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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시라] 귀여운 연인

팥_ 2016. 3. 22. 01:02




  오늘은 드물게 집중이 되지 않는 날이었다. 평소부터 그리 좋아하지 않는 과목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자꾸만 딴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심지어는 눈꺼풀이 살살 내려앉기까지 했다. 시라부는 가볍게 좌우로 고개를 흔들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는 것보단 이 편이 낫지 않을까. 시라부는 한 손으로는 샤프펜슬을 돌리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자세로 바깥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날이 좋아 밖에서 체육 수업을 진행중인지 닫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소리가 제법 시끄러웠다.

  잠깐. 시라부는 인상을 찌푸리고 저도 모르게 창문 쪽으로 목을 길게 빼었다.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어디서도 알아볼 수 있을 법한 독특한 머리 모양을 가진, 세미 에이타였다. 흐음. 시라부는 턱을 괸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땀으로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며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떠들고 있던 세미는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잠시 멈춰 섰다가 급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라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천천히 세미의 뒤를 쫓았다. 얼씨구. 시라부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세미가 향한 곳은 체육 비품들을 힘겹게 들고 가던 어느 여학생의 옆이었다. 세미는 무어라 말을 건네는가 싶더니 곧 여학생에게서 물건들을 건네받아 함께 걸어 나갔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세미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예쁜 여학생과 잘생긴 남학생.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만한 조합의 비쥬얼이었다. 세미는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었고, 여학생 역시도 생글생글한 미소를 띠고서 세미에게 말을 건넸다. 세미와 여학생의 얼굴과는 상반되게 시라부의 얼굴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세미 에이타가 제 앞에서 저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웃기야 웃었지. 하지만 저렇게 환하게 웃은 적은 없었다. 시라부는 뚱한 얼굴을 하고 계속해서 세미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돌부리라도 있었는지 여학생이 잠시 휘청거리자 세미는 다급히 몸을 움직여 제 품으로 여학생을 받아내었다. 여학생은 놀란 얼굴로 세미의 품에서 떨어졌고, 세미는 머쓱한 얼굴로 양팔을 들어보았다. 아마 양손이 모두 짐으로 가득 차있어서 그랬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겠지. 여학생은 살짝 웃으며 무어라 말을 건넸다. 시라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결국 창가에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수업 듣기는 글렀다 싶었다. 



  “말 좀 하자.”

  오늘따라 왜 이렇게들 빠른지. 하필이면 마지막에 남은 게 세미와 자신이라 시라부는 아직 다 준비를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허겁지겁 짐을 챙겨 라커룸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세미가 손목을 붙잡아온 탓에 재빠르게 문을 열려던 시라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미는 꼭 저와 시라부, 둘만 남는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요.”

  시라부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세미는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지금 기분 나쁜 게 누군데. 시라부는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곤 세미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세미는 시라부의 얼굴을 마주보는데 집중한 탓인지 도통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파요.”

  “아, 미안.”

  시라부가 작게 중얼거린 말에 세미는 흠칫 어깨를 들썩이며 빠르게 시라부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럴 거면서 센 척하기는. 시라부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몸을 돌렸다. 

  “좀.”

  이번에 세미가 붙잡은 곳은 시라부의 어깨였다. 시라부는 조금 전보다도 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너 오늘 이상해.”

  “안 이상한데요.”

  “내가 말 걸면 죄다 무시하고 도망갔으면서.”

  “…….”

  “지금도 얼굴에 딱 화났다고 써져있고.”

  세미의 말에 시라부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은 세미는 시라부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놓고 부드럽게 시라부의 볼을 쓰다듬었다.

  “뭐에 그리 화가 나셨을까.”

  “애 취급 하지 마요.”

  시라부는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단번에 대꾸했다.

  “애 취급 아닌데.”

  “이게 애 취급이거든?”

  “말이 짧다.”

  “뭐.”

  시라부는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세미는 괜히 눈썹을 늘어뜨리고 아이를 달래듯 시라부의 뒷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그래도 아까처럼 제 말을 죄다 무시하는 대신 이제는 대꾸는 해주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라부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세미의 손길을 피하려 했으나 도망치려 하지는 않았다. 세미는 제 손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비트는 시라부를 끈질기게 쫓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라부의 이마에 주름이 하나 더 깊게 패었다. 

  “그 여자한테도 이래요?”

  결국 시라부는 세미의 손을 거칠게 쳐내곤 따지듯 물었다. 그 여자? 세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름대로 시라부가 화가 났을만한 이유를 제 스스로 예측해보긴 했지만 시라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상 밖의 것이었다.

  “됐어요.”

  시라부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세미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금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야, 야, 야, 좀!”

  곰곰이 생각을 떠올리던 세미가 급하게 손을 뻗어 시라부의 손목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가해진 힘에 시라부는 넘어지듯 세미의 품으로 들어왔고, 세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팔로 시라부를 감싸듯 안았다. 

  “그 여자가 누군데?”

  세미는 고개를 숙여 시라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다시피 하며 물었다. 시라부는 당연하게도 세미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지만 저를 가두듯이 안고는 끈질기게 쫓아오는 세미를 피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응? 시라부.”

  세미는 다시 한 번 달래듯이 물었다. 시라부는 몇 번 입술을 비죽이다가 구석으로 눈동자를 돌리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에.”

  “응?”

  “……체육시간이요.”

  세미가 한 번 더 묻고 나서야 시라부는 비교적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을 토해내었다. 체육시간? 세미는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시라부가 말한 ‘그 여자’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때 보고 있었어?”

  “왜 웃어요?”

  시라부의 날카로운 지적에 세미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있던 입꼬리를 과장스럽게 내렸다. 사실은 시라부의 심기를 그렇게 거슬릴만한 짓을 했는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찌됐건 지금 상황은 시라부가 무려 ‘질투’라는 걸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을까봐 잔뜩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맥이 탁 풀리기도 했다. 

  “내 앞에서는 그렇게 안 웃어주면서.”

  시라부의 중얼거림에 세미는 또다시 실실 올라가던 입꼬리를 뚝 멈추었다. 

  “그 여자 앞에서 엄청 환하게 웃는 거 다 봤거든요? 예쁜 여자가 그렇게 좋아?”

  낮의 기억을 떠올리니 급격하게 화가 나기라도 한 건지, 시라부는 갑자기 과격해진 목소리를 뱉어내며 세미를 홱 올려다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세미는 시선만으로도 얻어맞는 듯한 기분에 괜히 몸을 움츠렸다. 

  “나한테는 맨날 귀엽지 않네, 뭐네 하면서 짜증만 내고. 진짜 짜증나. 넘어지면 좀 어때요? 양손에 짐 들었으면 못 잡아줄 수도 있지. 그걸 품으로 받아줘? 애인도 있는 남자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진짜 미친 거 아,”

  “잠깐만, 잠깐만!”

  말을 하면 할수록 언성이 높아지고 거칠어지는 시라부의 목소리에 세미는 급하게 시라부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가 박힌 모양인데. 세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방금 전에 시라부의 입을 통해 들은 ‘짜증만 내고’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황급히 표정을 풀었다.

  “……그건 겉치레용 미소야.”

  세미의 말에 시라부는 한쪽 눈썹을 무섭게 치켜 올렸다.

  “아니, 어색한 애들한테만 그렇게 웃는다니까? 평소에도 그렇게 웃으면 근육 경련 일어날 걸. 네 앞에서 짓는 표정들이 다 진짜 나라고. 그리고 품으로 받은 건 그냥…… 본능이야. 애가 넘어지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거라고. 너였어 봐, 짐이고 뭐고 바로 다 내팽개치고 붙잡았겠지.”

  “…….”

  시라부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세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야, 너야말로 나한테만 짜증내잖냐. 지금도, 요 미간, 어?”

  세미는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숙여 시라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대고 두어 번 콩콩 두드렸다.

  “와카토시 앞에서는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너야말로 내 앞에서 웃어준 적은 있냐?”

  세미의 말에 시라부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려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야, 눈 피하지 말고.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괘씸해 세미는 고개를 숙여가며 집요하게 시라부의 눈을 마주했다. 

  “그야 우시지마 선배는 멋있으시니까요.”

  시라부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품고 있었다. 아, 그러셔? 세미는 한쪽 눈썹을 크게 들썩이며 품에 가두고 있던 시라부를 놓아주려 했다. 이 뻔뻔스러운 자식. 원래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었지만 이렇게나 뻔뻔스러운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아까 자기 입으로 애인 운운 할 때는 언제고, 뭐? 우시지마 선배가 멋있으시니까? 솔직하지 못한 시라부의 평소 성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슬슬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건

  “……는 ……요.”

  얼굴까지 후끈거리는 느낌에 시라부를 놓아주고 져지를 벗으려는 찰나, 시라부가 살짝 손을 잡아 세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라부는 옆으로 고개를 돌린 상태로 푹 숙이기까지 해 도저히 얼굴을 보려야 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세미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제 소매를 붙잡은 시라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손보다 한 마디 정도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소매를 붙들고 있는 모양새가 꼭 엄마를 잃지 않으려는 어린 아이처럼 보여 귀엽다고 생각했다.

  “안 들려.”

  “……세미 선배는 좋아하니까요.”

  “…….”

  “……됐습니까?”

  당연히 이쯤 되면 다시 소리를 지르며 ‘안 들리면 듣지 마세요.’와 같은 말을 툭 뱉어내곤 나가버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라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세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조용히, 세미의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읊조렸다. 동시에 세미는 그대로 조각상마냥 얼어붙었다. 아, 젠장, 귀여워.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해야 할지 도저히 사고회로가 동작하지 않았다. 그저 세미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애인이 상당히 사랑스럽다.’라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세미 선배?”

  시라부가 세미를 부르며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어댔다. 세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됐나보네요.”

  그럼 이만. 몇 번을 휘저어도 세미가 움직일 생각을 않자 시라부는 세미의 소매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안 됐어.”

  세미가 시라부의 팔을 잡아 돌린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세미는 조금 전과 같이 또 한 번 시라부를 제 품에 가두었다. 

  “너 너무……”

  세미는 시라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라부의 눈동자가 잠시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세미의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자 조심스레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귀엽잖아.”

  뒷말이 간신히 한숨처럼 흩어졌다.

  “귀여워 죽겠어.”

  “……언제는 귀엽지 않다면서.”

  “취소. 다 취소.”

  동시에 시라부는 저를 끌어안은 팔이 더욱 몸을 옥죄는 걸 느꼈다. 이러다 숨을 못 쉬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저를 꼭 끌어안고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세미의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고 한 소리 하려던 건 그만두기로 했다. 

  “맨날 질투해주라, 시라부.”

  “지금 맨날 질투할 일을 만들겠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

  급격하게 작아진 세미의 목소리에 시라부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어 세미의 등에 둘렀다. 제 앞에서는 보여준 적이 없는 웃음이라 투덜대긴 했지만 사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세미 에이타가 천 한 겹도 두르지 않은 순수한 얼굴을 보여주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는 걸. 그럼에도 괜한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그는 너무나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자신 외에도 다정하다는 거였다. 평소에도 그 점이 묘하게 심기를 자극했는데, 오늘 그 일을 보고 나니 쌓여있던 것들이 전부 폭발한 것 같았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다정하게 군다 해도 세미의 눈이 향하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어린애 같은 투정이었다. 확인 받고 싶어 하는 마음. 그리고 결과는 역시나였다. 지금 맞닿은 가슴에서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이 분명히 사실을 알려주고 이었다. 세미 에이타는 나를 좋아해.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세미 선배.”

  시라부의 부름에 세미는 살짝 얼굴을 들어 시라부를 마주보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탓인지, 혹은 그저 얼굴에 피가 몰린 탓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세미의 얼굴은 귓바퀴처럼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귀여워 해주세요.”

  조금,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내심 아닌 척 하면서도 우시지마를 신경 쓰고 있었나 싶어서. 시라부는 본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유독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진심을 말하는 게 서툴고, 부끄러웠다. 오늘은 처음으로 용기가 났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앞에서 보여주는 얼굴들이 전부 진짜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이제는 용기를 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귀여워, 진짜로.”

  세미는 살짝 멍한 눈으로 시라부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리고는 느리게 세미의 얼굴이 시라부의 얼굴 위로 다가왔다. 시라부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예정된 절차였다. 곧, 따뜻한 입술이 제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