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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카게] 나는 꽃을 키운다

팥_ 2014. 9. 13. 21:55





  나는 요즘 꽃을 키운다.

  이 꽃이 자라는 원동력은 물도, 햇볕도, 그 어떤 영양제도 아니다. 

  이 꽃은 사람의 피를 마시고 자란다.


  ‘피로 자라는 꽃이래.’


  나는 건네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끄러미 검은 흙으로 가득 찬 화분을 바라보았다. 촉촉한 흙 속에는 새끼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씨앗이 묻혀 있다고 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 검고 습한 흙을 바라보는 것을 관두고 물을 떠와 조금 흘려보았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헛웃음을 뱉어냈다. 하긴, 그 어떤 꽃이라도 물을 조금 준다고 해서 순식간에 자라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까 전보다도 더 젖은 흙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자리를 떴다. 어련히 자라나겠지 싶었다. 그렇게 나는 화분을 잊어버렸다.

  일주일? 아니면 이주일이나 지났을까. 나는 문득 창가에 놓인 화분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문득이었다. 마치 화분이 나를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기묘한 기운이 나를 감싸고 일렁거렸다. 화분은 여전히 검은 흙으로 뒤덮여 그 어떤 싹도 보이지 않았다. 썩어버린 걸까. 그런 정상적인 생각이 채 들기도 전에 나는 조용히 서랍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 들고 왔다. 손가락을 내밀어 작은 화분 위에 올리고 따끔할 정도로 손가락에 상처를 내었다. 곧 붉은 핏방울이 몽글몽글 샘솟았다. 나는 손가락을 뒤집어 샘솟은 핏방울들을 화분에 떨어뜨렸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세 방울 째에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조금 뒤로 물러났다. 흙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진인가? 아니다. 다른 곳은 고요했다. 오로지 화분 속의 흙만이 들썩이고 있었다.

  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흙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아. 꽃망울이었다. 이토록 빨리 자라날 수 있다니. 나는 조금 주춤거리다 상처가 난 손으로 천천히 꽃망울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팟,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꽃망울이 터지듯 제 속을 펼쳐냈다. 나는 멍하니 피어난 꽃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꽃이었다. 꽃잎은 아주 짙은 붉은색이었고, 이파리는 여리여리하게 연한 풀색이었다. 그 꽃잎의 색은 아주 기묘해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붉은 꽃잎을 어르듯 쓰다듬어보았다. 꽃잎이 흔들렸다.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께름칙함에 급히 손을 떼어냈다.


  다음 날은 피를 주지 않았다. 그래도 생생하게 피어있는 듯했다. 나는 어쩐지 좋지 못한 기분이 들어 일부러 화분에 다가가지 않았다. 화분에 다가가지 않도록 의식했다는 것은 사실 화분에 다가가고 싶었던 내 무의식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나는 저 화분이 나를 부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모두에게 비웃음을 살 이야기지만. 그랬기에 일부러 더 화분에게서 멀어지려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에서 나를 부르는 의문의 목소리는 더 짙어져만 갔다. 나는 화분이 놓여있는 창가를 멀리서 노려보았다. 꽃은 아직도 생생하게 피어있었다.

  그 다음 날, 꽃은 놀라울 정도로 풀썩 시들어있었다. 그 짙고 생생했던 붉은색은 마치 색소가 전부 빠져나간 듯 연하고 흐려진 색으로 변해있었고, 위풍당당하게 제 자태를 뽐내며 펼쳐져있던 꽃은 고개를 숙이고 볼품없는 모양새로 변해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어제는 유혹이라는 방법으로 나를 꾀어내는가 싶더니 이제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역시도 하나의 생명인 것을. 나는 별 수 없다는 생각에 나이프를 꺼내 아물었던 어제의 상처를 다시 그어냈다. 샘솟는 핏방울을 다시 떨어뜨려주자 놀랍게도 지끈거렸던 머리까지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화분을 빤히 바라보다가 색을 잃은 꽃잎을 톡톡 두드리고서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꽃이 또다시 나를 부르는 느낌에 가까이 가보았을 땐, 꽃은 제가 언제 시들었냐는 듯 어제의 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꽃잎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나는 꽃을 키웠다. 매일매일 내 피를 받아먹으며 꽃은 생기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미묘하게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꽃송이 자체의 크기도 커져갔으며, 그런 꽃을 아슬아슬하게 받치고 있던 줄기도 점점 굵고 길게 자라나고 있었다. 문제는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내게 피를 요구하는 양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세 방울로 피어났던 그 꽃은, 이제는 피를 방울 단위가 아닌 쪼르륵 흘려주는 정도로 주어야만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나는 그 꽃에 내가 먹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꽃이 생생하면 생생할수록 나는 피폐해져갔다. 그럼에도 이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꽃은 아름다웠고, 자꾸만 나를 불러댔다.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요. 나는 머리를 짚으며 다시 한 번 내 피를 흘려내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나날이 환자처럼 변해갔다. 나름대로 건강한 윤기를 띠고 있었던 은색 머리카락은 점점 푸석푸석해져 마치 노인의 머리카락처럼 변해갔고, 피부 역시 하루하루가 다르게 거칠어지더니 눈 밑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점점 깊게 드리워졌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떼며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하는 짓이 미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는, 저 꽃이 자라나는 광경에 매료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꽃은 사라져있었다. 작은 화분과 그 안을 메운 검은 흙, 그리고 화분의 둘레로 떨어져있는 붉은 꽃잎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 생명을 바쳐서 키워낸 꽃이. 미친 사람처럼 흙을 파헤쳐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얀 창틀 위로 검은 흙이 흩뿌려졌다. 어디야, 어디야, 어디야? 내 부름에도 꽃은 대답해오지 않았다. 나는 문득 흙을 파헤치던 손을 멈췄다. 인기척. 나 이외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가 없는 이 집에 또 다른 인기척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두려움에 물든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서있었다. 붉은 꽃잎을 검은 옷 곳곳에 묻힌 채로.


  “안녕하세요.”


  소년은 내게 작게 인사를 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것이 우습게도 모순적인 표현이란 걸 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이곳에서의 내 인간관계는 지독히도 편협했다. 내 영역 안에 넣어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 마저도 얼굴을 떠올리려 하면 가물가물한 정도였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생기가 넘치는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턱 막히고,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소년의 인사에 대답하지 못했다. 소년은 천천히 나에게 걸어왔다.


  “저를 키워주신 분이죠?”


  그 말에 그다지 놀라지 않는 나를 보며 나는 더 놀랍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처음 인기척이 느껴졌을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언제나 나를 부르던 꽃의 목소리. 그것과 같은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내 앞에 걸어와 우뚝 멈춰 섰다. 거의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그를 소년이라 칭했지만 사실 그는 그렇게 작지 않았다. 나와 거의 비슷한, 나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키였다. 다만 그에게서 풍겨지는 그 열기, 생기, 그런 것들로 소년이라 칭했을 뿐이었다. 나는 거칠고 흉해진 내 얼굴을 만져보았다. 나에게는 없는 것들. 내가 그에게 건네준 것들. 아,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을 넘실거렸다. 나는, 대체, 무엇을.

  소년은 내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손은 따뜻했고, 또한 살아있었다.


  “마지막까지 제가 살 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 목소리와 함께 소년은 내 목덜미에 제 이를 박아 넣었다. 세상이 아득해졌다. 아득해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간신히 소년의 팔을 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내게 이 꽃을 건네준 사람은 누구였나? 나는 이곳에서 누구였는가? 이 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였나? 

  

  나는, 나는, 살아있었나?


  그 어느 물음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 * *


  주변이 시끄러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앞이 흐릿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나는 나를 간절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몇 번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이 그 사이로 흘러내렸다. 눈물과 함께 서서히 시야가 맑아졌다. 하얀 천장과 형광등,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카게야마 토비오.

  나는 목소리를 내려 입을 벙끗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내 입술을 산소호흡기와 같은 것이 덮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무겁게 내려앉은 팔을 천천히 들어 카게야마에게로 뻗어보았다. 카게야마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아왔다. 그래, 이 얼굴. 꿈에서 봤던, 내가 키워낸 꽃.


  그제야 나는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연인이자 내 후배, 카게야마 토비오, 내가 너를 키웠지. 너는 내 열정을 먹고 자랐어. 그 열정은 내 생명과도 같았다. 나는 나의 카게야마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기뻤다. 그 기쁨의 바닥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암담하고 시커먼 감정이 기름의 찌꺼기처럼 꿈틀대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는 너를 키웠다. 마침내 완벽한 꽃으로 피어난 너를 보면서 결국 내게 남은 것은, 기쁨도 즐거움도 아닌,


  절망감.


  그간 내가 거짓된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던 기쁨만큼 절망감은 한 순간에, 거대한 해일처럼 나를 뒤덮었다. 그것은 이미 생명력을 잃고 약해져 스러져가는 내가 버틸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내가 키워낸 꽃을 보며 나는,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 절망감뿐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버틸 수 없었던 것은, 그 절망감을 느끼는 내 자신이었다. 혐오스럽고, 역겹고, 구역질이 나는 꼴을 한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나는 천천히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이프로 손목을 그었다. 남은 생명력이 상처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스가와라 선배, 스가와라, 선배, 선배…”


  내 손을 붙잡고 그 손에 제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나의 꽃, 나의 카게야마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항상 윤기가 흘렀던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고서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어린 아이처럼 늘 생기를 띠고 있었던 그 볼 역시 푸석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마치 꿈속의 나처럼.

  그 빠져나온 생명력은 천천히 나에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내 안의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느낌. 거북한 느낌.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나를 갉아내어 카게야마를 키웠다. 그리고 그 살과 뼈를 다시 갉아내어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지금,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것은 꿈의 마지막처럼 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들썩이는 카게야마의 어깨 위로 붉은 꽃잎이 환상처럼 내려앉았다.









#하이큐_글_전력_60분

주제 ;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