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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쿠로] True Love Waits

팥_ 2014. 9. 14. 18:07

카게른 합작 <글>부문으로 제출한 글입니다.

http://lol.ncity.net/tobio/





(PC:우클릭 / 모바일:꾹 누르기 후 연속재생)



  한참을 식은 커피와 함께 홀로 앉아있던 카게야마는 천천히 일어나 카페의 문을 열고 나섰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쨍쨍했던 하늘은 어느새 투둑투둑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처마 밑을 벗어났다. 순식간에 옷이 젖어들었다. 차갑고 끈적끈적한 그 느낌에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잠시 멈춰 방금 전까지 제가 앉아있던 카페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와, 오이카와가 앉아있었던 카페를. 카게야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다시 돌아섰다. 집으로 가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섰을 땐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빗방울만 몸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발을 딛을 수가 없었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떠나면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알게 된 후로 6년, 좋아하게 된 후로 4년, 그와 교제한 후로 3년, 그 모든 시간들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눈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예견된 이별이었다. 그와 카게야마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건 애정이라는 감정으로 뛰어넘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좋아했고,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삐걱거렸고 몸은 부서져내렸다.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아무리 서로를 사랑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져간다면 관두는 게 옳지 않을까 하고. 아마도 오이카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예견된 이별이었다.


  이별은 예견했지만 그 후폭풍은 예견하지 못했다. 그것까지 예견하기엔 카게야마는 고작 스무 살의 나이에 불과했다. 그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니 그래도 버틸 만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오이카와의 입에서 이별 선언이 흘러나왔던 그 순간,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몸 안의 내장이 전부 뒤집어지는 느낌. 세상의 시간이 나에게만 멈춘 느낌.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카게야마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얼굴을 기억할 뿐이다. 그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저와 헤어지는 걸 기쁘게 여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 고통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찰나동안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비가 한층 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카게야마는 발걸음을 이어가는 걸 포기했다. 빗방울이 이렇게도 무거운 것이었던가. 카게야마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찬 기운이 몸을 감쌌다. 카게야마는 팔로 감싸 안은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비 특유의 비린내가 가까이 풍겨왔다. 차가운 빗물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뒤섞여 흘렀다.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텁텁한 공기가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카게야마는 한쪽 손을 들어 명치 부근을 세게 눌렀다. 진득한 것들이 잔뜩 엉겨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카게야마는 토해내듯 울음을 뱉어내었다. 비가 지면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 사이로 서러운 내음이 흩어졌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기서 뭐해?”


  누군가가 카게야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동시에 방금 전까지 몸을 꿰뚫을 듯이 내리던 비가 더 이상 내리지 않게 되었다. 카게야마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 손에 들린 비닐봉지 몇 가지들, 다른 한 손으로 든 붉은 우산. 그리고 더벅머리의 남자. 카게야마는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이 사람 자취방 근처였지. 잊었던, 혹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사실들이 머릿속을 흘러 지나갔다. 카게야마는 퍼렇게 질린 입술을 한 번 꾹 깨물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남자였기에 토해낼 만한 용기가 나는 것일지도. 


  “…집에 데려가줘요.”


* * *


  욕실에서 나와 빌린 남자의 옷을 껴입은 카게야마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식탁에 앉았다. 주방에서 물을 끓이던 남자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카게야마를 힐끗 쳐다보고는 작게 혀를 차며 도톰한 담요를 가져와 카게야마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갑자기 둘러진 담요에 놀라 몸을 들썩인 카게야마는 얼른 남자를 돌아보았지만 남자는 다시 전기포트 앞에 선 후였다.


  남자의 이름은 쿠로오 테츠로로, 카게야마와 같은 대학교의 배구부 선배였다. 그 전부터 고등학교 시절의 연으로 알고는 있던 사이었지만 말 그대로 ‘안다’의 의미였지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나서야 과거 네코마 고등학교의 주장이 현재 그곳에서 레귤러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안면이 있는 사람이 후배로 들어왔다는 것이 꽤 반가웠는지 쿠로오는 카게야마에게 제법 친근하게 굴어왔다. 쿠로오는 확실히 카게야마에게 있어 껄끄러운 성격의 사람이었다. 대놓고 어색한 기운을 풀풀 풍겨대는 카게야마에게 그래도 쿠로오는 계속해서 말을 붙이며 농을 건네 왔고, 결국에는 그 카게야마 마저 쿠로오 특유의 능글맞고 거침없는 성격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었다. 그렇게 나름대로 친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사이까지 발전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전 빗속에서 만났을 때 쿠로오의 얼굴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유라면,


  “대체 무슨 일이야?”


  쿠로오가 티백을 넣어둔 찻잔에 뜨거운 물을 따르며 물었다. 카게야마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담요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감추려고 애를 써도 결국 드러나게 될 사실이겠지. 카게야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헤어졌어요.”


  카게야마의 말에 졸졸거리던 소리가 잠시 멈췄다. 카게야마는 곁눈질로 쿠로오가 서있는 주방을 바라보았다. 물을 따르던 쿠로오의 손이 멈춰있더니 이내 다시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적당한 양의 물이 담긴 찻잔에 티백의 끈을 잡고 몇 번 담갔다 뺐다 하기를 반복한 쿠로오가 곧 카게야마가 앉은 식탁으로 찻잔 두 잔을 가지고 와 앉았다. 카게야마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뜨거움과 따뜻함의 경계에 놓인 온도가 고스란히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카게야마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앉은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곧장 카게야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좋아하지 마요.”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


  쏘아붙이는 듯한 목소리에 쿠로오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얼굴엔 여전히 미묘한 웃음기가 남아있어 카게야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쿠로오를 노려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에 쿠로오는 그 미묘한 웃음기를 끌어올려 온전한 미소를 입가에 올린 뒤 손가락을 뻗어 카게야마의 미간을 쿡쿡 두드렸다. 본능적으로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푼 카게야마는 한숨과 함께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좋아하고 있으면서.”


  그 작은 말소리를 들었는지 쿠로오는 소리 내어 호탕하게 한 번 웃고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작게 홀짝였다.


  “그래, 솔직히 약간은. 인정할게, 됐지? 그래도 대놓고 네 앞에서 신나할 정도로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쿠로오는 꾸준히 카게야마에게 대놓고 제 마음을 표현해왔다. 몇 번을 거절해도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사람이기에 그 정도로 사이가 껄끄러워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인과 이별한 직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대할 만한 사이 역시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 추레한 모습으로.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눈에 얼마나 제가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을 지 생각해보았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산도 없이 주저앉아 울고 있던 모습을. 절로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양새람.


  “보아하니 네 쪽에서 찬 건 아닐 거고. 어쩌다 차인 거야?”


  티백의 끈을 잡고 흔드는 쿠로오의 표정이 여전히 묘하게 신나 보여 카게야마는 흘러내리는 담요를 추스르며 식탁 밑에서 발을 세게 휘둘렀다. 길게 뻗고 있던 쿠로오의 다리에 제대로 맞았는지 쿠로오는 짧은 비명소리를 내며 다리를 접었다. 카게야마에게 차인 다리를 살펴보던 쿠로오가 고개를 들어 울상이 된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봤지만 카게야마는 쿠로오 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격 차이에요.”

  “몇 년을 사귀어놓고 이제 와서?”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버텨왔는데 이제 한계가 온 거죠. 아무리 서로를 좋아해도 그 감정이 서로를 힘들게 만들뿐이라면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고, 그만큼 나름대로 천천히 준비해온 이별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오이카와 선배도 저도.”


  카게야마의 말에 쿠로오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평소의 쿠로오와는 다르게 날카롭게 저를 꿰뚫는 느낌이라 카게야마는 슬쩍 쿠로오의 눈을 피했다. 저를 좋아한다 말하던 남자에게 애인과의 이별 사실을 알리고 있는 이 상황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는 것은 카게야마 역시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저를 대하는 이 남자의 감정을 존중했다. 존중했기에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당장 누군가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제 자신에게 위로받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지금의 카게야마에게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던데?”

  “…시간이 약이겠죠.”


  침묵 끝에 들려온 쿠로오의 말은 그 시선만큼이나 날카롭게 카게야마의 가슴을 파고들어왔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습관처럼 쿠로오에게 제 자신을 포장했음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포장하지 않으면 또 다시 추레하게 무너진 몰골을 보이고 말 테니까.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앞에서 절대로 그런 모습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 아냐 그거, 좋아하는데 헤어진다는 거.”


  쿠로오의 말에는 작은 가시들이 자잘하게 솟아있었다. 카게야마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서 애먼 찻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속 넓은 성격은 못 돼서 위로의 말은 못 해줘.”

  “…딱히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헤어졌냐고 타박하는 말도 못 해줘.”

  “…….”

  “할 수 있는 말이 있긴 있는데.”


  쿠로오의 마지막 말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찻잔에 담긴 티백만 휘휘 저어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다시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었다. 뜨거움과 따뜻함 사이에 위치해있던 찻잔은 이젠 적당히 훌훌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어있었다. 티백으로 차를 휘휘 젓던 쿠로오의 손이 멈췄다. 쿠로오의 검은 눈이 카게야마에게로 향했다. 그 덕에 카게야마는 괜히 생각에도 없던 차를 한 모금 꿀꺽 삼켰다.


  “오이카와랑 헤어졌으니까 이제는 슬슬 받아줄 수 있는 건가?”


  하마터면 크게 사레가 들릴 뻔한 카게야마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려 작게 기침을 몇 번 한 후 다시 쿠로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쿠로오의 얼굴에는 능청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얼굴이 지금 그의 진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얼굴임을 알 수 있었다. 쿠로오는 늘 그랬다. 장난처럼 보이는 듯한 말을 툭툭 던지지만 무엇 하나 거짓인 것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아직 물기가 어려있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작은 물방울들이 식탁 위로 투둑 떨어졌다.


  “아뇨.”

  “왜? 이제 애인도 없는데.”


  쿠로오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찻잔에서 티백을 건져내고는 반문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제가 선배를 거절했던 건 애인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지.”


  카게야마의 말에 쿠로오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애인이 있었더라도 내가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이 식어있던 상태였다면 혹시 선배의 마음을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오이카와 선배를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고 있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한두 번 거절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어쩐지 그 무게가 남달랐다. 카게야마는 괜한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고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쿠로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며? 혹시나 쿠로오가 그렇게 되물을까봐 카게야마는 미리부터 걱정이 됐다. 받아칠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얼마만큼의 긴 시간이건 간에 언젠가는 오이카와를 좋은 추억 속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말문이 턱턱 막혀올 지라도 더 이상 오이카와를 좋아하지 않게 될 날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4년, 4년의 시간을 좋아했다. 그 4년의 시간이 소중한 마음의 시간에서 순식간에 별 거 아닌 것으로 변해버릴 날이 두려웠다. 그것이 얼마나 치기어린 생각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은 그랬다.


  “어렵네.”


  한참의 시간 끝에 쿠로오가 꺼낸 말은 저게 전부였다. 카게야마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면 그냥 다시 사귀자고 말하지 그래?”

  “…….”

  “아, 이 말은 안 한다고 했는데.”

  “…선배답지 않네요.”

  “그러게.”


  어렵네. 다시 한 번 쿠로오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 역시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어려움과 제가 말하는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좋아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관계가 어려웠고, 쿠로오는 그런 카게야마가 어려웠을 것이다. 좋아하면 사귀고, 마음이 식으면 헤어지는 그 당연한 이치를 어째서 저렇게 어렵게들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쿠로오는 어렵다는 말을 뱉어냈을 것이다. 그 어려운 감정들 속에서 괜히 애꿎은 저만 휩쓸려 다닌다는 생각에 억울하다는 기분도 들었을 것이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여 잔잔히 일렁이고 있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식어가는 차에서 희뿌연 김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희미하게 올라왔다.


* * *


  체육관으로 향하는 카게야마의 발걸음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저 오이카와의 경기를 보러 간다고 긴장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지만 쿠로오는 달랐다. 


  “괜찮겠어?”

  “…사적으로 만나는 자리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쿠로오는 말없이 카게야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가만히 그런 쿠로오의 손길을 받고만 있었다.


  오이카와와 헤어진 지 세 달이 조금 안됐다. 생각보다 고통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 마음만은 그대로였지만, 어찌됐건 멀쩡하게 잤고 멀쩡하게 밥을 먹었고 멀쩡하게 배구를 할 수 있었다. 가끔씩 오이카와의 이름이 들려올 때면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아파오긴 했지만 그래도 눈물이 쏟아진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스스로를 나름대로 대견하게 여기며 대학리그의 새 시즌 일정표를 받아들었다. 개막전은 지난 시즌 우승 학교였던 오이카와의 학교에서 열리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학교의 이름을 쓸어보았다. 가슴 끝자락이 저려왔다. 그래도 제 학교와 오이카와의 학교가 맞붙는 날은 조금 더 뒤라 그 때쯤이면 이젠 정말로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연습 대신 다 같이 개막전을 보러가자고 제안한 감독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오이카와의 학교와 카게야마의 학교는 둘 다 늘 상위권에서 우승을 다투는 베스트 4에 속한 학교들이었고, 오이카와는 이번 시즌에서 새롭게 주장을 맡게 되었다. 주장이 바뀌었으니 팀의 색깔 역시 바뀌었을 거라며 직접 현장에서 보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며 이번 시즌은 다시 우승컵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감독의 굳은 결의 아래 세워진 스케줄이었다. 그 날 이후로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침 시즌오프 기간이었던 탓도 있었고, 카게야마가 억지로 오이카와가 있을 법한 장소를 피해 다닌 것도 있었다.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방적으로 본다는 점이었지만, 그마저도 그렇게 자신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주어진 자리에서 최대한 구석진 자리로 골라 앉았다. 그래봤자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VIP석인 탓에 거기서 거기였지만. 


  이리저리 워밍업을 하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오이카와를 찾으려 드는 자신을 깨닫고 카게야마는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이카와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잘생긴 외모 탓도 있었지만 남들과 다르게 서포터를 흑색과 백색 짝짝이로 착용한 탓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게야마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짧은 탄성을 흘렸다. 옆자리에 앉은 쿠로오가 슬쩍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갑자기 아래서부터 범람하는 감정에 질끈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쿠로오의 손이 올라왔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급히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이카와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양쪽 무릎 모두 흑색의 서포터를 착용했었다. 오이카와가 각각 다른 종류의 서포터를 착용하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부터였다. 오이카와의 생일을 앞두고 어떤 선물을 준비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카게야마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건, 요즘 들어 점프를 할 때마다 왼 무릎이 삐걱이는 것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전화통화 속 오이카와의 목소리였다. 무릎 관절을 꽉 잡아줄 수 있도록 조금 더 신축성이 좋은 재질의 서포터를 선물하면 좋아하실까? 그렇게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금세 또 다른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오이카와가 지금 착용하는 서포터는 미야기 현내 베스트 세터 상을 받았을 때 상과 함께 상품으로 수여받은 것으로 오이카와가 가장 아끼는 서포터였다. 이미 그렇게 아끼는 서포터가 있는데 제가 선물로 서포터를 건네 봤자 한두 번 착용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하는 것에 미숙하고 서툴렀다. 카게야마가 생각할 수 있는 선물은 고작해야 먹을거리 같은 것이 전부였고, 그것들은 오이카와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에게서 충분히 넘치도록 받을 것이 뻔했다. 카게야마는 고민 끝에 결국 서포터를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설사 한두 번 착용하고 말지라도 그게 어디냐는 결론이었다.


  오이카와의 생일날, 근처 카페에 자리 잡은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으로 쇼핑백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꺼내 저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는 오이카와에게 슬그머니 밀어 주었다. 서포터를 사며 200엔을 추가로 지불해 완성된 선물 포장은 꽤 그럴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옆에 놓인 쇼핑백—선물이 수북하게 쌓인—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오이카와 선배. 그… 별 건 아니지만…”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말을 뒤로하고서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양말 속을 뒤져보는 어린 아이의 들뜬 표정과 비슷한 얼굴로 선물 상자를 열어보았다. 가지런히 놓인 백색의 서포터 한 쌍이 오이카와를 반겼다. 오이카와는 말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조심스레 서포터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전에 무릎 안 좋다고 얘기한 거 기억하고 사준 거야?”


  오이카와의 물음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다시 상자를 닫고 카게야마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보기 드문 환한 얼굴이라고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안목이 있네, 토비오. 오늘 받은 선물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오이카와의 얼굴이 어찌나 심장을 내려앉게 하던지.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와 헤어지고 난 뒤에도 한참을 더 가슴을 부여잡고 있어야 했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도 봤으니, 한 번이라도 착용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그렇게 홀로 집에서 자꾸만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달래야만 했다. 그 후에 아오바죠사이의 경기를 보러 갔을 때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이고서 힘겹게 얼굴을 달래야만 했다. 오이카와의 무릎에는 원래 오이카와가 소중히 여기던 흑색의 서포터와, 카게야마가 선물로 준 백색의 서포터가 각각 짝짝이로 착용되어 있었다. 오이카와는 다음 경기에도, 다다음 경기에도, 다다다음 경기에도 계속해서 서포터를 그런 식으로 착용했다. 그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습관처럼 굳어버린 탓에 계속 차고 있을 뿐이라 할지라도 간신히 가라앉혀놓았던 카게야마의 감정을 다시금 요동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흐트러짐 하나 없는 플레이로 팀을 하나로 만들었고, 멋지게 공격을 지휘했다. 장내의 모두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남자를 주목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며 경기 전체를 바라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이카와 단 한 사람이었다. 세 달 동안 괜찮았을까, 혹시 내 생각은 했을까, 연습에는 지장 없었을까, 잠은 잘 잤을까, 이런 자질구레하고도 미련한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비참했다. 좋아하는 이가 멋지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소모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제가 그렇게 구질구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의 어깨에 얹혀져있던 쿠로오의 손에 힘이 실렸다.


  경기는 순식간이었다. 높은 점수차와 함께 깔끔하게 셧아웃으로 오이카와의 학교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동료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눈 오이카와가 물병과 수건을 보급받기 위해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 카게야마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이쪽으로 잠시 향한 것도 같았다. 카게야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제 팀의 감독이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 체육관의 구조상 모든 출구는 1층에 있었기에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코트를 거쳐야만 했다. 오이카와가 뒷정리에 정신이 없는 동안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가고 싶었다. 다행히도 곧 슬슬 학교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카게야마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빠르게 일행을 따라 나갔다. 옆에서 쿠로오가 ‘죄 지었냐?’ 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신경 쓸 여유가 나지 않았다.


  “…토비오?”


  카게야마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먼저 뒤를 돌아본 것은 쿠로오였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이름을 부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사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해서 듣는 순간 발끝이 저려오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시선의 끝에는 세 달 만에 제대로 마주하는 얼굴이 서있었다. 카게야마는 풀릴 뻔한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서 간신히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서려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여전히 혈색 좋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 카게야마는 마음 한 쪽이 싸해지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까 언뜻 보고 잘못 봤나 싶었는데 진짜였네.”


  오이카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게야마는 대답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말하는 것에 능숙한 오이카와와는 다르게 카게야마에겐 너무나도 벅찬 상황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제 팔을 슬쩍 잡아당기는 쿠로오의 손이 느껴진 것도 같았지만 카게야마는 딱딱하게 굳어 오이카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이카와의 입에서 뱉어진 작은 한숨이 날아와 카게야마의 앞머리를 살랑였다. 오이카와는 물병을 들어 한 모금 목을 축이고는 다시 카게야마를 바로 바라보았다. 


  “…시간 되면 잠깐 얘기 좀 할래?”


  카게야마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오이카와의 웃는 얼굴은 세 달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잔잔한 말투만큼은 낯선 것이어서 카게야마는 한참을 오이카와의 말에 대답하지 못 했다. 카게야마는 초조한 듯 입술을 짓이기다가 물끄러미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쿠로오는 심드렁한 얼굴로 카게야마의 머리를 휘젓듯이 쓰다듬었다. 


  “감독님한테 말해줘?”


  쿠로오의 말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본 오이카와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 * *


  “잘 지냈어?”


  한참의 침묵 후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오이카와였다. 카게야마는 어색함을 이기기 위해 괜히 이로 잘근거리고 있던 빨대의 끝을 놓았다. 어쩌다 우리는 저 흔한 인사마저도 쉽사리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아니, 애초에 연인 사이에서 쓸 일이 없는 말이었지. 카게야마는 차오르는 씁쓸함을 목구멍 너머로 오렌지 주스와 함께 삼키며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잘 지냈어요. 오이카와 선배는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오이카와는 늘 카게야마의 거짓말을 손쉽게 파악해버리곤 했다. 제 서툰 거짓말이 이번에는 부디 먹혀 들었기를 바라며 카게야마는 질문의 화살을 오이카와를 향해 돌렸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되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서 빨대를 들어 커피를 휘휘 저어댔다. 커피와 우유로 층이 나누어져있던 카페라떼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섞이기 시작했다. 연한 갈색으로 변한 커피를 오이카와는 빨대를 물어 한 모금 삼키고는 카게야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제 어설픈 거짓말이 들통날까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할 말은 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게야마는 뭉그러진 빨대로 주스 속에 둥둥 떠다니는 애먼 오렌지 과육을 쿡쿡 찔러댔다. 


  “난 잘 못 지냈는데.”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속에 가려진 오이카와의 진심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카게야마는 돌려 말하는 화법에 약했다. 대충 이런 의미일까 하고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에 쉽사리 확신을 내리지는 못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게야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난 너를 좋아했지만, 우리는 결국 서로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했기에 헤어지자고 말한 거였어. 너도 알고 있었겠지만.”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헤어지게 되면 당장은 힘들지라도 차차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이별을 결심한 거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만 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그런데 도저히 괜찮아지지가 않더라.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기는커녕 더 괴로워지기만 했어. 어떻게든 떨쳐내 보려고 배구에만 전념해보기도 했는데… 소용이 없더라고. 자꾸만 습관처럼 너희 학교 앞을 지나고, 너희 집 근처를 지나고, 우리가 갔던 카페, 영화관, 공원들을 지나게 돼. 겉으로 보기엔 분명 정상적으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실상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고, 먹어도 먹는 게 아니고, 자도 자는 게 아닌 느낌.”


  오이카와는 평소의 그에게선 듣기 힘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카게야마는 바지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오이카와의 말은 전부 그간 제가 겪었던 일들이었다. 이 사람도 저와 같은 고통을 겪고, 저와 같이 생각했구나 싶어 안쓰럽기도 전에 먼저 안도감이 내려앉았다. 그런 제가 혐오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사람도 똑같이 나 때문에 힘들었구나. 그 작은 생각은 카게야마의 마음 어두운 곳에 자리 잡아 금세 꽃을 피워나갔다. 


  “그렇게 힘겹게 살고 있으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싶더라. 어이가 없는 거야, 조금 덜 힘들어보겠다고 선택한 길이었는데 오히려 더 힘들어하고 있으니까. 너는 잘 지냈다고 하니까 다행이지만 나는 그랬어. 그래서 결국 생각한 게,”


  오이카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똑같이 힘들 거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서 힘든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바지자락을 쥐고 있던 카게야마의 손이 힘없이 풀어졌다.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을 들어 유리잔을 쥐고 빨대 없이 통째로 주스를 들이켰다. 지금 제가 어떤 기분인지 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속이 울렁거릴 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자꾸만 미끄러지는 잔을 세게 쥐고 조심스레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름대로 조심스레 내려놓는다고 놓은 것이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서 달그락거리다 오이카와가 빠르게 손을 뻗어 붙잡은 탓에 멈춰 섰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잔을 놓으며 카게야마에게 눈을 맞췄다. 카게야마는 차마 그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너는 어때, 토비오?”

  “…….”

  “다시 시작하는 거야. 깔끔하게 처음부터 다시.”

  “…….”

  “다시 시작하면 달라질 지도 몰라. 우리는 전보다 더 서로에게 맞추려 들 테고, 예전과 같은 수순을 밟지 않기 위해 서로를 갉아먹는 것 역시 그만둘 테지. 적어도 나는 그래. 나는 이 세 달간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많은 것을 깨달았어. 계속 후회했어. 내가 더 어른인 만큼 조금만 더 내가 나를 놓아버릴 걸 그랬다고. 그랬다면 너도 나도 덜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지는 않지 않았을까. 계속 후회했어. 이미 진작에 결심한 사실이고 너를 언제 만나서 말하면 좋을까 타이밍만 재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만나게 됐네.”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였다. 오이카와가 말하는 바는 전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두근거렸다. 여전히 오이카와를 좋아하고 있던 저처럼 오이카와 역시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카게야마는 자신이 없었다. 당장 다시 사귀게 된 직후로는 물론 저도 그도 최선을 다해 상대를 감싸 안겠지만 또다시 시간이 흐른다면, 그 후로도 계속 서로를 안아주고 부딪치지 않게 피해줄 수 있을까? 오이카와는 저보다 더 어른이었다. 오이카와라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카게야마 자신은 오이카와와 다르게 다른 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에 더디었다. 그래서 두려웠고, 불안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시 오이카와를 괴롭히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을 오이카와는 다시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그저 참고, 참고, 버틴다면. 그 사실을 후에 알게 됐을 때도 계속해서 그를 잡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어렵다. 참 어려운 것이었다. 그저 좋아할 뿐인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고개를 숙이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이카와의 시선이 저에게 바로 꽂혀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이카와는 물끄러미 카게야마가 일어나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서둘러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더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간 생각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냉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의자를 뒤로 빼고 바깥쪽으로 다리를 뻗었다. 


  “생각 끝나면,”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슬쩍 오이카와를 내려다보았다. 


  “연락 줘. 기다릴게.”


  오이카와가 웃어보였다. 카게야마는 따라 웃을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몇 걸음 걷지 않아 문득 아까 전 떠올렸던 것이 다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카게야마는 다시 등을 돌렸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을 향해있었다. 더 할 말 있냐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는 우물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선배, 그 서포터… 왜 안 빼셨어요?”

  “네가 준 거?”

  “……네.”


  오이카와는 손으로 턱을 몇 번 매만지다가 닫았던 입을 열었다.


  “바꿔 차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더라고. 가장 중요한 물건을 가장 중요한 사람이 선물해준 거라고 생각하니까 뺄 수가 없었어. 아, 그래서 더 힘들었나? 볼 때마다 생각이 나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오이카와의 앞에 더 서있을 자신이 없어 카게야마는 급하게 알겠다고 둘러대는 식의 인사를 하곤 그대로 뛰쳐나오듯 카페를 걸어 나왔다. 유리문에 걸린 방울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카게야마는 카페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속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이 마구잡이로 들끓고 있는 이 느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길도, 방향도 무엇도 모르고 그저 아무렇게나 뛰었다. 그런 카게야마를 막은 것은 갑작스레 제 오른쪽 손목을 잡아온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카게야마는 급하게 내딛던 발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저를 잡은 이를 돌아보았다.


  “집 가는 길 그 쪽 방향 아닌데 어딜 그렇게 뛰어가?”


  카게야마는 멍하니 능청스러운 그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쿠로오 테츠로였다.


  “…아직 안 가셨어요?”

  “혹시 그 때처럼 혼자 처량하게 울고 있을까봐 걱정돼서.”


  카게야마는 그 말에 반박할 기력도 없어 그저 쿠로오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이 사람에게 방금 전의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아무리 다른 이의 감정을 고려하는데 더딘 카게야마여도 그런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카게야마 혼자서는 평생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할 이 이야기에 대해서 당장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옴싹거렸다. 그것을 먼저 눈치 챈 건 쿠로오였다.


  “할 말 있어?”

  “저, 그게….”

  “오이카와 얘기겠지. 무슨 얘기 했는데?”


  아예 쿠로오 쪽에서 먼저 이렇게 얘기를 꺼내주는 배려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참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멋진 사람에게 이 정도의 대우밖에 해주지 못하는 제가 미워질 정도였다.


  “오이카와 선배가,”


  카게야마는 잠시 입을 닫았다. 타인에게 그 이름을 꺼내는 것이 아직도 힘이 들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다시 사귀고 싶대요.”


  쿠로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카게야마는 떨리는 손을 들어 방금 전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앞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겼다. 


  “헤어지고도 힘들 바에는 그냥 옆에 두고서 힘든 게 낫겠다고 그냥 깨끗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재요. 솔직히 기뻤어요. 오이카와 선배도 나처럼 똑같이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게, 참 구질구질하지만 기뻤어요. 그런데 다시 사귀는 건… 모르겠어요. 내가 다시 그 사람을 힘들게 할 것 같아서 무서워요. 다시 똑같은 루트를 밟고, 똑같이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워요. 만약 그렇게 됐을 때 내가 그걸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나는… 나는 어떡하면 좋을지…”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목이 메여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이 사람 앞에서 그런 꼴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로 카게야마는 고개를 숙이고 간신히 울음을 목구멍 너머로 삼켜내었다. 카게야마의 동그란 머리 위로 쿠로오의 크고 단단한 손이 턱 얹어졌다. 카게야마는 다시 한 번 뜨거운 응어리를 삼켜내고서 천천히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다니, 카게야마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쿠로오의 목소리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나름대로 뼈가 있어 카게야마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쿠로오는 그런 카게야마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슥슥 쓰다듬고는 양손으로 어깨를 쥐고 얼굴을 마주했다.


  “솔직하게 말해줄까, 드라마 같이 말해줄까.”

  “…둘 다요.”


  카게야마의 말에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내 고민하는 척 턱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 걷어차고 나한테 와. 이게 전자.”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더 할 말이 뭐가 있겠어?”

  “그럼 후자는요?”


  카게야마의 물음에 쿠로오는 아까보다 조금 더 한참동안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카게야마는 물끄러미 쿠로오의 눈을 마주했다. 정말로 진지한 조언을 해주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일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내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쿠로오는 제 턱을 매만지던 손을 서서히 카게야마의 볼로 옮겨갔다. 아직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뜨거운 뺨에 곳곳에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이 둘러졌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마. 너 오이카와랑 처음 사귈 때 헤어질 거 걱정하면서 사귄 거 아니잖아. 오이카와가 그랬다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그러면 그 마음가짐으로 생각해. 오이카와랑 처음 사귈 때의 마음가짐으로.”

  “…….”

  “솔직히 너 내가 걷어차라 했다고 해서 당장 걷어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한테 듣고 싶은 건 그냥 그거 아냐? 네 본능적인 생각이 정당하다고 말해줄만한 합리적인 이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전부 다 너한테 달린 것뿐이니까. 용기 내는 것도 너고, 숨는 것도 너야.”


  카게야마는 멍하니 쿠로오의 말을 귀에 담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 속내가 들킨 기분이었다. 애초에 카게야마는 쿠로오가 다시 사귀지 말라고 대답했어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을 터였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제 본능이 따르고 싶었던 길을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은 것. 제 본능이 원했던 건 그것뿐이었다. 억지로 틀어막으려 해도 별 수 없었다. 쿠로오에게 듣고 싶었던 것 역시 쿠로오가 말한 대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도박과도 같은 생각에 힘을 실어줄 만한 제 3자의 타당한 이유. 그런 것이 듣고 싶었을 것이다. 카게야마는 쿠로오에게 물었던 것이 삽시간에 창피해졌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니었다. 이제 갓 미성년자 딱지를 뗐을 뿐이지만 아무쪼록 성인이었다. 홀로 생각하고 설 수 있는 성인.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뺨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짜증나 죽겠네 정말.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러는 거야? 어?”

  “……너무 열 내지 않아도 돼요. 선배가 말한 대로 결정하는 건 저니까요. 선배가 자책하거나 후회하거나 하지 마요. 다 제 의지대로 선택한 길이니까.”

  “지금 나 위로하는 거야 카게야마?”


  말만 들으면 잔뜩 날이 서있는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쿠로오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평소처럼 싱글거리는 웃음을 한가득 얼굴에 떠올린 채로 쿠로오는 몸을 조금 낮춰 카게야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카게야마는 쿠로오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벌어진 일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양 뺨을 감싼 그대로 얼굴을 끌어당겨 우물거리던 그 입술에 짧게 제 입을 대었다가 떨어졌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에 카게야마는 멍하니 눈을 끔뻑거리며 쿠로오를 올려다보았다. 쿠로오는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켜 카게야마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 정도는 봐줘.”

  “…….”

  “위로할 필요는 없어. 천천히 기회만 보고 있는 거지 얌전히 오이카와한테 넘겨준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쿠로오는 느리게 카게야마에게서 발걸음을 떼어냈다. 


  “나도 나름대로 속 좁은 남자라서. 먼저 가볼게, 카게야마. 내일 보자.”


  쿠로오는 끝까지 얼굴에 띄운 웃음을 내려놓지 않고서 카게야마에게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카게야마는 얼떨떨하게 그런 쿠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급하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플립을 열었다. 키패드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이내 숫자 1을 길게 꾸욱 눌렀다. 차마 지울 수가 없어 지우지 못하고 있던 번호가 빠르게 액정 위에 떠올랐다. 잔잔한 기타 소리와 함께 애절한 음색의 보컬이 마치 뭉쳐버린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음악이 카게야마의 귓가를 간질였다. 곧 음악소리가 끊어졌다. 카게야마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잡아 들었다. 토비오?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음악이 멈춘 빈 공간을 채웠다.


  “…아직 카페에 계세요?”


* * *


  멀리서부터 보이는 오이카와의 갈색 머리에 카게야마는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카페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이고 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향기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에 카게야마는 제 눈앞에 들어온 그 익숙한 등을 향해 눈을 질끈 감고서 팔을 벌리고 그대로 뛰어들었다. 오이카와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리는 듯했지만 빠르게 다시 균형을 잡았다. 오이카와는 뒤를 돌아보지도, 저를 끌어안은 이의 팔을 잡아보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토비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저 이렇게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웠던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어 안았다. 곧 오이카와의 손이 제 허리에 둘러진 카게야마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오이카와 역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붉은 석양빛이 그렇게 둘을 내리쬐고,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질 동안 둘 사이에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선배.”


  카게야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일단 입을 열고나니 그 다음은 생각하는 그대로 툭툭 목소리로 변해 튀어나왔다. 


  “사실은 하나도 잘 지내지 못 했어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잘 지낸다고 괜히 거짓말 해봤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해요. 사귀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나는 오이카와 선배처럼 빠르지가 않아서 느리고 답답하겠지만 노력할게요. 이번에는 정말로 선배가 힘들지 않게 잘 할게요. 한 번 실수했으니까, 한 번 다 겪어봤으니까.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다시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

  “토비오.”


  불안하게 흔들리던 카게야마의 목소리를 끊은 것은 오이카와의 부드러운 부름이었다.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멎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카게야마의 팔이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다가, 저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다시 죄어들었다. 오이카와는 제 가슴에 이마를 박고 있는 탓에 둥그런 뒷통수만 덩그러니 보이는 카게야마의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너 혼자 사랑하는 게 아니야.”


  오이카와를 끌어안은 카게야마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너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이카와는 제 품에서 떨고 있는 카게야마를 느끼곤 천천히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따뜻한 향기도, 노을의 향기도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우리가 잘하면 돼.”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여름의 마지막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잘 될 거야.”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우는 것도 같았다.




  모든 것에는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같이 떠오르는 태양마저도 그렇다. 제 몸을 불살라 이 땅을 비추고, 그 열기를 나누어주다가도 저녁 무렵엔 슬그머니 달의 뒤로 숨어 지친 몸을 편히 뉘고 크게 숨을 몰아쉰다. 다시 뜨겁게 타오를 내일을 위해서.


  마지막 힘을 짜내어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아슬아슬하게 지평선의 끝에 걸려있었다. 








And true love waits in haunted attics

And true love lives on lollipops and crisps

Just don't leave, don’t leave, don’t leave,

Don't le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