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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지아카/홍적] 어둠속의 기억

팥_ 2014. 3. 28. 12:20

트위터에서 #RT된만큼_이스토리를_140자씩_늘려가기 해시태그를 이용하여 쓴 글을 옮겨왔습니다.

32RT 감사합니다!







아카시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아무런 빛도, 소리도 없는 그저 무한한 암흑의 공간.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에 이곳은 어디죠? 하고 물으려던 입을 아카시는 다물 수밖에 없었다.

 

1. 점점 가까이 다가와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형체는 아카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아카시보다는 약 십 년 정도 성숙해 보인다는 점, 그것 말고는 그저 아카시 세이쥬로와 모로 봐도 동일한 사람이었다.

 

2. 아카시가 입을 다문 이유는 딱 하나 뿐이었다. 묻지 않아도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앞에 선 저와 같은 모습을 한 남자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카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죽은 건가요?

 

3. 글쎄.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제 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소리가 아카시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 역시 제 소리와 동일한 소리였지만, 사실 그것을 남자의 소리라 말할 수 있는 지는 불확실했다. 남자는 쭉 입술을 열지 않고 있었으니.

 

4. 그건 네 선택에 따라 달린 거겠지. 아카시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남자가 마저 부연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이곳은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야. 네가 이곳이 천국이길 원한다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길 원한다면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이지.

 

5. 나를 왜 이곳에 데려온 거죠? 아카시가 살짝 인상을 쓰고서 물었다. 남자는 그런 아카시를 따라 인상을 쓰는가 싶더니 곧 신랄하게 웃어보였다. 아카시는 조금 더 표정을 찌푸렸다. 제 얼굴이 저런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영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6. 내가 너를 데려와? 하하, 네가 더 잘 알 텐데. 나는 누군가를 친히 데려오고 데려다 줄만큼 친절한 사람이 아니야. 나는 곧 너라고. 그러니 너 역시 누군가가 데려온다고 해서 순순히 따라올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아카시 세이쥬로.

 

7. 네가 선택한 거라고. 남자의 마지막 말에 아카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는데. 실망스럽네. 이곳으로 오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도록 노력해봐. 뭐가 생각나지?

 

8. 남자의 말에 아카시는 기억의 끄트머리를 찾아 잡기위해 천천히 생각을 타고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껏 암흑인 줄 알았던 공간의 벽 전체가 무한히 이어진 수천 개의 스크린이라도 되는 듯 아카시의 생각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내보내기 시작했다.

 

9. 갑작스레 환한 빛이 공간을 가득 메우자 순간적으로 놀란 아카시가 생각하기를 중단했고, 다시 공간은 암흑으로 물들어 나갔다. 그리고 그런 아카시를 보며 남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말했잖아, 여긴 네가 조종하는 공간이라고.

 

10. 아카시는 남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기억을 되짚어나가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 일그러지고 어긋난 기억의 영상들이 다시 공간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일부러 기억을 잘라내기라도 한 듯 온통 빈 칸 투성이였다.

 

11. 기억이 안 나요. 다시 한 번 공간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아카시의 목소리에 남자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아카시의 앞에 무릎을 구부려 쭈그리고 앉아 아카시의 머리에 제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옛날 일부터 잘 떠올려봐.

 

12. 고작 오른손일 뿐일 텐데 어째서 쇳덩이라도 올려 논 것처럼 무거운 건지. 아카시는 휘청거릴 뻔한 목을 간신히 바르게 세우고는 옛 기억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 공간 가득히 테이코 중학교의 교복을 입은 아카시와 익숙한 이의 얼굴이 비춰졌다.

 

13. 익숙한 얼굴. 아카시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이름을 내뱉을 수 있었다. 니지무라 선배. 그리고 중학생 아카시와 니지무라를 중심으로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가 싶더니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한 명씩 스크린에 비춰지기 시작했다.

 

14. 신타로, 아츠시, 다이키, 료타테츠야. 마지막으로 기억 속에서 고개를 내민 쿠로코 테츠야를 생각하는 순간 아카시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다음 기억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니지무라로 부터의 주장 계승, 3학년의 전중 결승전, 그 날의 맹세.

 

15. 한 번 샘솟기 시작한 기억은 멈출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아카시는 멍하니 제 눈앞에 펼쳐지는 기억의 영상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기억들은 가끔 일그러지는 부분이 몇 있긴 해도 역시 아카시의 기억답게 대부분 멀끔한 모습이었다.

 

16. 빠르게 흘러가던 기억이 곧 천천히 원래의 속도를 되찾듯 느려져갔다. 윈터컵 결승전, 세이린과의 경기였다. 경기는 이미 끝이 났는지 아카시의 기억 속에는 멈춰버린 전광판만이 빛나고 있었다. 가끔씩 눈을 깜빡이는지 어둠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제외하면 정지화면과도 같은 영상이었다.

 

17. 95 - 97 이라는 전광판의 숫자는 라쿠잔의 패배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카시는 끝나지 않는 그 기억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기억이 뒤틀렸다.

 

18. 뒤틀린 기억 다음에는 새로운 기억이 이어졌다. 맨 처음 아카시가 떠올리려다 실패했던 그 기억이었다. 기억 속의 아카시는 휑하니 넓은 방 한 가운데서 의자를 밟고 올라서있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거세게 부는 바람이 커튼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19. 거센 바람과 함께 의자가 넘어졌고, 넘어진 의자 위로 흰 다리가 발버둥 쳤으며, 기억 밖의 아카시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이 공간을 집어 삼켰다. 갑작스레 덮친 어둠에 함께 있던 남자까지 보이지 않게 되자 아카시는 급격한 불안감이 저를 짓눌러 오는 것을 느꼈다.

 

20. 저기요, 저기요? 제가 생각하도 참 어린아이 같은 부름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 끝없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말이다.

 

21. 뭘 불안해 해. 말했지, 여긴 네가 조종하는 공간이라고. 내가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그저 생각만 하면 돼. 허공 속에서 들린 목소리와 동시에 마치 남자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것처럼 갑자기 남자가 어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22. 전 죽은 게 맞는 거죠? 아카시의 말에 남자는 인상을 쓰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 선택에 따라 달린 거야. 굳이 말하자면 죽어가고 있는 상태지. , 그래서. 이 상태가 지속되길 원해?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면 네가 바라던 대로 죽겠지.

 

23. 그걸 원하니, 아카시 세이쥬로? 제 얼굴을 한 사람에게서 제 이름을 듣는 것은 꽤나 생소한 일이었다. 아카시는 무릎을 모아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 몸을 웅크렸다. 모르겠어요. 왜 모르겠어? 죽고 싶어서 목을 맨 거 아니었어? 맞아요.

 

24. 그 때는 왜 죽고 싶었는데? 승리하지 못한 나는 살 가치가 없으니까. 그럼 지금은 왜 모르겠는데? ……. 생각보다 멍청하구나, 같은 나면서. 조금 도와줘도 되겠지, 이렇게 멍청한데. 남자의 한숨과 함께 공간의 벽면이 다시 빛으로 차올라 갔다.

 

25. 지금까지 봐온 영상들보다 훨씬 지직거림과 일그러짐, 소음이 심한 영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카시가 처음으로 보는 것들이기도 했다. 아카시, 아카싯치, 아카칭, 아카시군. 저를 부르는 많은 소리들이 어지럽게 공간을 채워나갔다.

 

26. 바깥의 모습이야. 네가 이곳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바깥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지. 들려? 너를 부르는 소리가? 아카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아카시는 입을 굳게 다물고서 갈수록 소음이 심해지는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27.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 사이로 딱 한 마디만이 아카시의 귓가를 맴돌았다. 살아줘, 제발. 딱딱하게 굳어가는 아카시의 표정을 보기라도 한 건지 남자가 때 맞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왜 모르겠다고 생각해?

 

28. 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카시의 대답에 남자는 다리를 꼬고 앉아 까딱거리던 다리를 멈추고 아카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 세이쥬로, 너는 이 공간이 어떤 공간이 되기를 바라? 네가 조종하는 이 공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

 

29. 남자의 말에 아카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남자는 차분하게 아카시의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다시 다리를 까딱거렸다. 저는. 다시 까딱거림이 멎었다. 저는저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되길 원해요. 그 말에 남자는 환히 웃어보였다.

 

30. 동시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카시에게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귓가에 제 입술을 가까이 했다. 그건 굳이 이 공간이 아니어도 되잖아. 가까이 온 남자의 머리카락이 검정색으로 변했다고 생각한 순간, 잘 가 세이쥬로. 그리고 남자가 아득해졌다.

 

31. 다시 눈을 뜬 아카시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뿌연 형광등과, 옹기종기 모인 색색의 머리들이었다. 살아줘서 고마워, 아카시. 색색의 머리들 사이로 검은 머리카락이 저를 끌어안았다. 그 머리카락이 마지막 순간 변한 남자의 머리카락과 닮았다고 생각 하며 아카시는 그 검은 머리카락에 손을 뻗어 마주 끌어안았다.

 

32. 손에 닿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 살아있구나. 무한한 암흑 속에서 느낀 그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아카시는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살려줘서 고마워요, 니지무라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