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obas/글

[니지아카/홍적] 존재유무

팥_ 2014. 7. 12. 00:35

* 적우 3인 글합작에 제출한 작품으로

에일리아스 님의 소재, 지지님의 썰을 기반으로 하여 성하였습니다.

http://threewriters.tistory.com/








  “아카시군, 신은 있는 걸까요?”


  쿠로코가 가져온 세계사 교과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아카시가 그 생뚱맞은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아카시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제가 보고 있던 교과서를 바라보았다. 마녀사냥이란 15세기 이후 기독교를 절대화하여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광신도적인 현상이다. 마녀사냥은 15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딱히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마침 질문하러 온 부분이 중세시대 파트였기 때문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문점이 맞물려 가볍게 던져본 말로 보였다. 종종 쿠로코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니 딱히 이상하게 여길 말도 아니었다. 그저 도둑이 제발 저렸을 뿐이었다. 책에서 눈을 뗀 아카시가 다시 쿠로코의 눈을 바라보았다. 평화롭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카시는 잠시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쿠로코는 별다른 재촉도, 어떤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아카시가 입을 다물어 생긴 적막의 틈새로 잡념이 슬그머니 머리를 밀며 새어 들어왔다.


* * *


  아카시 세이쥬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 아버지를 거슬러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카시 가문은 대대로 사이비 종교를 믿고 있었다. 뿌리는 크리스트교였으나 그 독실함이 지나쳐 본래의 뜻에서 변질되어버린 그런 종교였다. 그의 아버지는 지독할 정도로 교리를 따랐다. 매스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카시 기업의 기부 사실이 오르내렸지만 딱히 그것은 그의 천성이 어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교리를 따라 없는 자에게 베풀었을 뿐이었다. 이런 집안이었기에 아카시는 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며 자랐다. 세상 빛을 본지 100일째 되던 날 유아세례를 받았고,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그 날부터 아버지와 함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아카시에게 있어 종교, 신앙은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중학교 1학년, 테이코 중학교에 입학하고 농구부에 입부한 아카시는 그곳에서 니지무라 슈조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곧 아카시 세이쥬로의 삶에 막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을 터놓기 좋을 만한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터놓는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카시의 내면을 갉아먹고 들어가 결국엔 깊은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게 되었다. 마음을 털어놓을수록 안에 들어앉은 그것이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아카시가 제 안에 자리를 잡은 그 뱀 같은 것을 알아채기 시작한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니지무라와 더 오래 있고 싶었고, 니지무라에게 더 기대고 싶었고, 니지무라의 드넓은 등을 볼 때면 안아보고 싶었고, 중학생의 손이라기엔 굳은살이 박혀 제법 단단한 그 손을 잡아보고 싶었다. 그 뱀의 존재가 동경이란 이름표를 단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 아카시는 매일 아침 아버지와 함께 올리는 식사 전 기도를 처음으로 빼먹었다.


  “뭐 하냐, 아카시. 집중 안하고.”


  어깨를 들썩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놀란 아카시를 보며 웃던 니지무라가 자연스럽게 아카시의 어깨에 손을 얹어 가볍게 주물렀다. 손이 닿는 곳마다 뜨겁게 살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겨우 놀란 마음을 추스른 아카시가 고개를 들어 니지무라를 바라보자 니지무라가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떼어 아카시의 머리를 몇 번 헤집고는 손을 내려놓았다. 아카시는 니지무라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곤 앞에서 벙끗거리고 있는 코치의 입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서웠다. 아카시의 아버지도, 그리고 아카시도 사고하는 법을 깨우친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성애자의 존재를 거부하며 살아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교리가 그것을 강력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고 배우며 자란 아카시 역시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서 동성애자란 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이며, 거부당해도 마땅한 존재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자기 자신이 그 순리를 거스르게 된 것이다. 아카시는 어렸고, 그랬기에 아직 유약했다. 신의 가르침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굣길, 옆에서 다정하게 들려오는 니지무라의 목소리에 행복하다 생각하면서도 아카시는 계속해서 저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아카시를 가장 먼저 잡아준 것은 결국 니지무라였다.


  “좋아해, 아카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카시는, 저를 단단하게 묶고 있던 수많은 밧줄들이 잘려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밧줄 대신 몸을 잡아온 건 다정한 온기로 가득 찬 손이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묶여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기만 하던 저를 잡아준 사람. 아카시는 한참을 멍하니 니지무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니지무라는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려 머리를 긁적이며 애꿎은 땅만 발로 파헤치고 있었다. 아카시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날 때부터 믿어온 저의 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믿고 싶은 니지무라. 아카시는 한쪽 손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밧줄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손이 앞에서 저를 부르고 있었다. 이리 와서 잡으라고, 이것만 잡으면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저를 부르고 있었다. 아카시는 굳게 눈을 감았다. 밧줄이 얽혀있는 손을 강하게 쳐내었다. 그러자 밧줄은 힘없이 몇 번 출렁이더니 바닥에 떨어져 모습을 감췄다. 아카시는 눈앞에 놓인 손을 붙잡았다. 따뜻하고, 평온했다.


  “…저도 좋아하고 있어요, 주장.”


  이 손을 잡으면 신도 무엇도 무섭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좋은 날들이 흘러갔다. 아침 식사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 기도를 올릴 때만은 다시 밧줄이 발목을 얽어오는 것 같았으나 곧장 학교로 달려가 니지무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은 다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곤 했다. 어쩌면 니지무라 슈조는 아카시의 또 다른 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선택으로 믿게 된 신이 아니라, 온전히 제 선택만으로 믿게 된 신. 그렇게 생각하자 슬며시 마음 깊은 곳에 그림자를 드러내던 죄책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죄책감은 때때로 다시 머리를 들이밀곤 했지만 니지무라의 얼굴을 보고, 니지무라의 손을 잡고, 니지무라의 품 안에 있을 때면 억지로 그 머리를 눌러 도망가게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집에 이렇게 늦게 가도 되냐?”

  “조별로 하는 숙제가 있어서 자주 늦을 거라고 미리 말해놨어요.”


  아카시가 제 옆에 앉은 니지무라의 얼굴을 바라보고 살풋 웃으며 말했다. 다시 시선을 내리자 니지무라의 허벅지 위에서 갈 곳을 잃고 꼼지락 거리고 있는 니지무라의 손이 보였다. 저를 잡아주었던 그 따뜻한 손이. 아카시는 살짝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아보았다. 자연스럽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조금 힘을 주어 잡자 맞닿은 손바닥이 온기가 아닌 열기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니지무라는 아카시에게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을 크게 삼키고는 고개를 돌려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선선한 밤공기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듯 헤집고, 가로등 불빛에 음영이 진 얼굴이 저를 오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길어 눈가를 살랑대는 붉은 앞머리와 눈동자 가득 저만을 담고 있는 눈, 적당한 크기로 반듯하게 자리 잡은 코와 선이 뚜렷한 입술… 입술. 니지무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뺨에 온기를 머금은 손길이 닿아왔다. 니지무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저를 가득 담고 있는 눈동자가 어쩐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고 생각했을 때, 니지무라는 제 입술에 닿아오는 감촉을 느꼈다. 짧게 떨어진 입술은 곧 벙끗거리며 미성이지만 강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주장.”


  저도 두려우니까요. 그 말을 아카시가 뱉으려 했는지, 삼키려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걸 뱉으려 했어도 뱉어내지 못했을 것이란 점이었다. 아카시의 말이 끝나자마자 니지무라의 입술이 아카시의 전부를 삼킬 것처럼 덮어왔으니까.


  점점 죄책감의 머리를 밀어내는 게 버거워진다는 것만 빼면 나름대로 괜찮은 일상이었다. 죄책감의 그림자는 사람의 어둠을 먹고 자랐다. 아카시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꾸만 자리를 잡는 어둠을 내쫓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아침 기도 시간이나 아카시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시간이면 무서운 기세로 아카시를 집어 삼켰다. 아카시는 어렸고, 여전히 약했고, 그랬기에 그것을 아카시 혼자의 힘으로 물리치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그것들을 있는 대로 받아먹고 무섭도록 거대해진 죄책감의 그림자를 처음으로 아카시가 이겨내지 못한 날, 아카시를 둘러싸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항상 따뜻하다고만 생각했던 니지무라의 손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정말로 그의 손이 차가워진 건지, 혹은 제가 그 온도에 적응해버린 건지 알 수가 없어 아카시는 불안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그것에 가지를 친 다른 생각들이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니지무라가 제게 먼저 고백했던 일이 저를 동정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튀어나왔다.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애처롭게 말하면서도 먼저 다가설 용기조차 없는 저를 동정해 인심 쓰듯 손을 내밀어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이 튀어나오자 모든 것이 전부 그렇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 고백을 제외하고선 언제나 제가 먼저 다가갔던 것 같았다.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먼저 손을 잡은 것도, 먼저 키스를 하는 것도 전부 저였다. 주장은 나를 좋아하는 걸까? 니지무라가 아카시를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은 전혀 없었다. 변한 것은 그저 아카시의 머릿속이었다. 그 사념의 마지막은 결국 ‘그래도 좋으니까.’ 같은 생각으로 마무리 지어지긴 했지만, 그 작은 사념들이 모여 커다란 뱀의 형상을 하고 아카시를 천천히 녹여먹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두 번째로, 두려움이 아카시를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악몽을 꾸는 횟수가 잦아졌고,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때가 잦아졌다. 길을 걷다 갑자기 신의 벌이 제게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교리에 의하면 동성애를 한 자는 전부 불구덩이에 빠져 살갗이 얇게 수백 번 벗겨지는 벌을 받는다고 했다. 처음 니지무라와 사귀기 시작했을 땐 행복한 감정에 사고가 마비돼 그런 것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점 니지무라와 잡고 있는 손이 차게 식어간다 생각되고, 니지무라가 주는 애정에 갈증을 느끼게 되면서 마비되었던 사고가 점점 예전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신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 자체가 아카시는 두려웠다. 아카시는 전보다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신에게 외쳤다. 아버지, 부디 미천한 자의 죄를 사하여주소서. 당신의 뜻을 어겨버린 아들까지 너그러이 품어주소서. 당신의 아들을 넓은 관용으로 용서하소서. 소리 없는 외침이 밤마다 아카시의 방을 메웠다. 


  마지막으로, 그 변화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아카시의 모습은 마치 어미에게 젖을 갈구하는 새끼 동물의 모습과도 같아보였다.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아카시는 니지무라에게 매달렸다. 나를 사랑해줘요, 손 잡아줘요, 안아줘요, 키스해줘요. 니지무라는 아카시의 그런 변화를 처음에는 신기하게 여겼다. 내심 즐거워한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아카시가 제 앞에서는 어린 아이라도 된 것 마냥 굴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뿐이었다. 아카시의 변화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신에게 존재를 부정당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아카시에게 유일한 희망은 니지무라밖에 없었으니까. 제가 받들었던 신에게 버림받게 된다면 남은 것은 또 하나의 신, 니지무라 슈조뿐만이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면 니지무라는 아카시의 사정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니지무라는 옷을 벗기도 전에 먼저 충전기에 휴대전화를 꽂고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니지무라는 본래 휴대전화의 유무에 민감한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둔감하다면 둔감한 성격이었다. 그런 니지무라가 이렇게 초조하게 휴대전화의 액정에 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카시 세이쥬로. 휴대전화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전원이 켜졌음을 알리자마자 니지무라는 급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원이 나간 지 30분 정도가 지났을 텐데 그새 문자가 많이 쌓여있었다. 발신자는 전부 아카시였다. 한숨을 내쉰 니지무라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멍하니 휴대전화의 액정을 바라보았다. 최근의 아카시는, 확실히 조금 이상했다. 


  ‘선배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아카시가 제 등에 얼굴을 깊게 묻고서 읊조린 말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니지무라는 처음 아카시에게 고백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변한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아카시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니지무라는 그런 아카시에게 제가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니지무라가 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으로 아카시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다. 그 이상을 넘어선다면 제가 먼저 지쳐버릴 것을 알기에 그 한계를 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피곤한 듯 눈가를 꾹꾹 누른 니지무라가 통화 버튼을 눌러 아카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정도 울렸을까, 바로 아카시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 주장? 무슨 일 있었어요? 


  그 목소리에는 걱정, 초조함, 그리고 약간의 절망감이 섞여있었다.


  “아니, 배터리가 나가서. 집에 잘 도착 했지?”

  - ……네.


  한참동안 둘 모두 말이 없었다. 니지무라는 천천히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켜있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너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아카시가 그것에 순순히 대답할 리는 없다고 생각해 니지무라는 곧장 생각을 지워냈다. 이대로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간 둘 중 누구 하나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먼저 나가떨어질 사람이 아마도 제가 되리라 니지무라는 생각했다. 그건 싫었다. 그러나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니지무라는 알아낼 수 없었다. 


  “있잖아, 아카시.”


  니지무라는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네가 요즘처럼 나를 대하는 행동이 버티기 힘들다고? 아마 역효과만 일으킬 터였다. 니지무라는 섣불리 입을 열어버린 제 행동을 금세 후회했다. 아카시는 조용히 니지무라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지 휴대전화 너머엔 질식할 듯한 침묵만 가득했다. 니지무라는 잠시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고 액정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통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귀에 휴대전화를 붙인 니지무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잘 자라.”

  - …답지 않게 싱거우시네요. 주장도 안녕히 주무세요.


  오냐. 급하게 대답한 니지무라는 서둘러 종료버튼을 눌러 통화를 종료하였다. 니지무라는 그러고도 한참을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좋아함과 지침이 공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겨운 상황이었다. 차라리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텐데. 해결방법을 생각할 것도 없이 이별을 선고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러기엔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존재가 제 안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니지무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더더욱 빨리 해결책을 찾아봐야 하는 거지만. 


  니지무라 슈조는 결국 해결책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을 마주하기엔 그는 너무나도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결국 니지무라가 최후의 방법으로 택한 것은 아카시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택한 방법이었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밖에 없다고도 생각했다. 말 그대로 최후의 방법이었다. 아카시를 싫어하게 되지 않기 위한, 더 이상 아카시가 변하는 걸 막기 위한 방법. 니지무라는 아카시의 변화가 전부 제 탓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고백을 안했더라면, 욕심내지 않고 그저 좋은 감정으로만 대했더라면 아카시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싶었다. 그렇다면, 다시 예전과 같은 정도로 대한다면 아카시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니지무라는 너무나도 눈에 보이게 거리를 뒀다. 아카시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매일같이 함께 하던 하굣길을 이런 저런 연유를 대며 거절했고, 한 번 통화했을 때 걸리는 시간 역시 처음에는 절반으로 줄더니 나중에는 4분의 1로, 더 나중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허다해졌다. 모든 게 저 때문이었다. 아카시는 절망했다. 변한 것은 니지무라의 마음이 아니라 제 머릿속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매달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저를 스쳐 지나가는 니지무라의 뒷모습이 이토록 간절한 적이 없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애초에 신을 거스르지 않았어야 했다. 지금 제 마음속을 좀먹어가는 이 절망감이 바로 신이 내린 벌인가 싶었다. 


  아카시의 기도 시간이 점점 길어져갔다. 마음속에 들어찬 오열을 겉으로 내보일 용기마저 없어 속으로 외칠 뿐이었지만 그 간절함은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아버지, 제발 이 우둔한 아들을 용서하여주소서. 신에게 용서받고 싶었다. 날 때부터 받들었던 신에게도, 저를 처음으로 잡아준 저만의 신에게도. 니지무라가 아카시에게 거리를 둘수록 아카시는 니지무라를 붙들었다. 늘 따스하게 저를 잡아줬던 손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워진지 오래였다. 좋아해줘요, 나를. 용서해줘요. 붙잡아줘요. 아카시는 온몸으로 외쳤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오래전에 잘라냈던 밧줄이 이미 한쪽 다리를 잔혹하게 삼켜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저것들을 잘라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 차가워진 손은 다시 뜨거워지는 방법을 모르는 듯했다.


  지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고, 그냥 죄인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아카시가 처음으로 생각한 순간 한쪽 다리를 붙들고 있던 밧줄 덩어리가 순식간에 아카시를 머리끝까지 삼켜냈다. 저를 덮쳐오는 마수 속에서 아카시는 일절의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단 한 번 당신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아들을 바깥으로 내모는 아버지가 정녕 신일까? 그러나 그 생각의 답을 내기도 전에 아카시의 모든 것이 밧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산산조각이 나는 제 몸을 바라보며 아카시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무섭도록 빠르게 시간은 흘러갔다. 아카시가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을 기점으로 아카시는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모든 것들은 아카시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카시가 니지무라를 놓았을 때, 처음으로 니지무라 쪽에서 다시 거리를 좁혀왔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그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혹은 예전보다 더 먼 거리를 두고서 인위적인 웃음의 갑옷을 몸에 두르고 살았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었다. 연인 사이였던 이들이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허망하게도 순식간이었다. 너무나도 스치듯 흘러가버린 그 관계를 깨달았을 땐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무너져 내린 관계의 성을 다시 쌓아올리기엔 이미 늦어버린 시간이었다. 아카시는 가끔씩 니지무라의 등을 바라보았다. 니지무라 역시 가끔씩 아카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걸로 다였다.


  멎어버린 아카시는 더 이상 신께 외치지 않게 되었다.


* * *


  아카시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이 축구를 하는 남학생들로 가득 차 제법 소란스러웠다. 그 남학생들 사이에서 익숙한 등을 찾아내는 것은 아카시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여전히 넓고, 단단하고, 사람을 기대고 싶게 하는 등이었다. 한참을 그 등을 쫓아 시선을 옮기던 아카시가 한 번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돌려 다시 쿠로코를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책상에 펼쳐진 세계사 교과서를 소리 나게 덮었다.


  “신은, 없어.”


  제 물음에 이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나온 아카시의 대답에 쿠로코는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카시라면 예의 그 예의를 차리는 웃음을 지으며 ‘글쎄, 사람마다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정도의 대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아카시는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을 하고서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런 쿠로코의 의아한 표정을 아카시 역시 눈치 챘는지 아카시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없어, 분명히.”


  신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가 신에게 받은 대우를 설명할 수 없었다.


  색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카시의 얼굴 위로 붉은 빛의 석양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