보았다. 차가운 눈동자가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붙들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냐, 아니야,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야. 오이카와는 세게 붙든 카게야마의 어깨를 거칠게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복잡하게 엉켜있던 머릿속이 끝내 풀리지 못하고 전선이 엉킨 회로처럼 터져나갔다. 카게야마는 두려움이 물든 얼굴로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오이카와가 저를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가 그의 얼굴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했다. 오이카와는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배배 꼬이고 뒤틀려 선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웃음이었다.
“아, 그랬어?”
오이카와의 목소리마저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눈치를 보듯 몸을 움츠리고 오이카와의 표정을 살폈다.
“왜 가고 싶었는데?”
오이카와는 이제 완전히 평정심을 잃은 듯 했다.
“그래, 나 때문이랬지. 왜 나 때문이었을까? 내 능력이 네 성에 안 찼어? 점프 서브라도 어떻게 배워볼까 싶어서 따라다녔더니 가르쳐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막상 지켜보니 그걸 가지고도 우시와카쨩을 이기질 못하니 별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랬어, 토비오? 그래서 시라토리자와에 가고 싶었어?”
“그게 아니, 라,”
카게야마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부정하며 오이카와의 어깨를 잡아 밀어내려고 했지만 오이카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카게야마에게 가까이 저를 밀어붙일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카게야마의 등이 딱딱한 벽에 부딪쳐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어지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그를 밀어붙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게 아니면? 뭔데?”
오이카와는 서로의 코끝이 부딪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물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카게야마는 당혹스러운 눈을 하고서 오이카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오이카와의 입에서 뒤이어 나온 말에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아, 우시와카쨩이랑 키스하고 싶어서?”
“그게, 무, 슨……”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충격이 가득했다.
“다 봤어, 토비오쨩. 아까 경기하기 전에 우시와카쨩이랑 진하게 키스하고 있었잖아? 얼마나 좋았던지 발버둥까지 쳐가면서 말이야. 그래서 시라토리자와로 간 거였구나? 아오바죠사이가 아니라?”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그건, 우시지마 선배가 억지로,”
“억지로, 아, 억지로 하는 게 좋았어?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럼 나도 해줬을 텐데. 그랬으면 아오바죠사이로 왔을까?”
카게야마는 말도, 초점도 잃은 채로 멍하니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어쩐지 상처가 가득해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최악까지 곤두박질치는 기분을 맛보았다. 왜 네가 그런 눈을 해. 왜, 네가,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지금이라도 해줄까? 말해봐, 토비오. 해줄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빠져나갈 틈도 주지 않고 곧장 그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작은 얼굴이 오이카와의 큰 손 안에 가득 들어찼다. 카게야마는 발버둥을 쳤다. 오이카, 와, 선배! 발악과도 같은 비명이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억지로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려 했다.
“나도 아오바죠사이에 가고 싶었어!”
하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의 입술 근처에 닿았을 무렵, 카게야마가 내지른 소리에 오이카와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카게야마는 그 틈을 타 오이카와에게서 얼굴을 빼내고 거칠게 돌려 옆쪽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의 색색대는 숨소리가 침묵의 사이사이를 메꾸고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의 후배가 되고 싶었어.”
조금 전과는 다르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물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미묘한 습기를 눈치 채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카게야마의 얼굴을 쥐고 있던 손은 어느새 바닥으로 떨어져있었다. 오이카와와 저 사이에 약간의 거리가 생기자 카게야마는 그제야 다시 얼굴을 돌려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를 돌아본 눈동자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저게 습기의 원인인가 싶었다.
“하지만 선배는 단 한 번도 나를 후배로 봐주지 않았잖아요.”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마치 저를 원망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쿠니미랑 킨다이치는, 그래도 나랑 삼 년 동안 함께 했어요. 물론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고 마지막엔 그렇게 되어버리기까지 했지만 적어도 그 녀석들이랑은 같은 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게야마는 다시 오이카와 대신에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어느새 그의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오이카와 선배와는 고작 일 년 같은 팀이었을 뿐이고, 아니, 햇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와이즈미 선배는 날 후배로 대해줬으니까.”
카게야마는 눈을 꾹 감았다.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조금씩 떨리곤 있지만 그 초점만은 명확하게 잡힌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뚜렷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이제는 오히려 오이카와가 그의 눈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배는 그 일 년 동안에도 나를 적으로만 봤죠. 같은 팀이 아니라 넘어야할 상대라고 생각했잖아요. 쿠니미도, 킨다이치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나를 이기고 싶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아오바죠사이에 갈 생각을 해요. 선배는 나를 또 적으로만 볼 텐데. 그걸 알면서도 내가 어떻게 거길 가요. …쿠니미랑 킨다이치는 후배로 생각해주면서, 나는, 왜, 나만…”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정도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카게야마는 우뚝 말을 멈추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오이카와는 그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아냐, 나는, 그게 아니라, 무어라 하고 싶은 말들이 끊임없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뱉어낼 수가 없었다. 거칠고 불규칙적이던 카게야마의 호흡이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따라 카게야마의 눈동자 역시 좀 더 어두운 빛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경기 마지막 1점, 당연히 우시지마 선배에게 토스하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가 없었어요. 선배처럼 되고 싶어서, 선배를 따라했어요. 아마 나는 죽어라 노력을 해도 절대로 선배 같은 그런 플레이는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마저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건지, 그게 너무 대단해보여서.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서.”
카게야마는 조금 전보다 많이 떨림이 가신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뱉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중학교 때나 지금이나 내 시선의 끝은 항상 선배였어요. 선배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오늘 그렇게 계속 날 쳐다본 거잖아요. …오늘 우시지마 선배가 억지로 했던 일도 다, 그, 내 시선 때문이었어요. 내가 언제나 오이카와 선배를 보고 있대요. 나는 이제 시라토리자와의 사람인데, 그런데도 내가 보고 있는 건 결국 선배래요.”
오이카와는 아직도 흠칫 흠칫 떨고 있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향해 느리게 손을 뻗었다. 카게야마의 입에서 제가 듣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 말을 듣고 싶었다. 너는 정말로 항상 나를 보고 있었어. 그리고 그건 내 착각도, 우시지마의 착각도 아니었다. 오롯한 사실이었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아까 전 우시지마가 제게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날카로운 말들을 잔뜩 뱉어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시지마가 제게 쏟아낸 것은 분노였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제게 토해냈던 말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그 분노는 대체 어디를 향한 거지? 나? 카게야마? 아니면 네 자신? 우시지마는 제게 묻기도 했지만 그 자신에게도 물은 것이었다. 카게야마를 갖고 싶었구나, 너.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카게야마를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고, 그 원인이 되는 자는 오히려 제게 네가 카게야마를 빼앗아갔다며 시기하고 있는 그 상황에 우시지마는 분노한 것이다. 카게야마가 항상 쳐다보고 있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너니까. 숨이 막힐 정도로 제 모든 것을 좇던 카게야마의 시선. 그게 그렇게도 분해서 너는 억지로 카게야마를 취한 것이었나. 아, 차오르는 희열이 발끝부터 몸을 지배했다. 등골이 저릿해졌다. 나는 이제 네가 내게 들려준 답들의 결론을 알아, 토비오. 그리고 그것은 오이카와를 흥분감에 가득 차게 만들었다.
카게야마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들을 이제는 거의 다 들은 상태에서, 남은 질문은 단 하나 뿐이었다. 원래 하려던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카게야마의 말을 전부 들은 지금 오이카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었다. 나는 이제 전부, 전부 알았어, 토비오.
“토비오.”
오이카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게야마의 이름을 속삭였다. 카게야마는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여름밤의 이슬을 맞은 풀냄새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를 좋아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오이카와도, 카게야마도,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내가 듣고 싶은 답을 말해줘, 토비오. 이게 마지막 질문이니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눈에서 절대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고스란히 그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남색 눈동자가 요동치며 아래로, 아래로, 깊은 어둠 속으로 침몰했다. 카게야마는 제가 비쳐 보이는 오이카와의 맑은 눈동자를 간신히 마주했다. 오이카와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그 견고한 벽돌색 눈동자를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당신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환희가 몸을 꿰뚫었다. 바로 제가 원하던 답이었다. 오이카와는 몸을 관통하는 쾌감에 크게 벌어진 동공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어깨에 얹었던 손을 조심스레 그의 얼굴로 옮겨갔다. 그 광경은 몇 분 전에 일어났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오이카와의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카게야마의 콧등을 스쳤을 때,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오이카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선배가 대답할 차례예요.”
카게야마의 손은 크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물어봤어요? 내가 아오바죠사이에 가고 싶어 했는지, 아니면 시라토리자와에 가고 싶어 했는지?”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우시지마 선배가 나한테 키스한 걸로 그렇게 화냈어요?”
카게야마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부 오이카와의 입술에 닿아왔다.
“저는 오늘로 완벽하게 솔직해졌어요. 필사적으로 감춰왔던 모든 걸 그대로 털어놨다구요. 그러니까 선배도 그렇게 해줘요.”
오이카와는 침묵했다.
“나한테 솔직해줘요.”
카게야마가 애원하듯 속삭였고 오이카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한 카게야마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선배에게 저는 뭐예요?”
오이카와는 조금 더 카게야마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대답해요. 카게야마가 속삭였다.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이카와의 작은 목소리가 곧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내 후배.”
오이카와는 그 대답에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크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들려주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니었다. 물론 너의 재능을 조금은 시기했었다. 그러나 반짝이는 재능에 대한 감탄과 시기는 결국 한 끗 차이 이거나, 함께 붙어 다니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너의 배구를 좋아했다. 코트 위에 서서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는 얼굴을 한 너의 얼굴을 좋아했다. 너는 뭐가 됐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내 후배였고, 그건 시라토리자와에 입학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이카와는 다시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오이카와의 어깨를 쥔 카게야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카게야마가 입술을 달싹였다.
“오이카와 선배.”
입술이 스칠 듯 말듯한 거리에서 카게야마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었다. 뜨거운 숨이 그대로 입술에 닿아 녹았다.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입술 위로 스며들었다.
“저를 좋아하세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쥔 손을 느리게 꿈틀댔다. 얼굴을 간질이는 감각에 카게야마는 코끝을 찡긋거렸다.
“글쎄.”
오이카와의 대답에 그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웃으며 카게야마의 얼굴을 쥐고 있던 제 손을 떼어내었다. 카게야마는 멍한 눈으로 그런 오이카와의 행동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떼어낸 손을 천천히 제 어깨로 옮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 어깨를 붙든 카게야마의 손을 떼어내었다.
“내가 네 말들을 듣고 너를 추측했고, 결국 그게 정답이었던 것처럼,”
오이카와는 제 어깨에서 떨어져 나온 카게야마의 손에 그대로 손바닥을 맞대었다. 카게야마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갔다. 축축하고, 뜨거웠다.
“네가 추측한 나도 정답일 거라 생각해.”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맞닿은 손을 세게 쥐었다. 코앞에서 카게야마의 입술이 옴짝댔고, 그로 인해 바깥으로 새어나온 뜨거운 숨이 오이카와에게 전부 닿아왔다.
“나는 사실 나를 잘 몰라, 토비오.”
오이카와는 천천히 카게야마의 입술 위로 저를 앉혔다.
“그러니까 너를 믿을게.”
벌어진 오이카와의 입술 사이로 카게야마의 입술이 전부 먹혀들었다. 뜨거운 숨이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카게야마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오이카와를 따라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술에선 뜨겁고 먹먹한 맛이 났다. 카게야마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오이카와의 손을 잡았다. 오이카와는 그에 호응하듯 부드럽게 카게야마의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졌다. 그의 손등을, 그리고 마음을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던 울렁거림이 어느 순간 전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목구멍을 가득 메우던 불쾌한 이물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갈 생각을 않고 똬리를 튼 채로 제 안에 눌러 살던 거대한 뱀의 존재감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눈동자에 맺힌 카게야마의 얼굴과, 입술에 스며든 발간 숨결과, 손에 닿은 저릿한 온기와, 코끝을 스치는 축축한 향기와, 혀끝에 느껴지는 먹먹한 맛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