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obas/글
[적우] 조각글 모음
짤막하게 이곳 저곳에 썼던 조각글들을 모아 백업했습니다.
하야마 코타로는 심장이 없는 남자였다. 여러가지 의미로.
아카시는 그런 하야마를 죽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나 심장이 없는 남자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야마는 툭 하면 제 가슴을 칼로 찔러오는 아카시에게 단 한 번도 저항한 적이 없었다. 미친놈. 아카시는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하야마의 가슴팍에 섬뜩하게 번쩍이는 칼을 박아 넣은 아카시가 이번에는 곧장 칼을 빼내지 않은 채 하야마의 눈을 마주했다. 거짓된 웃음 뒤로 일그러진 표정이 훤히 보였다. 궁금한게 있어. 아카시가 입을 열었다.
심장이 없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나를 막지 않지?
아카시의 서늘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치던 하야마가 칼 손잡이를 쥔 아카시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는 아카시의 반응이 즐겁다고 생각했다. 하야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날이 잘 선 칼이 제 살을 헤집어대는 느낌은 몇 번이고 경험해봐도 소름돋긴 마찬가지었다. 곧, 부드럽게 칼이 빠져나왔다.
하야마는 그대로 아카시의 손을 옮겨 칼자국만이 남은 제 가슴팍에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져야 할 왼쪽 가슴의 고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용하고 고요하다 못해 꺼림칙한 느낌이었다. 아카시는 손을 살짝 움츠렸다.
그런 아카시의 반응을 보며 하야마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전신을 관통하는 섬찟한 기분에 하야마의 손 안에서 제 손을 빼어내어 돌아가려 했으나 하야마가 더 빨랐고, 더 강했다.
아카시는 꼼짝없이 하야마에게 잡힌 채로 하야마의 눈을 받아내야만 했다. 조각품을 감상이라도 하듯 천천히 아카시를 위아래로 훑어내던 하야마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도망쳐야 한다. 그런 생각이 아카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렇게 몇십 번이고 찔리다 보면 한 번쯤은 피가 나지 않을까 싶어서.
낮게 내려앉은 하야마의 목소리가 바닥을 덮었다. 심장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말과 동시에 아카시의 머리가 하야마의 눈앞에 끌려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카시는 제 목을 옥죄는 하야마의 손아귀를 뿌리치기 위해 버둥댔으나 석상이라도 된 마냥 하야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야? 이렇게 손 아래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펄떡대는 느낌? 하야마가 웃었다.
얇은 살갗을 사이에 두고 제 손바닥 안에서 미친듯이 경동맥이 요동치는 느낌은 상당히 매력적인 느낌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 치는 초식동물같기도 하고.
하야마는 목을 틀어쥐었던 손을 놓고서 바로 아카시의 머리채를 휘어잡왔다. 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아카시의 얼굴이 하야마의 코앞까지 끌려왔다. 겁에 질린 표정이 답지않게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있었다.
너도 궁금하지 않아? 심장이 없는 느낌? 하야마가 웃었다.
동시에 날카로운 것이 제 가슴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카시는 슬쩍 눈동자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 제가 하야마를 찔렀던 칼이 지금은 제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아카시는 침을 삼켰다.
안 궁금해. 떨리는 목소리가 간신히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그래? 나는 궁금한데. 심장이 있는 느낌. 몸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요동치는 느낌은 대체 어떨까? 하야마의 말과 동시에 아카시의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그대로 하야마의 입술이 아카시의 입술에 부딪쳤다. 있는 힘껏 거부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곧 제 혀에 비에 차가운 혀가 입안을 침범해 마구잡이로 헤집어댔다.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숨이 막혀온다고 느낄 무렵 하야마가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놓아주었다기 보다는 던졌다는 표현이 맞았다. 아카시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몸을 추슬러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미친놈. 다시 한 번 아카시는 그 말을 곱씹었다.
이런 느낌이려나? 펄떡대고, 쿵쾅대고, 요동치는 느낌? 하야마가 웃으며 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도 덕분에 즐거웠어. 침대에 기대 누운 하야마가 아카시를 바라보며 웃었다. 난 늘 네 덕에 즐거우니까, 그냥 까부는 선만 적당히 지켜주면 돼. 뭐든지 적당히라는 말이 있잖아? 말을 마친 하야마가 묵직한 이불을 끌어와 제 위에 곱게 펼쳐 덮었다.
아. 짧은 감탄사를 뱉어낸 하야마가 침대 옆에서 무언가를 주워 아카시를 향해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그것은 챙그랑하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아카시의 발밑에 떨어졌다. 아카시의 칼이었다.
아카시는 이를 악물고서 제 발밑에 떨어진 그 칼을 바라보았다. 대체 저 남자를 언제쯤 죽일 수 있을까. 말없이 칼을 바라보는 아카시의 모습에 하야마는 만족스러운듯한 웃음을 짓고서 이불 속으로 다시 몸을 뉘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전부 사라졌다. 암흑, 그리고 암흑 속의 인영. 그것이 이 방의 전부였다.
내일도 기대할게, 아카시. 마지막 남은 인영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사람 죽는 거 본 적 있어?"
또 시작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카시는 귀와 입을 모두 닫고서 인파가 넘실거리는 길을 헤치고 걸어갔다. 제 옆에서 허공에 둥둥 떠 누워있는 남자는 쉴 새 없이 떠들기 바빴고 아카시는 쓸데 없는 말들을 무시하는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남자는 그런 아카시에게서 관심을 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아카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최후의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남자에게 대답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 사람 많은 곳에서는 더더욱. 혹시라도 아카시 가의 도련님이 혼자 허공에 대고 대화한다는 소문이 퍼져선 곤란하니 말이다.
"쟤, 죽여볼까?"
그 최후의 말에 아카시는 결국 남자가 가리킨 사람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선글라스의 다리 부분을 잡고 눈이 보일 정도로 살짝 내린 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사람 많은 거리에서 무슨 일을 벌이겠어,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카시는 남자와의 첫 만남을 생각했다. 남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아카시에게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남자가 어떻게 행동했던가. 우선 선글라스의 다리 부분을 잡고, 눈이 보이도록 내린 뒤, 덧니가 보이도록 웃더니 오른손을 들어 횡단보도를 건너던 남학생 세 명을 하나하나 차례로 지목하고는 손가락을 퉁겼었지. 그리고 끝. 남자가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나타난 버스가 남학생 셋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당장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은 다리를 끌고 사고 현장까지 다가간 아카시가 그 셋의 생사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셋 모두 즉사라는 대답 뿐이었다. 아카시는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만해."
"왜? 재밌잖아."
남자의 '재미'란 아마도 아카시의 반응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었다. 아카시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화답하듯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까딱이며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려 벗고 아카시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카시는 작게 한숨을 쉰 후 눈빛을 거두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제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져주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마다 정해진 수명이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 수명을 어기면서 너처럼 제멋대로 죽여도 되는 거고?"
아카시의 질문에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남자는 곧 얼굴 근육을 들썩거리더니 경쾌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아하하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듣는 사람까지 즐거워질 웃음이라고 생각할 만큼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이었지만 아카시의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역시 직업 ㅡ이걸 직업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ㅡ 답게 기분 더럽게 만드는 데는 전문가군. 웃음을 그칠 생각이 없어보이는 남자를 내버려두고 아카시는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길을 이어나갔다. 거침없는 발걸음이 멈춘 것은 금방이었다. 갑작스레 제 앞에 나타난 남자 덕분에 아카시는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제발 이 갑자기 나타나는 짓 좀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카시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게다가 가까워. 남자의 얼굴은 아카시의 얼굴 바로 앞에 자리잡고서 싱글싱글 웃으며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끝과 코끝이 서로 스칠듯 말듯 하는 거리를 두고 한참을 웃고만 있는 남자에게 짜증이 나 아카시는 얼굴을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남자가 뿜어내고 있는 위압감이 저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싫다. 숨을 뱉어내기도, 침을 넘기기도 어려울 정도의 위압감. 그리고 그 위압감과는 다르게 남자는 여전히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꼼짝도 못하고 있는 저를 보는게 퍽 즐거울 터였다.
"아카시, 너는 악마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가 입을 열자 아카시를 짓누르던 위압감이 한결 느슨해져 아카시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남자의 표정은 겉으로는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전해져 오는 느낌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아카시는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침을 삼켰다.
"친절하게 한 명 한 명 수명 챙겨주면서 황천으로 데려다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저승사자라고 고쳐주고 싶네."
"……."
"나는 악마야. 당장이라도 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저 세상 보낼 수 있는 악마."
뭐, 그런 짓하면 귀찮은 미카엘이 당장 천사들 다 끌고 출동할테니 안 하겠지만. 남자는 작게 말을 덧붙였다.
"그만 기어올라, 아카시."
"……."
"간만에 만난 재밌는 계약자라 살려두고 있는 거니까."
남자는 손가락으로 아카시의 목젖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차가운 손끝에서 퍼져나온 냉기가 전신을 싸늘하게 얼린 듯한 느낌이 목구멍을 죄어왔다.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의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면서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건 바라만 봐야할 때의 그 무력감. 그런 비슷한 느낌이 온몸을 서서히 조여나갈 때의 그 더러운 기분. 귀엽네. 겁 먹었어? 남자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귓가를 괴롭혔다.
트위터에서 해시태그를 통해 키워드를 세 가지 받아 그 키워드를 소재로 적은 글입니다.
<바람이 분다, 여보세요, 노래>
고개를 든 아카시의 이마 위로 점점이 흩날리던 벚꽃 몇 잎이 내려앉았다. 아카시 가의 자제가 우리 학교에 왔다, 기적의 세대 주장이었단다, 이런 저런 소리로 소란스러운 입학식 사이에서 겨우 찾아낸 조용한 공간이었다. 교토의 봄은 도쿄와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굳이 찾자면 중학 시절 저를 만나러 온 시로가네 감독과 스카우터 쯤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들을 아는 사람의 분류에 넣을 수는 없으니. 한 번 더 바람이 불었다. 아카시의 붉은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것과 섞여 벚꽃잎이 눈처럼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뒤덮었다. 아카시는 조용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연락처도 없는, 즉 아무에게서 연락 올 일도 없는 휴대폰이었다.
아카시는 화면에 떠오른 키패드에 머뭇거리다 손가락을 올렸다. 아무에게도 바뀐 연락처를 알리지 않은 이유는 혼자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괜한 욕심이 마음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입학식을 즐긴다고 함께였다. 이 날까지 혼자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었다. 머뭇거리던 아카시는 곧 머리보다 손가락이 먼저 반응할 수 있는 그 번호를 키패드를 꾹꾹 눌러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 번호는, 아무리 연락처를 지워버린다 해도 소용이 없는 그런 번호였다. 너무나도 깊게 머릿속에 박혀있어 그것을 빼낼 수가 없는 그런 종류의 기억이었기 때문이었다. 번호를 다 누른 아카시는 마지막으로 통화 버튼 앞에서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눌린 통화 버튼에 익숙한 통화 연결음이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아카시는 침을 꿀꺽 삼키고 휴대폰을 바로잡았다. 어떻게 대답을 하면 좋을까, 아카시가 고민하는 동안 다시 한 번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연락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일 년만에 듣는 목소리에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 했다. 사실 나, 당신을 따라 이곳에 왔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목소리가 입 안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걸 뱉어내는 순간 모두와 연락을 끊어낸 의미가 없어지고 말 것이었다. 아, 어쩌면 지금 당신에게 연락한 순간부터 없어졌을까.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쯤되면 끊을 만도 한데, 상대는 어쩐지 전화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 …아카시냐?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아카시는 숨이 멎는다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선배.”
- …….
“바람이 불어요.”
- …….
“벚꽃도 날리고.”
지금까지와는 정 반대로 이젠 그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상관 없었다. 어찌됐든 그와 통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 없으니까. 아카시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리와 어깨에 벚꽃잎이 계속 쌓여가고 있었다. 아카시는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휴대폰에 대고 뱉어냈다. 저답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제가 여기서 입을 닫았다간 영원히 그와 단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아카시는 계속해서 말을 만들어냈다.
-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임마.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제 헛소리를 끊고 들어온 것은 그의, 니지무라 슈조의 목소리였다. 어쩐지 기계음이 아닌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카시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것도 자리잡고 있지 않다면, 그저 벚꽃만이 흩날려 바닥을 메우고 있을 뿐이라면 그 때의 박탈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뭘 그러고 서있어. 반가우면 노래라도 불러주던가. 아, 아니 그 전에 우선 놀란건 내 쪽인데?”
그리고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제 귓가에 그리운 목소리가 파고 들었을 때 아카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 더 성숙해졌지만 거의 변한 것 없는 얼굴이 시야에 가득찼다.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던 그가 제 이마를 아카시의 이마에 콩, 하고 살짝 부딪쳤다. 연락 한 번 안 하더니 이렇게 놀래키기나 하고 말이야. 툴툴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카시는 그제야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카시는, 교토에 온 뒤 처음으로 웃어보였다.
트위터에서 해시태그를 통해 키워드를 세 가지 받아 그 키워드를 소재로 적은 글입니다.
<사이코패스, 팥빵, 가위>
니지무라는 아카시의 손에 들린 팥빵을 뚱하게 바라보았다. 말이 뚱하다는 말이지, 사실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 니지무라의 시선을 눈치챈 아카시가 풉, 하고 작게 웃으며 니지무라를 올려다보았다. 아카시의 웃음 소리에 니지무라의 튀어나온 입이 조금 더 비뚤게 튀어나왔다. 그러다 오리로 변하겠어요, 주장. 아카시의 말에 조금 들어가나 싶던 입이 이내 다시 원래대로 튀어나왔다. 그런 니지무라를 본 아카시가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웃더니 곧 가위를 들어 팥빵을 자르기 시작했다. 잘게, 더 잘게. 뭐 하냐, 사이코패스 흉내? 니지무라의 입에서 한껏 삐딱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카시는 웃으며 고개를 젓고 팥빵을 자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책상 위에 잘게 잘려진 팥빵 조각들이 곱게 놓여있었다.
니지무라가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는 데도 아카시가 그저 별 반응 없이 웃으며 넘기는 것은 아카시가 생각해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조금 전의 일이었다. 아카시와 니지무라가 빈 교실에 남아 내일의 연습을 위한 회의 ㅡ겸 데이트ㅡ를 한창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시에 아카시와 니지무라가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아카시와 같은 반인 여학생이 상기된 얼굴로 서서는 아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 아카시군이 부활동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있는다길래… 배, 배고플까봐! 아카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여자 아이가 빠르게 손에 들고있던 무언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우물쭈물 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이미 니지무라의 표정은 급격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아카시는 그걸 알아챘지만 굳이 티를 내진 않았다. 고마워, 나츠미. 잘 먹을게. 그렇게 말한 아카시가 여자 아이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을 때 니지무라와 여자 아이의 표정은 각자 다른 의미로 최고조에 도달해 있었다. 으, 응! 아카시군! 내일 봐! 곧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달려가는 여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니지무라는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멱살을 잡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쭉 이 상태였던 것이다.
아카시는 잘린 팥빵 조각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뭐 하려고? 삐딱한 기분으로도 아카시가 하는 일은 신경이 쓰이는 건지 니지무라가 한 쪽 눈썹만 치켜 올린 채로 팔짱을 끼고서 물었다. 이러려고요. 미소와 함께 대답한 아카시는 집은 팥빵 조각을 들어 니지무라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고, 그것은 니지무라의 거의 반사적인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니지무라의 입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다고 내가 풀릴 줄 알, 빵을 씹어 삼키고 다시 열린 니지무라의 입은 곧 제 입에 부딪쳐온 아카시의 입술에 의해 닫히고 말았다. 쪽, 하고 가벼우면서도 경쾌한 효과음이 텅 빈 교실에 울려퍼졌다.
이제 기분 풀어주세요, 슈조상. 아카시는 웃으며 팥빵 한 조각을 더 집어들었다.
트위터에서 해시태그를 통해 키워드를 세 가지 받아 그 키워드를 소재로 적은 글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밤, 약, 전화>
헉, 허억, 헉…. 거친 숨과 함께 꿈에서 깨어난 키세가 허겁지겁 침대 옆에 놓인 약통을 집어들었다. 번번이 제 손에서 미끄러지는 약통을 겨우 붙든 키세가 뚜껑을 열고 제 손바닥에 거칠게 약을 쏟아내었다. 퍽, 퍽, 두 번 정도 내리쳤을 때 우르르 약들이 손바닥에 쏟아졌다. 눈대중으로 헤아려봐도 열 알은 넘을 법한 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키세는 그 약들을 한 번에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것들을 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키세는 인상을 쓰고 우득우득 소리가 날 정도로 약들을 씹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작, 약을 깨부수듯 씹음과 동시에 쓴 맛이 가득 퍼져나가는지 키세가 눈을 질끈 감고는 옆에 놓인 물컵을 들어 물을 입 안에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반, 바깥으로 흘러 옷을 적시는 것이 반이었다. 당장이라도 컵을 놓칠 것처럼 흔들리는 키세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다시 컵을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키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심장 주변에 펼쳐 얹었다. 손이 떨리는 것만큼 심장 역시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운동하고 있었다. 키세는 고개를 푹 숙이고선 펼쳤던 손바닥을 움직여 가슴을 그러쥐었다. 심장이라도 꺼내 쥐어 짜고 싶어하는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손 안에 잡혀 오는 건 애먼 티셔츠 뿐이었다. 곧 키세는 심장을 꺼내려는 것을 그만두고 주먹을 말아쥐곤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늘 반복되는 밤이었다. 기억할 수 없는 악몽이 숨통을 조이듯 괴롭히고, 고통에 차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신경 안정제를 입에 털어넣고, 그러고는, 그러고는….
아카싯치.
떠오른 그 이름에 무언가 막혀있던 것이 뻥 뚫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키세는 가슴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곤 허둥지둥 협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키세는 자연스럽게 익숙한 번호를 빠르게 찍어내리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투박한 통화 연결음이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연결이 되지 않아… 키세는 아랫입술을 세게 씹고는 휴대폰에서 녹음을 알리는 효과음이 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효과음이 들림과 동시에 키세는 마치 아카시와의 전화 통화와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카싯치, 아카싯치. 오늘도 아카싯치 꿈을 꾼 것 같아요. 기억은 안 나는데 악몽이었던 건 분명해서 걱정돼 미치겠어. 연락 좀 받아줘요. 보고싶고, 보고싶고, 또 보고싶어요.
할 말은 더 많았다. 그러나 닿지 않을 말인 걸 알기에 키세는 더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당신이 나오는 꿈인데 악몽이라니, 이게 말이 돼요? 허탈한 숨이 가득 섞인 그 말을 끝으로 키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려놓기가 무섭게 휴대폰의 진동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키세는 빠르게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바라보았다. 연락처에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그 어떤 번호보다도 빠르게 인식할 수 있는 번호. 방금 전 통화를 마친 그 번호. 키세는 멍하니 그 번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러 귓가에 휴대폰을 가져다 대었다.
“아카싯치?”
- 저기요, 제발 그만 좀 연락해주세요.
그리고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카시라고 하기엔 너무 높은, 어떤 여자의 목소리였다.
- 몇 번째 말씀드리는지 모르겠어요. 이 핸드폰 전 주인 죽었다고. 한 번만 더 연락하시면 그냥 신고할게요.
동시에 키세는 손에서 휴대폰을 놓쳤다. 마치 꽁꽁 봉인되었던 기억이 키워드 하나에 풀려버린 것처럼, 여자의 말에 모든 지난 날의 기억들이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기억의 양에 압도된 키세의 뇌가 과부하에 걸리기 직전, 키세는 그 기억의 홍수 속에서 간신히 실마리 하나를 잡아 건져내었다. 밤, 침대, 밧줄. 침대에 누워 묶여있던 제 앞에서 밧줄에 제 목을 걸던 아카시. 이 장면 하나로 범람하던 모든 기억이 싸늘하게 그대로 얼어 붙기 시작했다. 키세 료타, 네가 싫어. 그것이 아카시가 살아있을 적에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키세의 눈에서 뚝, 하고 방울진 눈물이 떨어져 바지를 얼룩지게 만들어나갔다. 그것은 눈물이라고 하기엔 좀 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그냥 눈에서 떨어지는 물 같은 느낌이었다. 왜 이 기억을 봉인해뒀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키세 료타는 다시 이 기억을 봉인하기 위해서 봉인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으니까. 감당하기 힘든 기억이었다. 이렇게 매일 매일의 기억이 사라져갔구나. 그래서 내가 약을 달고 살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래서 내가.
쓰러지듯 침대에 엎드린 키세가 눈을 감았다. 밧줄에 매달려 발버둥치던 아카시의 몸이, 곧 축 늘어져 허공에 매달려있던 아카시의 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다시 묻어버릴 기억이었다. 다시는 못 볼, 혹여 보더라도 다시 가둬버릴 기억.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돌아오지 않는 그 날 밤. 아카시의 마지막 밤. 당신과, 나의 마지막 밤. 하지만 당신은 내일도 내 꿈에 찾아오겠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당신이 나타나는 꿈인데도 악몽인 지를. 안녕, 아카싯치. 내 필사적인 마지막 방어라고 생각하고 용서해요. 이 기억을 갖곤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질 않아서 그래요. 당신의 기억을 죽여버릴 나를, 용서해줘요.
트위터에서 해시태그를 통해 키워드를 세 가지 받아 그 키워드를 소재로 적은 글입니다.
<휴지, 리모콘, 도장>
우당탕탕, 소란스러운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뜬 마유즈미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 47분. …지겨워. 푸석해진 얼굴을 몇 번 손으로 쓸어내린 마유즈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막히게 어두운 시야를 뚫고서 화장실의 조명이 불빛을 전해오고 있었다. 너는 지겹지도 않냐? 벽에 삐딱하게 기대선 마유즈미의 입에서 비틀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휴지를 잔뜩 뽑아 코에 한 움큼 받치고서 세면대를 붙들고 있던 아카시가 고개를 돌려 마유즈미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분명 흰색이었던 휴지가 금세 붉게 물들어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한 때는 휴지였을, 이제는 정체모를 붉은 덩어리가 된 그것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곧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화장실을 빠져나온 마유즈미는 넓은 거실 한 가운데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아 텔레비전 리모콘을 들었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볼만한 채널이 없었다. 낮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프로그램들로 잔뜩 편성되어있던 채널들은,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시간대에선 재미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프로그램들을 간신히 생명줄을 이어가듯 방송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유즈미는 아무 의미없이 채널을 돌려대던 것을 멈추고 여전히 불이 커져있는 화장실로 잠시 고개를 돌렸다. 아카시도 그랬다. 아카시도 한때는 모두의 관심을 받고, 어딜가도 화려함을 뽐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유즈미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그저 가만히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사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저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남편이었다. 정확히는 마유즈미 세이쥬로라 하는 편이 맞겠지만, 마유즈미는 딱히 아카시에게 성을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아카시라는 성이 주는 영향력은 너무나도 컸기에 감히 저와의 결혼 같은걸로 아카시 세이쥬로의 성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카시 역시, 딱히 성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나라에서 행한 결혼이기도 하고, 동성 결혼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아카시 세이쥬로가 결혼이라는 의식으로 맺어진 사이었다는 것이었다. 아카시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 전까지는, 그저 행복했었다.
아카시가 불치병 판정을 받은 지 어느새 7년이었다. 처음 3년은 정말이지 혼신의 힘을 다해 보살피고, 또 보살폈었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의사마저 대놓고 얘기해둔 부분이었다. 앞으로 아카시 씨에게 차도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드릴 거라고. 이 병의 끝에 완치라는 것은 없었다. 죽음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아카시는 천천히 죽어갔다. 살아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조금씩 생명을 꺼뜨리며 한 발짝 한 발짝 병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무엇을 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점점 죽어가는 아카시와 함께 마유즈미의 마음 역시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5년 차, 마유즈미는 제 자신이 무서워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더 고통일 거라며 퇴원을 권유받았다. 아카시는 집에 죽음의 기운을 잔뜩 몰고와 그것을 고스란히 품어 안고 있었다. 숨막히는 그 기운에 마유즈미는 생각했다. 그냥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런 제가 무서웠다.
7년 차, 이제는 아카시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었다. 가끔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하거나, 피를 쏟아내거나 할 때만 겨우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죽는다더니 징하게 안 죽네. 아카시의 생명이 먹혀 들어갈 때 제 생명도 함께 먹혀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7년 차의 마유즈미는 늘 도장을 가지고 다녔다. 다른 것은 빼놓고 다닐 지라도 언제나 바지 주머니에는 도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망신고를 무엇보다 빠르게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마유즈미는 늘 상상했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도장에, 붉은 인주를 듬뿍 묻혀 사망신고서에 내리찍는 제 모습을. 그것은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자 동시에 제게 내리는 자유의 증표이기도 했다.
신부가 되고 나서 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신부가 되는 데에 그다지 신앙심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신부가 되겠다는 목표 의식 하나만큼은 그 어느 신자에게 뒤지지 않았으리라 단언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을 믿는 척 연기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저 꼬박꼬박 성실하게 생활하는 모습만 보이면 사람들은 단순하게 '저 사람은 독실한 신자야.' 라며 나를 그들만의 분류법에 따라 무리 속으로 집어 넣어주곤 했다. 어째서 신을 믿지 않는 주제에 신부가 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단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가 신을 믿으니까.
그는 저 스스로가 신처럼 구는 주제에 우습게도 신을 믿었다. 제 자신 말고는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것처럼, 오로지 제가 절대인 것처럼 구는 주제에 남몰래 신에게 기대어 살고 있었다. 그가 신을 믿는다는 것을 알게된 직후에는 그저 그 모습이 보고싶었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이 보고싶었다. 다른 이의 위에 군림하여 제가 원하는대로 남을 부리는 것이 특기인 사람이 신 앞에서는 어떻게 굴지 궁금했다. 평범하고도 온화한 눈을 하고서 신에게 어떤 기도를 바칠지, 그것이 궁금했다. 어찌보면 우스운 이유였다. 아카시 세이쥬로 덕분에 내 인생의 가지가 완전히 다르게 뻗어나가게 됐으니까.
그러나 나는 이 길을 선택한 뒤로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러한 순간이 결국 찾아올 것을 믿고 그 지긋지긋한 가면들을 꾸역꾸역 눌러 쓴 채로 나는 버텨왔다. 신부가 된 이후로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였다. 바로 지금. 고해소의 창문 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이 살랑이듯 흩어지는 지금. 그의 향기가 고해소 안을 가득 메우는 지금. 성스러운 적막 속에서 다물린 입술이 달싹이는 지금.
"고해한 지 석 달 되었습니다."
그와 내가 이 좁은 공간 안에 단둘이 자리잡은 지금.
"잘 오셨습니다, 형제님."
뻗은 가지 끝에 꽃망울이 자리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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