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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카게] L'Elisir d'Amore

팥_ 2014. 9. 20. 22:17

  


(PC : 우클릭, 모바일 : 꾹 누르기 후 연속재생)



  카게야마는 입에 요구르트를 물고서 나츠미가 내민 작은 유리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 체육 수행평가가 배구라며 꼭 좀 도와달라고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길래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연습을 도와줬더니 오늘 대뜸 찾아와 수행평가 만점을 받았다며 답례라고 내민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나츠미의 손에서 약병을 받아들어 이리저리 돌려 살펴보았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연분홍빛의 액체가 잘게 찰랑이고 있었다. 병에는 그 어떤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병에서 시선을 돌려 나츠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츠미는 마치 장난을 치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살짝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이게 뭔데?”


  카게야마의 물음에 나츠미는 주변을 몇 번 둘러보더니 카게야마를 향해 몸을 숙여달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카게야마는 다시 요구르트 팩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서 슬쩍 허리를 구부렸다. 나츠미는 까치발을 들어 카게야마의 귓가에 손을 대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시에 카게야마의 입에서 요구르트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랑의 묘약.”


  카게야마가 유리병을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계속해서 기침을 해대자 나츠미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카게야마에게 다가가 카게야마의 등을 몇 번 두드려주었다. 한참 동안 콜록대던 카게야마는 간신히 진정이 됐는지 벌게진 얼굴로 몸을 일으키며 나츠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고통에 가득 찬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뭐?!”

  “쉬는 시간엔 맨날 자고 있던 애가 아주 핸드폰을 붙들고 노려보고 있질 않나, 그러다 혼자 실실 웃으면서 플립을 열어 답장하질 않나. 히나타가 말하기를 요즘 또 혼자 어딜 그렇게 다닌다던데?”


  카게야마는 나츠미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 알아챌 정도로 티가 나는 줄은 몰랐는데. 카게야마는 당장 제 옆의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츠미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는지 딱히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 여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 나름 효과가 있다는 거 같더라고. 그 사람과 연애하게 되면 어떤 일들을 하고 싶은지 소원을 빌 듯이 생각하면서 마실 거에 타면 된대. 잘 해봐, 카게야마.”

  “아니,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게 필요가 없,”

  “나름 힘들게 구한 거니까 잘 되면 나한테 매점 빵이라도 사, 알았지?”


  나츠미는 더 이상 카게야마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웃으며 카게야마의 등을 세게 팡팡 두드리고는 손을 흔들며 제 반으로 가볍게 뛰어갔다. 복도에 홀로 남은 카게야마는 멍하니 그런 나츠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굳게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풀자 그 색을 잃지 않은 액체가 여전히 병 안에서 잔잔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런 게 진짜일 리가 없잖아. 은연중에 기대해버린 자신을 눈치 챈 카게야마가 한숨을 깊게 내쉬곤 병을 들어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타이밍 좋게 다른 쪽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카게야마는 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 사람일까?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다른 사람이면 또 얼마나 실망하려고.

  우시지마 와카토시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려 애를 쓰며 메일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새로 알려줄 것도 있고 하니 오늘 부활동 끝나고 밥 먹을까. 내가 그 쪽으로 갈게.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버튼을 한 자 한 자 눌러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알겠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릴게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건만, 어째서 늘 처음인 것처럼 이렇게 떨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만나면 하는 얘기라고는 언제나 배구와 관련된 이야기들뿐이었지만, 카게야마는 그것이 정말로 즐거웠다. 그와 배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운 건지,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운 건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분명 전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은 우시지마였다. 카게야마는 아직도 그 첫 메일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르는 번호로 온 메일 한 통. 그 내용은,

  네 토스가 궁금한데.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제 신원도 밝히지 않고 묻는 내용에 카게야마는 누구시냐 물었고—아마 배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그냥 묵살했을 것이다.— 그제야 상대방은 제 이름을 밝히는 답 메일을 보내왔다.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 와카토시다. 카게야마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다시 살펴보았다. 현 내 최고의 선수인 건 당연지사고,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가 제게 먼저 연락을 해올 줄이야. 게다가 그런 선수가 제 토스가 궁금하다 물었다. 카게야마로서는 거의 날벼락처럼 떨어진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카게야마는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고, 그 결과 정말로 그 둘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것이 제법 주기적인 만남이 되어갈 무렵, 둘 사이에는 배구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사사로운 일상 이야기들이 오고가게 되었다. 물론 전체를 100으로 놓았을 때 배구가 80, 다른 이야기들이 20 정도인 수준이었지만 그 둘에게는 꽤 장족의 발전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느새 우시지마와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에게서 어떤 유용한 것들을 듣고, 보고,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비롯된 기대였다. 그러나 그 기대의 이유는 카게야마도 모르게 서서히 변해가게 되었다. 그와 나누는 이야기에 대한 기대보다도 그와 만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게 메일을 보내면 돌아올 답장이 기다려졌고, 가끔씩 걸려오는 그의 전화에 심장이 요동쳤고, 혹시나 확인하지 못한 새에 부재중 전화로 그의 번호가 찍혀있기라도 할 때엔 괜히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카게야마 자신도 제가 점점 변해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 히나타에게 우시지마와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저 왜 저만 빼놓고 만나냐며 시끄럽게 굴까 귀찮아서라는 이유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유가 사뭇 달랐다. 카게야마 자신조차 뭐라 정확하게 명명할 수 없는 이유였다. 확연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느낌은 이랬다. 들키고 싶지 않다.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무엇을? 그 주체에 생각이 이르고 나니 갑작스레 타오른 부끄러움이 전신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카게야마가 제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 것은 어느 평범한 날의 밤이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씻은 후 방으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을 울려대고 있었다. 그것이 우시지마의 전화임을 확인한 카게야마는 혹여 끊어질 새라 급하게 전화를 받아들었고, 우시지마는 평소처럼 카게야마에게 제가 알려준 기술들에 대한 연습 성과를 물어왔다. 카게야마도 우시지마도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기에 둘의 통화는 보통 5분 내외, 길어야 10분 안으로 끊어지곤 했다. 슬슬 우시지마가 통화를 끊으려는 기미가 보이자 카게야마는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통화를 하고 싶다고,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 저, 우시지마 씨…!’


  통화를 정리하려는 우시지마를 부른 것은 순간이었다. 수화기 건너편으로 멈칫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우시지마가 대답해왔다.


  ‘더 할 말 있나?’


  카게야마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짧은 침묵동안 저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것은 충동적으로 우시지마를 불러버린 데에 대한 자책이 아니었다. 어째서 말을 이어갈 소재를 생각해내지 못하는 건지, 이렇게도 말주변이 없는 건지에 대한 자책이었다.


  ‘…아뇨. 안녕히 주무시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를 지어버릴 수밖에 없는 저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 말에 우시지마는 ‘너도.’ 하고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통화를 끊을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엎드려 눕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뱉으며 베개에 세게 얼굴을 몇 번 내리박았다. 나는 대체 이 사람에게 무슨 생각을…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통화가 끊기려 하면 아쉽고, 헤어질 때면 더 아쉽고, 답장이 늦을 때면 초조하고, 휴대전화와는 통 친하지 않던 제가 이제는 붙들고 살고 있다. 전부 이 사람 하나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감정에 둔한 카게야마 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좋아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복잡하게 엉켜있던 모든 것이 깨끗하게 풀려나갔다.


  카게야마는 주머니에 넣었던 유리병을 다시 꺼내 쥐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없는 미신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지.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손 안의 병을 바라보았다. 그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분홍빛 액체가 크게 요동쳤다.


* * *


  돼지고기 카레와 소고기 카레 하나씩, 그리고 둘 다 온천 계란 추가. 주문을 마친 우시지마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고 카게야마는 꿀꺽 침을 삼키며 우시지마의 자리에 놓인 물 컵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살짝 엉덩이를 들어 주위를 살피고는 급하게 물 컵을 제 앞으로 끌어와 주머니에 넣어 뒀던 유리병을 꺼냈다. 뭐랬더라, 소원을 빌 듯이?

  카게야마는 유리병의 입구를 막고 있던 코르크 마개를 잡아 힘을 주어 뽑았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개가 빠져나왔다. 카게야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이 사람과 하고 싶은 일들은… 

  손을 잡고 배구 경기를 보러 간다거나, 서로의 집에 놀러가기도 하고, 주말에는 함께 만나 운동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 넓은 등을 안아보기도… 거기까지 생각한 카게야마의 볼은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걸린 붉은 등의 색처럼 물들어있었다. 카게야마는 허겁지겁 물 컵에 유리병의 액체를 전부 쏟아 붓고 젓가락으로 대충 휘휘 저어 다시 우시지마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타이밍 좋게도 동시에 우시지마가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우시지마를 바라보며 요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리에 앉은 우시지마는 카게야마에게서 풍기는 어색한 기류를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는지 제 앞에 놓인 컵을 들어 물을 몇 모금 꿀떡꿀떡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카게야마는 긴장한 얼굴로 그런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우시지마는 그런 카게야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컵에 담긴 물을 절반 정도 비우고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카게야마는 급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괜히 제 컵을 들어 역시 물을 꿀떡꿀떡 삼켜냈다. 차가운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다음은 평소와 같았다. “저번에 얘기한 스파이크 말인데,” 하는 말도, “서브 컨트롤을 더 높이는 게 좋겠어.” 하는 말도, 전부 평소와 같았다. 카레가 나오고 반 정도가 없어지도록 우시지마에게는 별 다른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카게야마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묵묵히 꾸역꾸역 카레를 퍼먹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라도 믿어본 제가 한심스러웠다. 어쩌자고 이런 걸 선물해준 거야? 나츠미를 원망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원망의 화살은 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이런 유치한 걸 멋대로 믿어놓고 실망한 자신에게, 혹은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약물에 제 마음을 맡겨버린 자신에게. 카게야마는 잠시 숟가락을 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괜한 기대를 해버린 것이다. 여섯 살 난 애도 아니고… 

  그런 생각들로 끝없이 자책을 하고 삽질을 하며 땅을 파고 있던 찰나, 우시지마의 큰 손이 카게야마의 앞으로 뻗어졌다. 카게야마는 흠칫 놀라 우시지마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다음 순간, 카게야마는 뻣뻣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지?”


  우시지마가 집어든 것은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유리병이었다. 유리병에는 약간 남은 분홍빛 액체가 자잘하게 찰랑이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제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가 유리병을 노려보기라도 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제야 카게야마는 요즘 여자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했던 나츠미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차. 카게야마는 급하게 우시지마의 손에서 병을 낚아채듯 잡아 쥐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카게야마? 우시지마의 의아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카게야마는 이를 꾹 맞물려 물고서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하다니. 갑자기 뭐가?”


  우시지마의 물음에도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 생각도 못한 채 연신 고개를 꾸벅 꾸벅 숙이며 우시지마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다 한참 후에 겨우 다시 입을 뗄 수 있었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이 사람과의 지금 이 관계조차 전부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왔지만 거짓을 고하는 것은 제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게야마는 떨리는 입을 열어 간신히 다음 말을 뱉어냈다.


  “제가, 제… 가, 우시지마 씨 컵에…”

  “…….”

  “사랑의… 묘…… 약을…”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카게야마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서 거의 테이블을 파고 들어가다시피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우시지마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몸을 움찔거리며 애꿎은 제 손을 노려보기만 했다. 우시지마 씨는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 슬쩍 고개를 들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도저히 거기까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효과는 없는 건가?”


  곧 들려온 우시지마의 목소리는 예측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카게야마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우시지마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와 같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우시지마의 반응에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듯해 아까보다는 진정된 몸짓으로 흠, 흠, 하고 몇 번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적어도 관계가 끝나진 않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안도감에서 나온 안정이었다.


  “그… 네. 그런 것 같아요. 요즘 세상에 그런 게 효과 있을 리도 없고…… 저도 그냥… 그, 그냥, 밑져야 본전, 아니, 아니… 재미 삼아 해본 거라서…….”


  카게야마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횡설수설 우시지마의 물음에 대답했다. 우시지마는 그런 카게야마를 조금도 변하지 않은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겨우 찾은 안정을 다시 잃어가는 기분에 서서히 고개를 숙여가던 찰나, 우시지마의 손이 반쯤 남은 물 컵으로 향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그런 우시지마의 행동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남은 물을 전부 마시고는 소리 나게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카게야마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 그런 우시지마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변함없는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그 허공에서 침묵과 함께 서로의 시선이 몇 초, 혹은 몇 분이나 부딪쳤을까. 먼저 입을 연 것은 우시지마였다.


  “당연히 효과가 없을 만도 하군.”


  카게야마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살짝 벌어진 입과 함께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마치 평소에 카게야마에게 배구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던 모습과 거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좋아하고 있으니까.”


  아.

  카게야마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물에 붉은 잉크가 떨어져 풀어지듯 카게야마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퍼져 갔다. 우시지마는 아직도 아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닌가. 그 덤덤한 입매 끝에 살짝 미소가 걸려있는 듯도 했다. ……못 버티겠어.

  그렇게 생각한 카게야마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뜨거운 기운이 순식간에 손끝까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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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약, 약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