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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카게쿠니] 사춘기

팥_ 2014. 9. 12. 22:59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붉어진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정말이지 언제부터였을까. 저 ‘코트 위의 왕’을 이런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그것은 소리 없이 차올라 서서히 발끝을 적셔오는 감정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몸의 절반 정도가 흠뻑 젖어버린 채였다. 어리둥절했다. 왜 옷이 젖어있는 거지? 나는 한참을 젖어버린 옷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섬광과도 같은 것이 스쳤다. 그 때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시선의 끝에는 카게야마 토비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카게야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옷은 더더욱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마침내 전신이 물에 젖은 꼴이 되고서야 나는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저 녀석을 좋아하고 있음을.

  그러나 인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오이카와 선배처럼 여자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입도 아니었고—카게야마가 여자아이들과 같다는 소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막연하게 어차피 좋아하게 되었으니 기왕이면 좋은 사이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지 그것을 위해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늘 하던 대로 카게야마를 쳐다보거나, 퉁명스럽게 말을 붙이거나, 혼자서 망상에 빠지는 것들뿐이었다. 망상 속의 카게야마는 현실 속의 카게야마와는 조금 달랐다. 상냥했고, 가끔은 웃어주기도 했고, 나와 손을 잡기도, 포옹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망상에 빠져 살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땐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 괴리감에 상실감만 더 차오르곤 했다. 연애감정이라곤 전혀 모를 것 같은 저 녀석에게 내가 뭘 어쩌면 좋을까. 결국 어쩔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내가 만일 오이카와 선배 같은 전문가였을지라도 그 대상이 카게야마라면 방도를 찾지 못했을 거라고 자기위로와도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기만 했다.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카게야마를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악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하지 말라는 일은 더 하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마냥 카게야마의 생각을 그만두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카게야마의 생각이 차올랐다. 그 녀석의 날카로운 얼굴이나, 혼자서 곰곰이 생각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빼죽 내미는 입술이나, 언제나 내려다보곤 하는 동그랗고 까만 뒤통수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차올랐다. 그래도 그 정도 생각이면 양반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더더욱 카게야마를 피했고, 그러자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그 이상의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내 머릿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사춘기 남학생이라면 여성을 상대로 할 법한, 그런 생각들이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내 상대는 카게야마였다는 것이다.

  점프 서브를 할 때 펄럭이는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허리나, 동그란 뒤통수 아래에 보이는 목덜미나, 피로에 지쳐 바닥에 철퍽 앉아있을 때면 짧은 바지가 말려 올라가는 탓에 드러나는 허벅지나, 바닥에 앉아 무릎보호대를 올려 신는 그 손 같은 것들이 나를 점령해왔다. 젠장, 젠장, 젠장!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를 악물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해대며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것뿐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침대 위에 누워 나를 올려다보는 카게야마에까지 미쳤을 때, 결국 나는 항복을 선언했다. 


  카게야마에 대한 마음을 흐르는 대로 놔두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마음은 편안해졌다. 나도 이제는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마음껏 카게야마를 쳐다보고, 마음껏 그와 연애하는 상상을 하자 그간 계속 허전했던 마음이 겨우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허무했다. 그 허했던 느낌들이 전부 카게야마로 인한 것이었나 싶었다. 카게야마를 대하는 것 역시 생각보다 쉬웠다. 물론 사람이 셋 이상 있을 경우에 한했지만. 카게야마와 단 둘이 있는 경우는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무슨 말을 할지, 무슨 행동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 함께 있어도 카게야마와 대화를 나눌 때면 쉽게 버벅거리고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는 나인데, 단 둘이 있을 때는 어떨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눈에 보였다. 애초에 부활동이라는 것이 단체활동인지라 나와 카게야마가 단 둘이 있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나는 그것에 안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방심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일상처럼 부실 문을 세차게 연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항상 왁자지껄하고 난잡했던 부실은 조용하다 못해 거의 침묵 그 자체였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침묵이라면 나았을 텐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라커룸에 가방을 벗어 넣고 있던 카게야마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열어제낀 부실 문 너머에는 카게야마가 홀로 서있었다. 


  “…아니, 아냐.”


  내 대답에 카게야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마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신발을 벗고 주춤주춤 내 라커로 다가갔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그제야 오늘 1, 2학년들이 소풍으로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그렇다고 쿠니미까지 없을 필욘 없잖아. 한 동안 확인하지 않고 있던 휴대전화가 이제야 신경 쓰여 급하게 주머니에서 꺼내 플립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쿠니미의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오늘 주번이라서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하….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굳어버리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교복의 웃옷을 벗어 라커룸에 걸어놓고 아직 유니폼을 입지 않은 채로, 즉,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가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자주 봐온 광경이었다.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힐끗거리곤 했던 광경이었지만, 모두가 함께 옷을 갈아입고 있다는 것과 지금 이 밀폐된 곳에서, 내 눈앞에서, 카게야마가 오직 ‘홀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는 것은 그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손을 들어 내 라커의 문을 열었다. 하필이면 내 라커는 카게야마의 옆옆 라커였다. 나는 입술을 짓이기며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야, 킨다이치. 근육 테이프 좀 빌려줘. 아무래도 내 거 집에 놓고 왔나봐.”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로 멍하니 카게야마를 돌아보았다. 평상시와 같이 그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마르거나 왜소한 체격도 아니건만 확실히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작은 체구의… 그 나신을 나는 어찌하면 좋은가. 킨다이치?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한 번 부르는 카게야마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가방을 뒤져 카게야마에게 테이프를 건넸다. 고마워. 짧게 대답한 카게야마는 양쪽 손목에 몇 번 테이프를 감고는 테이프를 라커 안에 넣어놓고 유니폼을 꺼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카게야마의 아직 덜 여문 등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 눈앞에. 카게야마는 천천히 유니폼에 팔을 꿰고는 그 둥그런 머리까지 마저 넣고서 꿈틀거리며 옷자락을 내리기 시작했다. 아. 내 입에서 아주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킨다이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나는 카게야마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서 이제 막 갈아입은, 섬유유연제 향기가 폴폴 솟아나는 그 유니폼 위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요동치는 카게야마의 심장박동이 온몸으로 뻗어가 나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카게야마는 따뜻했다. 그렇게 차가운 얼굴로, 차가운 말만을 뱉어내면서 이토록 따뜻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달콤한 섬유유연제 향기 속에 카게야마의 향기가 섞여 들어왔다. 젠장…. 서서히 고개를 드는 이성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게야마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이 녀석을 아주 많이, 너무나도….


  “…미안.”


  나는 천천히 카게야마를 놓고 등을 돌렸다.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건넬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채 갖기도 전에 부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도 카게야마도 고개를 돌려 문쪽을 쳐다보았다. 쿠니미였다. 봤을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카게야마를 안고 있던 손을 떼어낸 것과 거의 비슷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쿠니미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쿠니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쿠니미는 늘 그랬다. 친한 친구였지만,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 이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쿠니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신발을 벗고 들어와 나와 카게야마 사이에 자리 잡은 제 라커를 향해 걸어왔다. 그것이 마치 멀지도, 붙어있지도 않은 어정쩡한 거리로 서있던 나와 카게야마의 사이를 일부로 헤치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둘이 또 싸우기라도 했어?”

  “아, 아니!”


  쿠니미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참 티난다 싶을 정도로 다급하게 그 물음에 대답했다. 쿠니미는 나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쿠니미의 너머로 슬쩍 바라본 카게야마는 이미 배구화를 꺼내곤 라커의 문을 닫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채 갈아입지 못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둘러서 옷을 벗었다. 웃옷을 벗어 걸고 유니폼을 꺼내 입으려는 찰나, 쿠니미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집중해서 들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쩐지 생생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유니폼을 입으려던 손을 멈추고 쿠니미를 쳐다보았다. 쿠니미는 마치 자기가 말한 것이 아닌 것처럼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었다.

 딱히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생각해보면 혼잣말에 더 가까운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게 꼭 내게 하는 말만 같아서 멍하니, 멍하니 서있었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쿠니미가 옷을 다 갈아입고 먼저 나간 카게야마의 뒤를 따라 나갈 때까지. 멍하니 서있었다.


  “용기가 없다면 뺏길 테지.”


  그리고 내가 카게야마를 눈에 띄게 피하게 된지 3주 후, 나는 놓고 온 서포터를 챙기기 위해 돌아온 체육관의 창문 너머로 펼쳐진 낯선 광경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쿠니미와 키스하고 있는 카게야마였다.


  그대로 집으로 달려가듯 돌아가면서, 그리고 스포츠 용품점에 들러 새로운 서포터를 집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날 쿠니미가 한 말은 내게 한 소리가 아니었구나. 제 자신에게 한 소리였구나.


  나는 집으로 돌아가 새로 산 서포터를 꾸역꾸역 무릎에 차고서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땀 흡수에 아주 좋은 서포터라고 했으니 눈물도 다 흡수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이 내 사춘기의 기억이었다.






#카게른_6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