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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밤 02

팥_ 2014. 1. 1. 19:11

가을님과 함께 하는 로른쪽 릴레이로 제 홈에는 짝수 편들만 올라옵니다.

모든 글을 보시려면 이 쪽으로 가주세요. 




* PC로 보시면 BGM이 나옵니다.






  “롤로노아 조로가 널 꽤 즐겁게 만들었던 모양이구나, 로우.”


  도플라밍고의 그 말은 로우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도플라밍고는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정세를 읽는 능력이 우수해 권력이 바뀌는 철이 다가오면 누구보다 먼저 다음에 권력을 잡을 이를 예측해 물밑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그만큼 상황판단도, 눈치도 빠른 남자였다. 대화하는 상대의 작은 몸짓, 말투, 억양 같은 것만으로도 상대를 간파하고 정보를 캐내는 게 그의 능력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그런 그를 봐온지라 이젠 저를 감추는 일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도플라밍고의 말대로 즐거운 상대를 만나서 방심한 건지 간파당하고 만 것이었다. 멍청하게 굴었군. 로우는 자책했다. 위험한 계획을 앞두고서 이런 실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 보스. 말꼬리를 잡는 재미가 있는 남자더군요. 어쨌든 우리 쪽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했으니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내가 직접 만날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이고?”

  “아뇨. 귀찮아 보이긴 해도 그래 봤자 말단 형사일 뿐입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귀찮은 일이 벌어지더라도 제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 놀아주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길게 끌면 귀찮아져. 그 정도는 너도 알겠지만.”


  도플라밍고의 얼굴에서 싸늘한 기운이 그제서야 거둬졌다. 로우는 속으로 안도하곤 도플라밍고가 책상 위로 벗어 던지다시피 한 선글라스를 주워 곱게 정리해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놓았다. 한 손으로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내리고 책상 위에 두 다리를 교차해 올리는 도플라밍고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 밖에서 누군가가 잔뜩 도플라밍고의 심기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로우는 도플라밍고에게 보이지 않게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도플라밍고의 기분이 바닥을 치는 날이면 고생하는 건 로우였다. 일단 사무실이 난장판이 될 거고, 엄한 부하들을 불러 피바다를 만들 터였다. 그런 후 한바탕 폭풍이 뒤흔들고 간 자리를 정리하는 건 전부 로우의 몫이었다. 평소 사무실을 청소하는 건 물론 가정부가 따로 있었지만 도플라밍고가 뒤엎은 후에는 기밀 서류들이 사무실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기 때문에 문을 틀어 잠그고 로우가 직접 정리해야만 했다. 이 중에 한 글자라도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세상이 뒤바뀔 서류들이 많았기에.


  겨우 사무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면 다음은 괜히 쓸데없는 피를 흘린 부하들을 치료해야 했다. 부하 때문에 사단이 난 게 아닌 이상 목숨을 끊어놓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꽤 집중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난도질을 해놓았기에 단순한 응급처치로 될 일이 아니어서 꼭 로우가 손을 대야만 했다. 로우는 의사 면허가 있는 유일한 간부였다. 조직 내에 의사는 많았지만 도플라밍고로 인해 다친 부하들을 그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어디 가서 이러쿵저러쿵 떠들만한 일을 조금이라도 쥐여 줬다간 분명 나중에 피곤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로우의 의사 면허는 도플라밍고의 지시로 딴 것이었다. 간부들만 알고 있어야 하는 일에 의사가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애당초 로우가 똑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로우가 주로 하는 일은 도플라밍고의 평소 건강 관리나 은신이 필요한 이들의 사망 신고서를 작성하는 일, 간부들을 치료하는 일 등이었다. 덕분에 다른 간부들보다도 로우의 일은 훨씬 많았지만 그게 곧 로우를 신뢰한다는 도플라밍고의 뜻이었고, 이렇게 되기까지 로우가 노력한 시간만 십 년이 넘었다. 이제 그 정점에 올라섰으니 슬슬 모든 것을 꺾어버릴 때였다.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조금. 몰랐는데 오늘 모인 자리에 유스타스 애송이가 참석했더라고. 놀랍기도 하지. 그 무식하게 힘만 믿고 날뛰는 놈이 언제 이 자리까지 올 정도가 됐는지. 머리 좋은 부하라도 뒀나. 그 부하에게 백 번 절이라도 해야 할 거야 그놈은.”

  “유스타스가 보스께 어떻게 굴었을지 안 봐도 뻔하군요.”

  “삼류 양아치 같은 애송이한테 도발이나 당하고. 내 위상이 그 정도로 떨어졌나 로우?”

  “그럴 리가요. 유스타스가 언제는 상대 위상 같은 거 신경 쓰고 도발했습니까. 요즘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가 겹치신 듯합니다. 좀 쉬세요.”


  로우는 손을 뻗어 도플라밍고의 목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넥타이를 끝까지 풀어 내렸다. 손을 거둬 넥타이를 정리하려는 찰나, 도플라밍고가 제 목에 닿은 로우의 손을 덥썩 잡아왔다. 로우는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주었다가 곧 풀고 도플라밍고가 잡은 대로 손을 맡겼다. 로우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 걸 도플라밍고 역시 느꼈는지, 도플라밍고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로우의 손을 쥔 도플라밍고의 손이 느리게 움직이더니 이내 로우의 손가락 끝에 거칠면서도 따뜻한 입술의 표면이 닿아왔다. 그것도 잠시, 로우는 곧 손가락 끝에 감겨오는 뜨거운 혀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말캉거리면서도 오돌토돌한 돌기가 손끝을 애무하듯 천천히 간질이더니 손가락 뿌리서부터 핥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로우는 살짝 인상을 쓰고서 도플라밍고가 제 손가락을 끈덕지게 핥아내는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로우가 조금의 거부도 하지 않는 것은 이런 상황이 좋아서가 아님을 도플라밍고는 잘 알고 있었고, 도플라밍고가 잘 알고 있다는 사실 또한 로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뿌리부터 핥아 올라가 도달한 손가락 끝을 혀로 돌려가며 핥아내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손가락 마디마디를 앞니로 살짝 물기도 하고, 롤리팝을 녹여 먹듯 불거진 뼈를 핥는 행위에 로우는 결국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다. 도플라밍고는 이럴 때면 늘 로우가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여야 그만두곤 했다. 언제나 건조하게 구는 로우의 다른 반응을 보고서야 만족하는 것이었다. 도플라밍고는 제 입에서 로우의 손가락을 빼내고 웃으며 번들거리는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딱딱해, 로우.”

  “…….”

  “어릴 때는 도피, 도피 하면서 귀엽게 굴었는데 말이야. 존댓말도 섹시하지만 존댓말이야 다른 사람들이랑 있을 때는 늘 들으니까 둘만 있을 때는 반말도 좀 듣고 싶거든.”

  “어릴 때는 철이 없었으니까요. 저도 이제 스물여섯입니다, 보스. 이만 쉬세요.”


  깍듯하게 인사를 한 로우가 등을 돌려 나가려는 순간 도플라밍고가 뒤에서 로우의 팔을 잡아끄는 탓에 로우는 주춤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웃음을 띤 도플라밍고가 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이야, 로우.”

  “…….”

  “빨리.”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도플라밍고를 바라보던 로우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지독한 악취미로군. 명령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진 이상 할 수밖에 없었다. 도플라밍고의 명령은 말 그대로 절대적이었기에. 


  “…스트레스가 쌓이면 건강에 최악이니까 얼른 쉬어. ……도피.”

  “착해라.”

  “……정말로 가보겠습니다. 쉬세요.”


  오냐. 싱글싱글 웃으며 까딱까딱 손을 흔드는 도플라밍고를 뒤로 하고 로우는 최대한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도플라밍고의 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로우는 비틀거리며 벽을 붙잡고 기대섰다. 당장이라도 엎어버리곤 남자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싶었다. 로우는 손이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쥐었다. 사람이라면 흔히 가지고 있을 유년기의 행복한 추억을 몽땅 앗아가 버린 남자의, 사랑하는 이를 쏘아 죽인 남자의 개가 되어 일하고 있는 꼴이라니. 즉각 넥타이를 잡아채고 대리석 바닥에 짓눌러 뒤통수에 총이라도 한 번 겨눠봤어야 했다. 설사 즉각 사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멍청하게 거기서 실신이나 해놓고는 비위를 맞춰가며 살고 있는 꼴이라니. 그 날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피비린내가 코끝에서 맴도는 듯했다. 로우는 간신히 벽을 잡고서 위태롭게 헛구역질을 했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세요?”


  등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로우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펭귄이 품 안에 서류뭉치를 가득 안고 놀란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로우는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잠깐 어지러워서. 괜찮으니까 네 볼일 보러 가봐.”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사소한 일들은 전부 제가 처리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 그리고 보스. 그 왜, 전에 다른 구역에서 경찰이 D 패밀리를 건드렸다고 발칵 뒤집어졌던 사건 있었잖아요.”

  “아아, 있었지. 근데?”

  “거기 수사 총 책임자가 롤로노아 조로 그 형사였다고 합니다. 그 사건으로 윗선에서 잘라버릴까 하다가 그러기엔 실력이 뛰어나서 유명했나 봅니다. 그런 사람들 괜히 건드리면 위에서도 골치 아프니까 근신 좀 시켰다가 그냥 이쪽으로 좌천시켜버린 거죠.”

  “…안 그래도 충분히 골치 아픈 판국에 하필 이런 놈이 끼었군.”


  D 패밀리라 하면 이 바닥에선 돈키호테 패밀리와 동등한 정도의 거대한 세력이었다. 거대한 조직들은 일반적으로 경찰들이 쉬쉬하고 넘기며 조직의 잔챙이들만 잡아들이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 조직의 거물을 치기엔 이러한 큰 조직들은 대부분 나라 경제와 정치의 한 축을 맡고 있었기에 함부로 건드렸다간 작게는 제 밥그릇이, 크게는 나라가 휘청이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연히 합당한 정의로 취득한 권력은 아니었지만 괜히 큰일 키우느니 적당히 표면에 드러나는 범죄를 일삼는 잔챙이들만 잡아 눈 가리고 아웅 하자는 식이었다. 이런 바닥에서, D 패밀리의 수장을 치려는 사건이 벌어진 게 대략 3년 전의 일이었다. 혹시 돈키호테 패밀리에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제때 대비하기 위해 로우는 그때의 사건 서류를 자세히 정독한 적이 있었다. 상당히 치밀하면서도 행동적으로 계획된 일이었다. 비록 수장을 잡아 내리겠다는 목적은 이루지 못했어도 그 사건으로 꽤 굵직한 조직원들이 잡혀들어갔었다. 그런 사건의 총 책임자가 하필 이 시국에 이쪽으로 발령받다니. 로우는 인상을 쓰고 관자놀이 부근을 짚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D 패밀리의 수장이 바뀌었더랬지. 반년 전이었나. 상당히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풍문이 들려왔었다. 그 새로운 수장은, 로우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그렇게도 자랑했던 동생이었다. 그의 사무실 책상에 세워진 액자에서도, 그의 지갑 안에 끼워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던 얼굴이었다. 서로 다른 뜻을 품어 그 혼자 D 패밀리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형제간의 우애가 삐뚤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로우는 작년 이맘때쯤 그 얼굴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던 얼굴과는 다르게, 상당히 딱딱한 얼굴을 하고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로우는 사실 그 돈독한 우애로 그의 동생이 도플라밍고의 멱살을 잡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길 바랐다. 비겁한 저를 대신해서 누군가는 그래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동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숙연한 얼굴로 장례식을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 무렵의 일을 생각하자 로우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저려오는 듯했다. 이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겠군. 로우는 한숨을 쉬고선 괜히 넥타이를 고쳐 맸다.


  “이번 일에는 크게 걸림돌이 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모르는 일이니까요. 롤로노아 조로는 제가 주시할 테니 보스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럴게. 일단 다른 일들이 우선이니까. 그리고 이번 일이나 이번 계획, 뭐 이런 말로 부르는 건 좀 위험해. 적당한 암호명도 생각해보고. 이만 볼일 보러 가.”

  “예, 보스. 쉬세요.”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하는 펭귄에게 로우가 피곤한 얼굴로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고작 형사 하나로 일을 그르칠 리도, 그럴 수도 없지. 조금만 기다려줘. 다 끝낼게 내가. 내 복수도, 네 복수도 전부.


* * *


  시끄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부스스 일어난 로우가 드러난 맨살 위로 비틀거리며 가운을 걸쳐 입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로우가 늘 일어나는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이 시간부터 어느 미친놈이야. 짜증이 가득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로우와 동시에 로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우는 가운의 앞섬을 대충 여미고 걸어가 문을 열었다.


  “저, 그… 로우씨. 좀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계속 저러고 있어서….”

  “보스는요?”

  “도플라밍고님은 새벽 일찍부터 따로 볼일이 있다고 나가셔서…”

  “그럼 됐어요. 제가 나가 볼게요. 고생했어요.”


  겁에 질린 얼굴로 떨며 얘기하는 어린 여시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로우는 가운을 마저 여미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인터폰 화면에는 정말이지 뜬금없는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로우는 인상을 쓰고서 인터폰 화면을 노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여전히 예의가 없군, 유스타스 키드. 보스를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했어야지. 사전 약속도 없이, 이런 이른 시간에 무식하게 찾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지.”

  - 뭐야. 트라팔가 너냐? 재수 없는 건 여전하네.

  “보스는 안 계셔. 할 말이 있으면 나를 통해 약속을 잡고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해라.”

  - 딱히 꼭 니네 보스를 만나서 해야 하는 말은 아니고. 너라도 대신 들어주면 좋겠는데. 당장 좀 자랑할 거리가 생겼단 말이지.


  그 말과 동시에 키드가 화면에 대고 종이 한 장을 펄럭거렸다. 로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응시했지만 화면 너머로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인터폰의 화질이 좋을 리는 없었다. 


  “…너 혼자 들어오는 조건이다. 시간제한은 30분. 조건에 동의하면 문 열도록 하지.”

  - 샌님같이 까다롭게 구는 건 한결같구만. 30분도 넘치지. 동의할 테니까 문이나 열어라.


  못마땅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로우가 마지못해 버튼을 눌렀다. 정문부터 현관까지 오는 데도 조금 시간이 걸릴 터였다. 자신만만한 얼굴 뒤로 검은 세단 한 대가 보이는 듯했으니 차를 보낼 필요는 없겠지. 손님 오실 테니까 현관 열고 응접실로 안내해줘요. 휴대폰을 꺼낸 로우가 간단하게 말하곤 응접실로 향했다. 긴 테이블과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푹신한 소파가 들어찬 응접실에 들어간 로우가 자연스럽게 상석에 위치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사람이 왔는데 얼굴 한 번 안 비추는 건 어느 나라 예의냐?”


  삐딱한 목소리와 함께 넥타이를 매지 않고 와이셔츠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차림의 키드가 걸어와 로우의 옆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로 다리를 뻗었다. 로우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끽해야 30분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그냥 말을 않기로 했다.


  “가운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이 시간부터 예의 없게 쳐들어온 사람이 누구였더라. 용건이나 말해.”

  “아아, 용건. 그래 용건.”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은 키드가 테이블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로우는 허리를 숙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한껏 몸을 뒤로 해 기대고 앉아 키드 쪽을 향해 손을 내밀고만 있었다. 


  “하여튼 재수 없는 새끼. 그 보스에 그 부하라고 둘 다 존나 재수 없다니까.”

  “닥쳐 유스타스.”


  결국 키드가 다시 종이를 들어 로우의 손에 얹어 주었고, 로우는 그제서야 종이를 들고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종이를 읽어 내려가는 로우의 인상이 점점 구겨져갔고, 그걸 바라보는 키드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종이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는, 전부 정부와 엮인 도플라밍고의 행동들이었다. 뇌물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대선 조작에 개입했다거나, 정보국의 서류를 조작했다거나, 야당 대표의 아들을 암살했다든가 하는 일들이 저 한 장의 종이 안에 들어차 있었다. 이 사실들 중 단 하나라도,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졌다간 당장에 세계가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분명히 철저하게 관리했을 텐데 어째서. 로우는 인상을 쓴 채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면 물론 도플라밍고도 끝장이지만, 저도 끝장이었다. 도플라밍고가 끝장나는 건 상관없었다. 애초에 바라왔던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도플라밍고를 제 손으로 치기 전에 저가 도플라밍고의 손에 먼저 끝나는 일이었다. 이 일이 다른 이의 손도 아니고, 도플라밍고가 최근 가장 눈엣가시로 여기는 유스타스 키드의 손에 들어갔으니. 


  “이거 어디서 났어.”


  테이블 위에 침착하게 종이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로우는 품 안에서 빠르게 작은 단도를 꺼내 키드의 목에 겨누었다. 푸하하. 키드는 웃음을 터뜨리며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걸 말하겠어? 아침부터 좋은 소식 들어왔길래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냐. 직접 온 보람이 있네, 천하의 트라팔가 로우가 이 정도로 동요하는 것도 보고. 도플라밍고 면상이었으면 더 즐거웠겠지만.”

  “이걸로 뭘 어쩔 셈이지, 유스타스. 설마 우리 쪽이 너희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뭘 어쩌다니. 천천히 숨통을 조여야지. 갑자기 일을 벌여봤자 우리 쪽도 손해인 걸 모를 리가 있나. 천천히 조여서, 지 숨통이 막히는 줄도 모르게 죽여야지.”


  목에 겨눠진 날카로운 칼 앞에서도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키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로우는 앞이 까마득해지는 듯했다. 복수 하나 하겠다는데, 이미 도플라밍고라는 거대한 산이 버티고 있는 길에 왜 자꾸 이것저것 장애물들이 끼어드는지. 신이 있다면 그 멱살을 잡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로우는 크게 숨을 마셨다가 내뱉고 품 안에 다시 단도를 집어넣었다. 아스라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긴 있었다. 모 아니면 도인 도박이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지난 일 년간 지렁이가 기듯 몸을 감추고 천천히 작업해온 계획이 한순간에 다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상태로 도플라밍고의 손에 제거될 것이다. 그것보다는 뭐든 낫겠지. 크게 숨을 내쉰 로우가 펭귄과 샤치 역시 부디 제 결정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30분으로는 모자르겠군. 유스타스. 나와 손을 잡자.”


* * *


  익숙한 얼굴이라고 로우는 생각했다. 양 뺨에 주근깨가 박혀 눈을 접으며 말갛게 웃는 얼굴이 익숙했다. 잘 잤어, 로우? 익숙한 얼굴이 입을 열어 제 이름을 부르자 언제 기억이 안났냐는 듯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에이스. 로우가 목소리를 내자 그 얼굴이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우는 팔을 뻗어 에이스의 등에 손을 얹었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조금 힘을 주어 끌어안아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역시 익숙한 살 내음이었다. 에이스의 손이 제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 역시 익숙한 감촉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낯설었다. 분명 모든 것이 익숙했는데, 어느 한구석이 낯설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낯설음에 로우는 괜히 에이스의 품 안에서 뒤척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그 낯설음의 이유를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순식간에 화면이 오래된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처럼 지지직거렸다.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저를 따뜻하게 안고 있었던 에이스는 저 멀리 스페이드의 형상을 한 의자 위에 묶여 있을 뿐이었다. 로우 자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숨 막히게 검은 복장을 한 채로, 다른 검은 이들과 한데 모여 에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우는 그제야 좀 전의 낯선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안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너는 이미 죽었는데. 그걸 깨달음과 동시에 로우는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하지만 로우 역시 알고 있었다. 에이스가 죽기 전에는 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하며 뛰쳐나오고 싶었건만 꿈속의 저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죽음의 형상에 묶여서 총알이 심장을 꿰뚫기만을 기다리는 에이스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의자 위에 앉아 내려다보던 선글라스를 낀 금발 머리 남자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느긋하게 에이스를 향해 걸어왔다.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남자가 앉아있던 의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초승달의 모습을 한 의자였다. 벽 전체를 가득 메운 유리창 앞에 덩그러니 주인을 잃고 빈 초승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도플라밍고. 에이스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가 도플라밍고임을 인지하는 순간 로우는 어떻게 해서든 뛰쳐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구잡이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도플라밍고가 느리게 팔을 들어 올렸다. 도플라밍고의 동작이 원래 느린 건지, 아니면 제 눈에만 느리게 보이는 건지 로우는 분간할 수 없었다. 로우는 이제 도플라밍고의 다음 동작이 무엇일지 알 수 있었다. 수십 번도 더 봐온 장면이었다. 곧 넥타이를 쥐어 느슨하게 하고, 방아쇠에 얹은 검지를 당길 것이었다. 도플라밍고는 권총을 쥔 손의 반댓손을 들어 넥타이를 살짝 풀러 내렸다. 로우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유리창 앞에 놓인 초승달 모양의 의자가 꼭 저 바깥 하늘에 떠 있는 달 같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필사적으로 빈 초승달에 초점을 맞췄다. 어차피 곧 깨어날 터였다. 그 생각과 동시에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이 울렸고, 압도적인 크기의 유리창 위로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붉게 물들어가는 와중에 오로지 하나. 초승달만이 핏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위압적으로 놓여있었다. 붉은 밤이었다. 끔찍하게도 붉은 밤이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붉은 밤이었다. ……보스! 역시 익숙한 펭귄의 비명과 함께 서서히 붉은 밤하늘이 사라져갔다.


  갑작스레 누가 깨운 것처럼 눈을 번쩍 뜬 로우는 크게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마구잡이로 헤집어댔다. 펭귄, 펭귄…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로우의 목소리에는 습기까지 어려있는 듯했다. 간신히 펭귄과의 직통 휴대폰을 찾아낸 로우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통화음이 울리기 시작한 지 단 2초 만에 전화가 연결됐다. 


  - 무슨 일이세요 보스?

  “빨리, 빨리…”

  - 바로 가겠습니다.


  로우의 헐떡임이 섞인 말에 펭귄은 앞뒤 잴 것 없이 곧장 전화를 끊었다. 아마 곧 문을 열고 들이닥칠 것이었다. 로우는 무릎을 세워 웅크리고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잘근거리기 시작했다. 못 봤던 장면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압도적이었다. 피로 물들어 검붉은 밤하늘이 위압적으로 저를 깔아뭉갤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에이스의 죽음과 동시에 실신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마지막 기억이 갑자기 꿈속에서 발현된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내가 왜 꿈을 꿨더라. 그래, 유스타스를 돌려보내고 급격하게 피곤해져서 마저 잠을 잤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로우는 더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무릎을 끌어안곤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떨림이 잦아들질 않았다.


  “보스!”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거세게 열고 펭귄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로우가 번쩍 고개를 들자 펭귄이 숨을 몰아쉬며 로우의 곁으로 달려와 눈에 띄게 떨고 있는 로우의 손을 붙잡았다. 펭귄의 얼굴을 보자 로우는 간신히 버텨왔던 많은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로우는 펭귄이 붙들지 않은 반대쪽 손을 뻗어 펭귄의 옷자락을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펭귄이 몸을 숙여 로우의 얼굴을 바라보자 로우는 그대로 펭귄의 등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한순간 펭귄의 몸이 바싹 굳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펭귄은 더 몸을 숙여 로우를 세게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었다. 로우가 악몽으로 심하게 힘들어하는 날이면 종종 있던 일이었다. 펭귄은 제 품 안에서 아직도 바들바들 떠는 로우가 안쓰러워 크게 한숨을 쉬고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계속해서 등을 쓰다듬었다.


  “펭귄.”

  “네, 보스.”

  “붉은, 붉은… 붉은 밤이었어. 그… 그 날 말이야. 붉은 밤하늘에 커다란 초승달이 하나 떠 있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

  “…우리 계획, 앞으로 붉은 밤이라고 불러.”


  흥분했던 로우의 목소리가 잠시 잦아들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다시 한 번 그런 하늘을 만들어 낼 테니까. 이번엔 다른 의미로 초승달이 뜨게 해줄 거야. 스스로 원해서 그 의자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내가 끌어낼 거니까. 끌어내려서, 빈 초승달을 두고 그 날처럼 붉은 밤을 만들어줄 테니까.”

  “예, 보스. 얼마든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계획을 성공시켜서, 눈앞에 있는 이 불쌍한 보스의 짐을 하루빨리 내려줘야겠다고 펭귄은 생각했다. 이 남자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고독한 삶의 짐을 지게 하는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대신해 그저 좀 더 힘을 실어 로우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존잘님이랑 릴레이같은 거 하는 게 아니었는데... 쓰고 보니 조로가 사라졌다고 한다... 조로는 다음편에 나오겠지 뭐... ㅎ (책임전가) 원래는 유스타스 나와 손을 잡자 하고 끝났어야 하는 글인데 제가 좀 욕심을 부렸습니다... 가을님 이 이상 분량 늘리지 맙시다 우리... 루피는 그냥... 루로우를 못써서 슬퍼서 끼워넣어봤습니다 흡... 그래도 키드로우 쓸 때 그나마 숨막히는 느낌이 아니어서인지 나름 재밌었어요 캬캬 설정성애자인 제가 막 이것저것 또 끼워맞추기 시작했다는 소식인데요 가을님이 잘 마무리 해주시겠죠 뭐... ^-^.... 존못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편은 존잘일거에요...


+ 가운만 입은 로우 복장은 드레스로자의 로우 복장을 생각하고 썼습니다... 상상하면서 코피 터져 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